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3김 중 하나. 김수환 추기경의 흔적을 찾다.​

진정한 3김 중 하나. 김수환 추기경의 흔적을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3김이 가진 무게는 호불호를 떠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김종필이 양김과 같은 ‘급’인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김종필을 빼고 김수환 추기경을 넣어야 맞는 다고 주장했는데, 이 견해에 동의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 시사 주간지는 1989년부터 매년 마다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란 타이틀로 가장 영향력 있는 10인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김수환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여기서 빠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김수환이란 인물이 우리나라 현대사 특히 민주화 과정에 있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묘하게도 김수환과 김대중은 같은 해 즉 200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수환은 1922년 7월 2일 경상북도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군위군에는 그 때의 집이 복원되어 있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아직 완성되어 있지는 않다.

어린 김수환은 어머니의 ‘강요’로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소신학교에 입학했고, 상경하여 동성학교에 진학했는데, 당시 교장은 장면이었다. 그는 김수환이 일본 조치 대학으로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줄 정도로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 존경 한다."고 회고했다. 장면에 대해 이런저런 평들이 많지만 김수환의 스승이자 김대중의 대부로서 두 인물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지금보다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생사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해방을 맞이해 무사히 귀국, 그때부터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195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안동 목성동성당 주임신부를 맡았다. 이 성당은 훗날 경북 북부 지역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1956년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바쁜 와중에도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어려움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들을 위해 어려운 일들을 같이 처리해 주었는데, 귀국하게 되자 그들이 슬퍼하면서 잘 전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으로 그는 어려운 이웃의 존재를 결코 잊지 않았다고 한다. 김수환 신부는 1966년, 그 해 신설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를 맡았고, 심도직물 사건에서 노동자 편에 서면서 첫 번째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는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만인 1968년 서울대교구장이 되었다. 마침내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그리고 당시 전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로부터 그는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선다. 김수환은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인천교구장 나길모(미국인) 주교, 안동교구장 두봉(프랑스인)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의 리더 였다. 가장 권위가 있는 추기경으로서 거의 모든 분야의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71년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성탄절 미사에서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며 박정희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명동성당은 종교의 성지라는 특성상 경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이곳은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운동가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소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피신처였다. 물론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그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하일라이트는 1987년 이었고, 박종철 고문치사 직후 추모미사에서 했던 '카인의 대답'이라는 강론은 압권이었다.

주님께서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자 "'탕'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런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고문 경찰관 2명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릅니다."라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 일축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최근 7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1987>에서 이 장면이 나오지 않을 까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제작사에서 김수환 추기경까지 등장시키기에는 부담을 느낀 듯 싶다. 대신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축소 조작을 폭로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명동성당 내부에서 촬영된 첫 영화라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서울 교구장에서 은퇴한 후, 2009년 2월 16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생명 연장만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도록 당부했기에 산소 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의 처치를 받지 않고 삶을 마쳐, 존엄사 논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기기증 서약에 따라 선종 직후 안구 적출수술을 받았으며, 장례 절차 등도 '다른 신부와 달리 특별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그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졌다. 5일장으로 결정되었는데, 선종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간 약 40만 명의 시민들이 추위를 무릎 쓰고 긴 줄을 서가면서 조문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용인의 사제 묘역에 안치되었다. 묘비에는 김 추기경의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시편 23편 1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가 새겨졌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직접 묘비명으로 부탁한 구절이라고 한다.

2018년 2월로 그가 간지 9년이나 되었다. 이제 명동성당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억울한 사람들이 울부짖던 그 언덕길은 완전히 재개발되어 상업시설들이 들어섰고, 농성장에서 벗어 난지도 꽤 오래되었다. 과거와는 달리 종교와 대학교가 중심에 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지만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는 2월 16일,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를 기억했으면 한다. 몇 가지 아쉬움은 있지만 한국 사회가 그에게 진 빚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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