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의 거인이 살던 곳, 동교동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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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의 거인이 살던 곳, 동교동 자택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서울에서 가장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 중에 하나가 신촌과 홍익대 앞이다. 당연히 수많은 점포들이 모여 있는 번화가지만 묘하게도 멀지않은 두 지역 사이에는 조용한 주택가들이 형성되어 있다. 그 곳에 바로 우리나라 정치사와 민주주의 역사에 빼놓을 수없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과 김대중 도서관이 있다.

김대중은 1963년 4월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찾는 손님이 많아지자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동교동 국민주택 한 채를 전세 내어 입주했다. 1년 뒤 은행 융자를 보태어 이 집을 구입하면서 김대중의 ‘동교동’이 시작되었다. 물론 당시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당시 이 지역은 “비가 오면 마누라보다 장화가 더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도로포장이 안 된 변두리였다. 김포공항이 생기고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가 개통되면서 도로가 포장되면서 마을다운 마을이 생겼다. 그런데 이 집은 한 때 집 자체보다 문패가 더 유명했다. 이희호 여사의 회고이다.

집수리를 마치고 남편이 상경해서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 문패를 달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국회에서 귀가한 남편은 2개의 문패를 내놓았다.

‘金大中’, ‘李姬鎬’.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대문에 당신과 내 문패를 나란히 답시다.”
“…”

“가정은 부부가 함께 이뤄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부부는 동등하다는 걸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입시다.”

자신의 문패를 주문하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고 남편을 하늘이라 믿고 따르라고 가르치던 그 시대에,
더욱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 동교동 집은 김대중 부부가 한 때의 미국 망명시기와 일산과 청와대 시절을 빼고는 40여 년 동안 살아온 ‘보금자리’이자 김영삼의 상도동과 더불어 한국 야당, 나아가서 한국 정치의 한 축이 되었다.

군사독재의 광기가 지배할 때는 ‘불온’의 딱지가 붙었던 곳이지만, 정가에서는 야당의 절반을 지휘하는 사령부로 인식되곤 했다. 이곳이 본격적으로 이런 위상을 갖게 된 것은 1971년 집 주인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부터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는 그의 초인적인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부정으로 인해 아쉬운 패배로 끝나고 말았고, 이는 역설적으로 유신독재의 한 원인이 되었다. 물론 그는 유신에 대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1978년 12월 27일 서울대학 부속병원 병실에서 형집행정지조처로 풀려났다.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였다. 박정희는 라이벌 김대중을 납치해 온 뒤 유신을 통한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야 그를 풀어준 것이다. 12월 27일 새벽 2시에 ‘출감’한 김대중은 바로 동교동 자택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날이 밝자 종로 5가 기독교회관으로 달려가 기도회에서 연설하고, 이어서 수감 중인 많은 양심수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부는 이날부터 가택연금을 실시하여 일체 외출을 막고, 외부 인사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다음 해 박정희는 부하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지만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민주주의는 다시 짓밟힐 위기에 몰렸다.

