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장준하공원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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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현장] 파주시 장준하공원을 가다

“진 꽃들에게 묻는다! 민주야, 평화야~ 어디만큼 왔니?”


 

 

 

 

 

이시목_ 여행작가/ san1889@naver.com

 

 

 

동판에 새겨진 장준하의 얼굴 아래로 시든 국화꽃 몇 송이가 놓여 있다.


누가 그 곁에 꽃을 놓았나. 흰 국화 몇 송이 노랗게 시들어 말랐다. 어쩌면 시간이란 이토록 야멸찬지, 계절은 어느새 봄 지나 가을 앞에 섰다. 돌이켜보니, 지난 계절 또한 지리멸렬했다. 정권이 외면한 죽음 앞에 몇 송이의 국화만이 놓였다 질뿐, 별다른 진전 한 뼘 없었다. 벌써 수개월째다. 그의 주검이 역사의 진실을 또렷하게 말한 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긴 시간을 침묵으로 일관했고, 급기야는 반민주의 그림자로 한 계절을 뒤덮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공공연히 민주주의의 퇴행을 말했다. 소통을 말하나 사상과 행동으로는 이미 불통인 시대. 당연히 언론은 닫혔고, 정치도 민생은 뒷전인 채다. ‘불통의 완결판’ 같은 시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계절엔 시대를 아우르던 거대 담론마저 사라졌다. 그러니 오라, 길을 잃은 신념들아. 임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파주 그 언덕에 장준하, 그가 찬 돌베개를 베고 누웠다. 민족의 암흑기를 등불이 되어 비추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상계』의 ‘올 곧은 넋, 장준하’에게로. 

 

 

장준하 _ 역사의 한가운데를 뚝심 있게 흐른 삶 

 

초가을의 파주는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선선한가 하면 더웠고, 더운가 하면 쌀쌀했다. 경계란 늘 그렇게 애매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언제나 경계는 새로운 계절과 문화, 혹은 사상으로 이양됐다. 그것이 경계의 정체성이다. 지난 9월, 그 ‘경계의 계절’ 안에서 장준하를 만났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계는 있기 마련이고, 그 경계는 늘 성장과 퇴보의 갈림길이었다. 아니, 경계 특유의 혼란으로 퇴보나 답보 상태에 놓이는 게 다반사. 나 또한 경계 안에선 그렇게 자주 답보했다. 

 

그런데 장준하, 그의 삶에 경계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경계 없이 역사의 한가운데를 뚝심 있게 한 길로 흘러 민족의 역사가 되었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의 삶에 치열했다. 문득, 『돌베개』 속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그의 절규 속에 깃든 ‘민족 해방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그를 경계에 두지 않았을 테다. 어쩌면 사는 내내 국가와 민족에 당당하기 위해 또 국민의 자유와 민권의 수호를 위해 끊임없이 권력에 항거했으니, 그 삶도 참 쉼 없었겠다. 그토록 끊임없는 저항으로, 그는 57년이란 생 동안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당했고 끝내는 주검마저 ‘저항의 역사’로 남았다. 이런 그의 삶을 두고 시인 고은은 “장준하 선생, 저는 감히 당신의 이름 석 자 앞에 ‘민족’이라는 이름을 붙여 드립니다. 그것은 중세, 근세의 소위 문신(文臣)·귀족들의 개수작 같은 호(號)가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온몸을 바친 민족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죽음에 귀납되어 온 것입니다. 민족 장준하 선생, 당신은 이미 이렇게 이름 부르기 전에 민족 자체에 돌아갔으며, 민족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곧 당신입니다.”라고 기렸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노부부가 망원경을 북쪽으로 두고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파주 통일동산에 있는 장준하공원은 그런 장준하의 두 번째 안식처다.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추락사한 모습으로 발견된 이후, 37년 만에 파주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통일동산으로 이장됐다. 알다시피 판문점 길목에 있는 통일동산은 남북의 경계를 이루는 임진강이 한강을 만나는 곳이자, 누구보다 통일을 간절하게 그리는 사람들의 터다. 장준하 또한 청년 시절 ‘6,000리 대장정’(일제강점기에 장준하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충칭임시정부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마음 하나로 찾아갔던 길)을 통해 민족의 축복과 통일을 꿈꿨다. 이것이 크지만 너무 휑해 쓸쓸한 느낌마저 드는 이 공간이 좀 더 특별했던 이유다. 

 


『사상계』 _ 시대를 움직인 말과 언어, 그리고 생각 

 

지난 계절, 그러니까 후텁지근했던 여름, 사람들은 장준하공원으로 소풍을 왔다. 소리 없이 내린 경계의 가을 안에서도 사람들은 곱게 깔린 잔디 위에 무시로 돗자리를 깔았다. 돗자리를 깐 지점 어디서나 ‘八’자 모양의 추모벽(조형물)이 보였다. 추모벽의 주인을 알든 모르든 사람들에게 조금씩 익숙해지는 건 좋은 일일 테다. 장준하와 함께 민주주의 역사에도 그렇게 조금씩 사람들의 시선이 향했으면 좋겠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의 추모벽 앞에 섰다. 동판에 새긴 장준하의 환한 얼굴 아래로 흰 국화 몇 송이 놓여 노랗게 말랐다. 선들 가을바람이 부는지 감은 두 눈덩이쯤이 서늘해 왔다. 경계도 없고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치열함으로 한 생을 산 그의 흔적들. 그건 ‘저항으로 점철’된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도 헌신했던 ‘민주주의의 역사’였고, 월간 『사상계』로 시대를 선도한 ‘민족의 지성’이었다. 

