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의 알려지지 않은 무대 : 조치원역 광장

한국현대사의 알려지지 않은 무대 : 조치원역 광장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전 세계적으로도 사상 유례가 없었다는 평을 들은 촛불혁명이 시작한지 1주년이 되었다. 그런데 촛불혁명의 성과를 논하는 것과는 별개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2016년 10월에서 2017년 4월까지의 ‘촛불혁명 기간’에 사실상 중앙정부는 거의 무력화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성숙한 국민 의식 덕분이었지만, 의회제도와 함께 민주주의의 양 날개라고 할 수 있는 지방자치제의 정착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991년 지방의회 선거, 1995년 단체장 선거부터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지방자치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48년 제헌헌법은 지방 자치에 관한 조항을 두었으며, 1949년에 지방 자치법이 제정되었으나, 전쟁 때문에 1952년에 와서야 비로소 최초의 지방의회가 구성되었다.

4.19혁명 후 집권한 장면정부는 지방 자치법을 개정하여 명실상부한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가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관련법의 효력을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1972년 유신헌법은 지방의회의 구성을 ‘조국 통일’ 때까지 유예하다는 규정을 부칙에 두어 사실상 사문화 시키고 말았다. 1980년 5공 헌법도 지방의회의 구성을 지방 자치 단체의 재정자립도를 감안하여 순차적으로 하되 그 구성시기는 법률로 정한다는 부칙조항을 두었지만 실시하지 않으면서 지방자치는 말살되었다.

1987년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지방의회의 구성에 관한 유예 규정이 철폐되고 다음해에는 지방 자치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1991년 상반기에 선거가 실시되어 지방의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자치 단체장 선거는 정치적 힘겨루기와 우여곡절 끝에 1994년 3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의 제정으로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되면서 현재의 지방자치제도가 정착되었다. 지면관계상 경과는 이 정도로 정리했지만 그 과정은 복잡했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2년 8월 31일에 일어난 충남 연기 군수 한준수의 관권선거 폭로였다. 노태우의 부관출신이자 청와대 총무수석을 지낸 인사가 연기군에 후보로 출마하자 내무부장관과 도지사가 직접 나서서 군수부터 이장까지의 행정조직을 총동원한 관권선거를 자행했다며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특히 내무장관은 “직을 걸고 여당 후보를 당선시켜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연기군의 중심인 조치원역 광장에서는 야권의 규탄 집회가 여러 번 열렸으며, 결국 지방자치제를 앞당기는데 영향을 미쳤다. 한 편 이 사건으로 세 명이 국회의원 선거 관리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다. 도지사, 그리고 여당 후보, 그리고 한준수 군수였다. 그 셋 가운데 가장 큰 처벌을 받은 이가 한준수였다. 공직에서 파면되었고 선거에 개입해서 금품을 나눠 주는 행위 등을 했다며 대법원은 판결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관권선거를 폭로한 내부고발자라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민주화운동심의위원회는 그의 행적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복직을 권유했으나 행정안전부 장관은 거부했고, 2009년 법원은 그의 행위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것이 위법 사실을 부인케 할 수는 없다며 끝내 그의 명예 회복을 좌절시켰다. 어쨌든 이 사건은 대한민국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런데 조치원역 광장은 21세기 들어 다시 한 번 한국 현대사의 중심이 된다.

한준수 군수의 법적 명예회복이 좌절된 2009년. 이 광장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1년 넘게 지속된 세종시 사수 투쟁의 주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풍스러운 벽돌로 지은 역사(驛舍)는 헐리고 현대식 역사로 새로 만들어져 있었다. 사수 투쟁의 결과 2004년 행정수도 위헌판결 후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세종시 파기 요구는 결국 좌절되었다.

“그때 조치원역 광장은 한마디로 서울의 광화문 광장이었슈. 여기서 100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촛불을 들었으니께유. 구호라고는 한 번도 외쳐본 적 없는 시골 사람들이 광장에 뛰쳐나와 머리띠 매고 행정수도 원안 사수하라! 수정안 취소하라! 외쳤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뜨거워지는데... 순박한 사람들이 화나면 무서운 벱이유. 지조가 있으니까, 옳다 생각하면 옆에서 달콤한 말로 꼬드겨도 안 넘어가유. 그분들이 조치원역 광장에 만날 안 나왔으면 지금 세종시도 없었을 거유.”

조치원 토박이로 살아온 주민은 10년 전 당시 조치원역 앞에서 연일 농성을 벌이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렇게 조치원역 광장은 옛 연기군 주민들 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각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다.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이 표류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세종특별자치시설치특별법이 통과되기까지 거점이었던 이곳에는 주민들의 분노와 환호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조치원역 광장이 2017년 3월, 시민 광장으로 새로 단장되었다. 주차장을 치우고 아스팔트 바닥을 화강암 블록으로 교체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동식 화단이 설치된 이 공간은 주민 행사나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KTX가 다니는 오송역과는 달리 열차도 그렇고 주변 환경도 아널로그적인 조치원 역. 아래의 시처럼 그 역에서 내릴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기차를 타고 지나갈 일이 있으면 1992년과 2009년의 그 일들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은 <조치원>​

남 고자질하는 사람이 없는 들녘
허술한 장사아치인들
허술한 나그네인들
먹을 양식을 싸가지고 가지 않아도 되는 들녘
떠날 제비 드높이 있고
가을은 왜 그다지도 마음 가득한지
그곳을 경부선 호남선이 지나간다
지나갈 뿐
한 번도 그곳에 내려본 적이 없어 죄스러워라

조치원역 정년퇴직 앞둔 금테모자 역장이
맨드라미 플랫홈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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