5.3 인천 항쟁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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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인천 항쟁의 흔적을 찾아서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올해는 6.10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6월 항쟁의 의의야 굳이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6월 항쟁은 왜 시작되었으며 제도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결과를 낳을 정도로 성공했을까? 일반적으로 박종철 열사의 고문사가 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혁명은 찬란한 섬광이 아니다. 돌과 같은 침묵의 누적이다.” 란 말이 있다. 생각해 보면 그전부터 돌은 계속 쌓이고 있었고, 1987년에 이 돌들이 굴러서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이미 1985년 총선에서 직선제 개헌을 내세우며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 돌풍이 일어났고, 전두환의 철권통치도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6년이 되자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더 타올랐으며, 이에 발맞추어 신민당은 2월 12일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신민당과 양 김 씨가 주도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가 중심이 되었으나, 30만이 운집한 광주 대회에서부터 신민당 측의 자제요구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살 책임자처벌' 구호가 등장했다. 이어서 10만 명이 모인 대구 대회에서는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신민당과는 별도의 대중집회를 조직해서 진행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4월 29일, 김대중 민추협 공동 의장이 ‘소수 학생’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고, 다음날 청와대 영수회담에서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좌익 학생들을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발언까지 하면서 급진세력과의 단절 의사를 밝히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 분개한 재야세력과 대학생, 노동자들은 5월 3일 신한민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시민회관 주위에서 대회 시작 전부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사실 이미 인천은 물론 서울에서도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엄중한 경계를 뚫고 모여든 상태였다. 이 날 거의 대부분의 ‘조직’들이 노선을 불문하고 참가했다고 한다. 물론 대규모의 경찰 투입으로 인하여 대회는 신민당 지도부가 시민회관으로 입장하지도 못하면서 무산되었다.


인천시민회관 주위 즉 주안일대는 ‘해방구’화 되었다. 2만여 명의 시위대는 2킬로미터가 넘는 경인로를 장악했고, 오후가 되면서 스크럼을 짜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경찰과 충돌하였다. 그 과정에서 민정당 인천지구당사의 일부도 소실되었다. 시위대는 신민당의 각성을 요구하고 이원집정(二元執政)제 개헌 반대를 외치며 국민헌법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의 소집 등 ‘급진적인 주장’을 외쳤다. 이 때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핸드마이크를 든 인물 중 하나가 나중에 경기지사에 당선되는 김문수였다. 이날 구속된 그는 2년 5개월을 복역해야 해서 6월 항쟁 때는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날로 신민당과 재야의 공조가 깨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319명이 연행되었고 129명이 구속되었다. 단일 사건으로는 최다 구속자였지만, 이 기록은 불과 5개월 뒤에 건대 항쟁에서 무려 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구속되면서 깨지고 만다. 그리고 운명의 1987년이 밝았고, 박종철 열사가 희생되면서 운명의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양 김씨 중심의 제도권 야당과 재야 및 학생 운동권 세력의 공조는 그해 4월에서야 회복되었다.

 

30년이 넘은 세월이 지나 그 무대인 시민회관 주위도 많이 변했다. 2천명을 수용할 수 있어 당시로는 큰 규모인 시민회관도 다른 도시들처럼 인천 역시 시청을 신시가지인 남동구 쪽으로 옮기면서 종합문화예술회관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새 건물로 역할을 넘긴 다음 아예 철거되어 시민공원으로 변모하였다. 예전에는 주안역에서 버스 한정거장 정도를 걸어야 갈 수 있었지만 바로 옆에 인천 지하철 2호선이 최근 개통되어 역 이름이 ‘시민공원역’이 될 정도로 세월이 지났다. 역 이름이 ‘5.3인천항쟁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공원에는 꽤 오래전에 조그만 금속제 ‘인천 5.3항쟁 민주항쟁 터’ 기념비가 세워졌고, 그 것은 그대로 두고 30주년을 맞은 2016년 5월에 큰 돌로 만든 기념비와 표석이 세워졌다. 기념비의 정면에는 “다시 부르마, 민주주의여!”라는 문구가, 뒷면에는 구속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이 새겨져 있다. 그 옆에 있는 작은 표석에는 “인천 5.3민주항쟁은 1986년 5월 3일 인천지역 노동자, 학생,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정부 수림과 민주헌법 쟁취를 외치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이다. 오늘 우리는 항쟁 발발 30주년을 맞이하여 그날의 외침을 인천지역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으로 기억하고자 여기 표석을 남긴다.”라고 쓰여져 있다.

 

기념비와 표석 설치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왠지 설명이 허전하다. 특히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어 아쉬웠다. 그래도 “인천지역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으로 기억하고자” 한다는 구절은 마음에 들었다. 인천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서울의 ‘항구’나 위성도시가 아니라 독자성을 가진 도시로서 평가를 받아야 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월은 광주와 노무현의 달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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