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흔적을 서울에서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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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흔적을 서울에서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5월은 5·16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에서 기록될 만한 달이지만 4년 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더욱 ‘쎈’ 달이 되고 말았다. 그는 김해 봉화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부산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상고 출신답게 조세전문변호사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로 돌아섰다. 부산에서 6월민주항쟁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렸던 노무현 변호사는 노동자를 돕기 위해 국회의원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988년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5공 핵심 허삼수를 이기고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로서 마흔 살이 넘도록 김해와 부산에서만 생활했던 그는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노무현 의원은 여의도의 한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인권변호사로서 유명했다지만 부산 지역에서만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서울에는 이렇다 할 연고가 없었다. 지금도 여의도는 부촌이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했다. 따라서 딸 정연과 아들 건호는 사투리를 쓰는 ‘촌놈’으로서 학교에서 따돌림 당했다. 여의도에 있는 학교는 여의도 학생들만으로는 정수를 채우지 못했으므로 신길동이나 대방동 학생들도 받았는데, 두 자녀는 그 학생들과 친하게 지냈다. 훗날 노무현 대통령은 자녀가 서민 출신 학생들과 친했다고 ‘자랑’했는데 사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가을, 5공 청문회가 열렸다. 그는 5공 청문회 위원을 맡았다.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였고 노무현 의원은 그야말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모든 신문과 잡지에 그의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나중 이야기지만 이 청문회가 없었다면 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기쁨을 즐겼어야 할 노무현 의원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모든 언론은 고졸 출신의 변호사로서 청문회 스타까지 오른 그의 ‘입지전’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과 사회구조 변혁을 위해 정치를 시작한 그의 생각은 전혀 싣지 않았다.

공덕동 로터리에서 만리동 쪽으로 가는 길에 제일빌딩이 있다. 한 때는 마포에서 손꼽히게 높은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낡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빌딩이다. 하지만 그 유명한 사진 ‘이의 있습니다.’의 무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90년, 이 건물에 통일민주당이 입주해 있었다. 그는 김영삼 총재의 3당 합당을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을 창당한다. 1992년 선거 결과는 낙선이었다.

1996년, 노무현은 결국 부산 지역구를 포기하고 당의 요청으로 종로로 지역구를 옮긴다. 어쩔 수 없이 여의도를 떠나 명륜동에 자리 잡게 되는데, 구입한 집은 장면 전 총리 가옥에 가까운 현대 하이츠 빌라였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이명박 신한국당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하늘이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는지 그가 속한 국민회의가 97년 대선에서 승리하였고 이명박 의원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그는 98년 보궐선거에 당선되었다. 그 집은 청와대에 입성하기까지 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종로는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가 있어 정치1번지로 불리 우고, 국회수첩에도 첫 번째로 등장한다. 지역구민 중에서도 사회 지도층이 많아 누구나 탐내는 지역구였다. 하지만 1999년 2월, 그는 부산출마를 선언한다. 부산에 여당 의원이 없어 부산지역의 민원이 그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그는 지역구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다시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홈페이지 ‘노하우’에 네티즌들의 울분에 찬 글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 결과 세계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가 탄생했다.  

2000년 8월 7일, 노무현 ‘전의원’은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된다. 사실 ‘김대중 당’의 이름을 걸고 계속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던 ‘미안함’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당시 유일한 고졸 장관이기도 했는데 앞으로 고졸 장관을 볼 수 있을까? 2001년 3월 26일 퇴임했으니 8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부조직의 수장으로서, 국무위원으로서 국정전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수협 정상화나 부산 신항만 건설 같은 굵직한 일들을 성공시켰다. 당시 해양수산부 청사는 충정로에 위치한 동아일보 빌딩이었다. 지금도 그 빌딩은 건재하지만 외관은 리모델링을 한 상태이다. 이 경험 탓인지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김근태, 정동영, 정세균, 김두관 등 대선후보 급 정치인들을 국무총리나 장관에 많이 기용했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하면서 그는 그전부터 운영하던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여의도 금강빌딩으로 옮겼다.   

2001년 3월, 해양수산부를 나온 그는 금강빌딩을 근거지로 대선 준비에 들어갔다. 현역의원은 천정배 단 한 명이었다. 상대방에 비하면 너무 단촐한 캠프였지만 2002년 봄, 최초로 시도된 새천년민주당의 국민경선은 무서운 노풍(盧風)을 일으켰고 그는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청와대에서 파란만장한 5년을 보냈고 봉화마을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 잠들었다. 그를 낳아주고 길러준 곳은 김해와 부산이었지만 20년 남짓한 정치생활의 대부분은 서울에서 보냈다. 자연스럽게 그가 있었던 곳들을 연결하면 그의 정치역정을 알 수 있다. 그가 국민 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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