1980년 5월 14일 오후 2시경, 문익환ㆍ이문영ㆍ예춘호ㆍ이해동 등 반유신ㆍ반신군부 투쟁의 지도자들이 동교동 자택을 찾았다. 이들은 강경한 내용의 시국선언 문안을 만들어 서명을 요청하였다. 이미 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들의 서명이 있는 문건이었다. 군인들의 무장거부, 노동자 파업, 상인 철시, 서울시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충단 공원, 지방에서는 도청으로 집결할 것 등을 촉구하는 문안이었다. 이들은 연일 시위대가 서울을 비롯해 전국 주요 도시를 휩쓰는 ‘혁명전야’와 같은 상황에서, 재야 지도자들이 강경한 노선으로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김대중은 이들이 가져온 문안내용을 단호히 반대하면서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ㆍ신현확 퇴진”으로 제한할 것을 설득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섣불리 강경한 주장을 내놨다가 기회만 노리는 신군부 측에 빌미를 주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5ㆍ17후 신군부가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을 때 이 성명서가 원안대로 발표되었다면, 꼼짝없이 내란선동, 국기문란의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그를 조사하던 수사관이 혼잣말처럼 “당신이 이 성명서에 서명을 했어야 일이 수월했을 터인데….”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신군부는 중동을 방문 중인 최 대통령을 서둘러 귀국시키고, 17일 밤 11시에 청와대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시킨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감행했다. 서울의 봄을 압살시킨 신군부의 ‘진짜’ 쿠데타는 가장 먼저 동교동 집을 포위하고 집주인의 가슴팍에 대검 꽂힌 소총을 겨누면서 시작되었다. 체포된 김대중은 그 길로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그 후 그는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국내외의 구명활동으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미국에서 귀국한 1985년 2월 8일부터 1987년 6월 24일 사이, 28개월 동안, 동교동 자택은 무려 54차례나 ‘연금’되었다. 하루, 이틀, 사흘의 토막 연금은 다반사였고, 6월 항쟁 시기에는 최장 18일까지 가둔 적도 있었다. 물론 저항을 기념하는 날인 3ㆍ1절, 4ㆍ19혁명 기념일, 5ㆍ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는 어김없었다.

그는 한 때 저택을 ‘동교동 교도소’라고 이름 짓고 이 여사를 소장이라고 부르곤 했다. 응접실 벽에 커다란 ‘불법감금 달력’을 만들어 붙이고 O와 X로 기록했다. 연금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닌 김대중 고사(枯死)였다. 외신 기자들마저 출입을 불허한 사실상의 유폐였다. 하지만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양복을 차려입고 서재에 9시에 ‘출근’하여 5시 넘어 ‘퇴근’했다. 무서운 자기 절제였다. 그는 직선제에 회의적인 이민우 총재가 신한민주당을 탈당하고 김영삼 씨와 만든 신당인 통일민주당 창당 행사와 기자회견장은 물론이고 창당발기인대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양 김씨의 통일민주당을 막지 못할 경우, 김대중이라도 격리해 고사시킨다는 전략이었다. 가장 많을 때는 전경 3,000여 명이 신촌 로터리로부터 동교동 로터리까지를 포위했다.

그 한 사람을 연금시켜 놓기 위해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의 경찰이 연일 동네 어귀를 막아섰고, 집 앞에 감시용 TV 카메라를 설치하여 그와 그 주변의 동정을 24시간 감시했다. 집 앞에는 기관의 승용차가 몇 대씩 배치되어 그가 외출할 때마다 그 뒤를 쫓았다. 연금기간 중에는 아예 차고 문 앞에 기관용차를 주차시켜 놓기도 했다. 귀국 후 복권될 때까지의 2년 5개월 동안 그는 이 같은 연금을 회수로는 55차례, 일수로는 총 183일이나 당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행동을 제한받은 정치인은 아마 헌정사상 처음 이었을 것이다. 6.29 선언 이후 동교동은 더 이상 그런 수난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의 중심으로서의 위상은 여전했다. 개인적으로는 92년 대선 광고에 나온 동교동 지하 서재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19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에 유학차 가 있던 그는 93년 6월 귀국하여 지금은 자택 바로 옆에 있는 김대중 도서관이기도 한 아태재단을 설립하여 국제문제와 남북문제 연구에 전념했다. 95년 사실상 정계에 복귀하였고, 95년에는 일산으로 이사하여 동교동 시대는 저무는 듯 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날도 일산에서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재임 기간 그는 동교동으로 돌아오기로 했고, 퇴임 후 이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8월 18일은 그 분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는 날이다. 드는 자리는 몰라도 나는 자리는 눈에 띠는 법이다. 그 분이 가시고 그 분의 빈자리는 커 보이기만 한다. 언젠가 이 집은 ‘김대중 기념관’ 이 될 것이고, 민주주의의 새로운 성지가 될 것인데, 그 때 나도 이집 특히 지하의 서재에 가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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