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6월 항쟁을 이끈 두 변호사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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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6월 항쟁을 이끈 두 변호사의 흔적을 찾아서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6월 항쟁이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에 준 거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6월 항쟁은 4.19혁명과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폭력적이고 부패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자연발생적인 분노를 담아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하지만 6월 항쟁은 국본이라는 전국 조직이 거의 전국에서 대중들의 봉기를 이끌어 내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제2의 도시 부산이 강력한 투쟁력을 발휘하여 명동성당 농성 해산 후 에너지가 떨어져 가던 투쟁 열기를 되살려 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중심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과 문재인 두 변호사가 있었다. 그들은 외모도 큰 차이가 있고, 학벌도 달랐으며, 성격도 달랐다. 노무현 변호사는 도전정신, 뜨거운 결기, 직설 화법의 화신이었고, 사람들은 그의 투박한 매력에 끌렸다. 일곱 살 아래의 문재인 변호사는 인내심과 냉정하지만 오래가는 원칙론,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고집으로 뭉쳐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둘은 같은 ‘과’였다. 문재인은 그의 자서전 <운명>에서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은 부산 부민동에 있었다. 수수하다 못해 조금 허름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날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글에서 나오는 허름한 건물의 이름은 남경 빌딩이다. 외관을 리모델링 하긴 했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그 이름으로 건재하다. 당시에 1층에 있었던 복국집은 바보면으로 바뀌었는데, ‘바보’라는 이름을 상호로 쓴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민동은 과거 경남도청과 법원이 있었기에, 두 변호사의 사무실도 바로 옆에 위치했던 것이다. 남경 빌딩에서 5분만 걸어가면 임시수도 기념관이 있는데, 일제시대 경남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한국 전쟁 당시에는 이승만의 관저로, 이후에는 부산고등검찰청장의 관사로 쓰이다가 지금은 기념관으로 바뀌어 있다. 부산 법원과 검찰은 연제구로 이사 간 지 오래이고 그 때의 법원 건물과 부지는 동아대학이 인수하여 사용하고 있기에, 그 때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쉬운 감정은 금할 수 없다. 어쨌든 이 건물에서 부림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부산, 경남 지역의 시국 사건이 두 변호사의 손에서 다루어졌던 것이다. 88년 5공 청문회에서 초선의원 노무현의 서릿발 같던 결기와 치밀한 언변이 다듬어 진 곳도 부민동이었다.


그림1(좌) 두 대통령을 낳은 명당이라고 소문난 남경 빌딩의 옛 모습
그림2(우) 남경 빌딩의 지금 모습. 2-4층은 원룸으로 바뀌었다. 

두 변호사가 활동한 공간은 부민동 법조타운만은 아니라 부산 전체와 경남의 노동현장이 그들의 활동무대였지만 지면 관계상 모두 다룰 수는 없고 그 중 가장 중요한 부산 YMCA와 가톨릭 센터를 살펴보고자 한다. 동구 중앙대로 변에 있는 부산 YMCA는 “한국 특유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으로 인하여 투쟁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 왔었으나” 라는 홈페이지에의 인사말처럼 부산 민주화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 왔었다. 두 변호사를 비롯하여 최성묵 목사와 김광일 변호사 등 많은 부산 지역 민주화 운동가들이 이 조직의 이사를 맡았던 것이 좋은 증거이다.

인권변호사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노무현은 원래 세무와 민사 소송에 능했고, 1982년 3월, 부산 YMCA가 주최하는 무료법률상담을 진행하여 이름을 날린 바 있었고, 역시 부산 YMCA가 운영하는 노동자 교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이 조직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당시 4층이었던 회관은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회관이 지어진 지도 오래 되었다.


그림3(좌) 현재의 부산YMCA 회관
그림4(우) 1987년 4월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회 

부산의 6월 항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는 부산 가톨릭 회관이다. 문재인 변호사가 가져온 광주 비디오가 부산에서 가장 먼저 상영된 곳이자, 연 인원 6만 명이 관람한 ‘5.18광주민주항쟁 영령추도사진전’이 열렸고, 부산교구 사제단의 단식농성장 이기도 하지만 역시 압권은 87년 6월이었다.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된 직후인 6월 16일부터 7일간 계속된 농성은 부산교구의 여러 본당이 돌아가면서 식사를 만들어 센터의 농성단에 제공할 정도로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아 6월 항쟁의 승리에 큰 공헌을 하였다. 2017년 10월에 기념표지석이 세워졌다.

여담이지만 영화 <변호인>에서 박종철 열사의 영정을 들고 벌린 가두투쟁의 무대가 바로 이 건물 앞이었다. 지난 5월 23일은 노무현 변호사의 기일이기도 하다. 6월 항쟁 기념일을 맞이하는 지금 부산에 갈 일이 있다면 이곳들을 찾아 대통령이 아닌 31년전의 두 변호사를 기억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림5 이 건물은 다른 곳과는 달리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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