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주민교회를 찾다.

성남 주민교회를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성남! 지금은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유수의 대도시로 수십만이 넘는 중산층이 사는 ‘준강남격’인 신도시들을 거느린 부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탄생과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부터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시작했고, 그 결과 서울로 엄청난 농촌 인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을 수용할 주택도 기반시설도 없었기에 대부분 판자촌 등 ‘개돼지’ 같은 비인간적 환경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팽창하던 서울의 인구와 공장을 분산 수용하기 위해 그리고 도심재개발을 위해 서울 도심에서 동남쪽 20㎞ 지점에 위치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훗날 성남시 수정구 · 중원구가 될 350만여 평의 땅에 6년에 걸쳐 신흥 위성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평지인 지금의 분당구 일대에는 1980년대 후반에서 가서 신도시가 들어섰지만 대부분이 산지와 언덕인 수정구 · 중원구 일대가 20년이나 먼저 개발되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보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유는 허탈할 정도로 간단한데, 산지가 더 쌌기 때문이다. 또한 경부고속도로변과 떨어진 계곡에 빈민들을 몰아넣어 눈에 띄지 않게 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1968년부터 일차적으로 35만 평 규모의 단지가 ‘조성’되었고, 1969년부터 대다수가 청계천 등 사대문 안, 영등포와 용산 등지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강제철거 된 2만 1,372가구 10만 1,325명을 이주시켰다. 1971년 8월까지 2만 5,267세대 12만 4,356명에게 토지 분양과 일터를 약속하고 이주시켰다. 하지만 그 인구의 대부분이 참가한 거대한 민중봉기 즉 광주대단지 투쟁이 일어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약속했던 기반시설은 20%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정부와 서울시의 일방적 행정은 여전했으며 부동산 투기 바람까지 불었다. 1971년 8월 10일 오전 11시 경, 약속된 서울시장 면담이 불발되자 분노한 시민들은 성남출장소를 점거했다. 순식간에 5만 명이 넘게 모여들었고, 분노한 군중들은 12일까지 성남 일대를 완전히 해방구화 하였으며 급기야 서울진출까지 시도하면서 성남대로는 완전히 전쟁터로 변했다. 박정희는 내무부장관과 서울특별시장, 경기도지사를 파견하여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요구조건을 수용함으로써 투쟁은 3일 만에 진정되었다. 다음 달인 9월 13일, 성남 출장소가 시급으로 승격되고 구호물자 지급, 공장건설, 주택건립, 도로 건설 등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973년 7월 1일에는 성남시로 정식 승격되었다. 물론 서울이 싸놓은 똥, 또는 서울의 사생아라는 격한 표현은 성남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분당 개발 이후에는 북쪽은 구도심, 남쪽은 아파트 위주의 신도시라는 모습 역시 비슷해졌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겠지만 참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가장 강력한 반독재 세력 중 하나였던 개신교회는 이 투쟁 직후인 71년 9월 1일, ‘수도권 도시빈민선교위원회’를 조직했고, 주민들의 잠재력을 개발하고 오직 조직력만이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이미 70년 7-8월에 광주대단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권호경 전도사를 파견했고, 그는 72년 5월 월요교회를 창립했다. 월요교회는 주민교회의 전신이 되었는데. 이해학 전도사는 성남시 수진동 26-84에서 이점례 등 교인 12명을 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주민교회는 성남시에서는 명동성당이나 종로5가 기독교회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빈민운동과 노동운동 외에도 의료활동, 직업상담, 야간학교, 신용협동조합 설립 등 그야말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성남시민들을 도왔으니 적어도 성남에서는 명동성당 이상의 존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상락이나 이재명, 김태년 등 성남시의 대표적인 정치인도 주민교회와 함께 성장한 인물들이다. 물론 리더인 이해학 목사는 여러 번 구속되는 등 고초를 피할 수 없었다.

노동자인 청년회원 김종태는 신촌로터리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으로 항거하였으며, 주민교회 교인들은 매년 추모예배와 각종 시국기도회, 개헌서명운동 참여 등으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설립 목적인 노동자, 빈민을 위한 지역운동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1984년 4월에는 이상락, 이태영의 주도로 ‘성남인력센터’를 개소하였는데, 이는 훗날 복정동 인력시장을 거쳐 전국 조직인 ‘건설산업노동조합’의 모태가 되었으며, 1985년 기독교 도시빈민선교협의회 창립(회장 이상락 집사), 1986년 성남지역 노점상연합회 창립(회장 임용제) 등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운명의 1987년. 주민교회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성남지역본부 결성에 주도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해학 목사는 상임공동대표, 이상락 집사는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교인들도 적극적으로 거리에 나섰다. 6월 10일 오후 7시, 주민교회 교인 170여명은 인하병원 앞에서 민주화를 위한 예배를 올리고 시청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는데, 8시 반 경에는 3만 여명이 운집하였다. 11일부터 16일까지는 소강상태였지만 17일과 18일에는 다시 수만 단위의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결국 26일 평화행진 때에는 절정에 이르러 다음 날 새벽3시까지 이어졌다.

6월 항쟁은 전국적인 사건이었지만 지역에 따라 참가 열기는 차이가 있었다. 그 중에서 성남의 참가열기는 단연 높았고, 대학생은 물론 공장 노동자, 자영업자, 서비스업 종사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가했다는 점에서도 돋보였다. 그 중심에는 주민교회가 있었다. 물론 주민교회의 활동은 1987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0년 7월에는 ‘주민생활협동조합’ 을 창립하였고, 1994년에는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개소하면서 체계적인 이주 노동자 상담과 지원활동을 시작하였다.

2013년 6월 10일, 성남민주항쟁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제26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을 열었고, 6.10 성남민주항쟁을 기념하는 ‘성남민주화운동기념비’를 주민교회 앞에 세웠다. 하지만 기념비가 세워진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이번 30주년 기념일에 옛 시청터에 조성된 공원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광주대단지 투쟁과 6월 항쟁 당시 격전지였던 옛 성남시청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라졌고 신구도심의 중간지점에 세워진 신청사로 이전하였다. 한국 현대 도시사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남이기에 앞으로 단순히 기념비의 이전만이 아니라 보다 입체적이고 역사성 깊은 기념시설들이 들어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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