 

 

 

파주출판단지에 있는 이가고서점의 대표가 장준하와 그가 발행한 『사상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 장준하가 발행했던 『사상』지와 월간 『사상계』 일부. 오른쪽 『사상계』지의 수난사를 다룬 <장준하문집>에 실린 장준하의 사진.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되어 법정에 선 모습이다.

 

 

특히 『사상계』를 통한 투쟁은 두드러졌다. 『사상계』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곧은 소리를 냈던 1950~60년대 반독재투쟁·민주화운동의 정론지다. 훗날 4.19혁명의 바탕이 된 것으로도 평가받을 만큼 깨어 있는, 이른바 지식인 사회의 구심체였다. 1958년 『사상계』의 주간이었던 안병욱 교수는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대항했다. 지성의 무기를 가지고 권력의 아성에 육박했다. 『사상계』에는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고, 비판의 언어가 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의 절규가 있었고 관권에 대결하는 민권의 필봉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왼쪽 잔디로 곱게 단장된 장준하공원은 봄, 여름, 가을 내내 조용한 휴식을 원하는 소풍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오른쪽 장준하공원에 있는 장준하 묘역. 봉분이 찬 돌베개로 되어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수구언론의 폭력이 극에 달한 때다. 다시 이 나라에도, 민주주의에 발을 디딘 한 줄의 글과 민주주의에 몸을 지탱한 한 마디의 말이 보이고 들리기를 소망해 본다. 말과 글은 언제나 칼과 총보다 선이다. 추모벽 뒤에 있는 그의 묘역도 찾았다. 그의 무덤은 다름 아닌 ‘돌베개’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벨지언정 못난 조상이 될 수 없다.”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돌베개 위로 초가을의 낮은 햇살이 비춰들었다. 살아서 벴던 돌베개를 죽어서도 베고 누운 그의 주검, 그건 절망이 아니라 차라리 희망이었다. 그를 바로 세워야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로 설 것이다. 

 


임진각 _ 오늘도 경계 없이 바람은 북으로 불고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여행객들의 글이 담겨 있는 조형물이다.

 

1972년 9월호 『씨의 소리』에서 장준하는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고 말했다. 아울러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도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라고도 썼다. 그에게 있어 통일은 그만큼 중요하고 또 간절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주검이 안치된 돌베개 앞으로는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우뚝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분단의 상징이자 평화통일의 염원이 깃든 곳. 죽어 누워서도 그가 통일을 그리는 듯 마음이 쓰였다. 그의 그런 마음을 품고 오르듯, 묘역과 이어진 ‘살래길(좀 더 정확하게는 능선길)’을 천천히 걸어 검단산 정상에 올랐다. 

 

 

 

 

 

검단산 정상에 서면 서울과 판문각을 잇는 자유로와 남과 북을 경계 지으며 흐르는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전망대를 비롯한 임진강과 자유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 그곳에서 마주한 임진강, 그 남과 북을 경계 지어 흐르는 물줄기가 유장하게 굽이쳤다. 1시간 30분 정도면 ‘산의 둘레(살래길)’를 걷거나 능선을 타고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으니, 누구든 파주에 가거든 부디 올라 보시라. 경계를 둔 땅에서 경계 없이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일이 장준하, 그를 바라보는 듯할 테니. 

 

 

 

 

왼쪽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달렸을 경의선 증기기관차가 6.25전쟁으로 폭격을 당한 채 멈춰 있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오른쪽 임진각 관광지에서는 6.25전쟁의 상흔을 만나볼 수 있다. 평화통일을 염원케 하는 자리다.


살래길과 함께 파주에서는 임진각 관광지도 빼놓지 말고 둘러볼 일이다. 군사분계선 7km 남쪽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인 임진각은 6.25전쟁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면 망원경을 통해 임진강 너머 비무장지대와 북한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 또 1953년 6.25전쟁 포로 1만2천여 명이 자유를 찾아 건너온 자유의 다리와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경의선 증기기관차(폭격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가 있고, 실향민들이 매년 명절 때 조상들께 배례하는 망배단과 함께 한반도 모양의 통일연못이 임진각을 중심으로 한 공원 내에 조성되어 있다. 자유의 다리 끝 철조망에는 ‘여기까지 50년’이라고 적힌 문구와 함께 ‘걸어서 백두산 가고 싶다’는 바람부터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실향민들의 애틋한 염원이 적혀있는 색색의 띠가 빽빽하게 걸려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가슴을 저릿하게 눌러오는 태생적 아픔이다. 

 

 

 

귀로 들어도 아름다운 평화누리공원의 풍경이 여행객을 절로 눈감게 한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임진각 주차장 동쪽에 있는 평화누리공원에서 한참을 머물러 보자. 지난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개최하면서 자연친화적으로 조성한 평화누리공원은 이국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4만 5000여 평 규모의 잔디공원이다. 안보관광지라는 무겁고 엄숙한 이미지의 임진각관광지를 편안하고 친숙한 마음으로 거닐 게 하는 휴식공간으로, 가족들의 소풍여행지나 연인들의 주말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카페 ‘안녕’ 뒤로 보이는 ‘바람의 언덕’(김언경 作)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대나무로 만든 거대한 사람 모양의 조형물인 ‘통일 부르기’와 어울려 독특한 풍광을 연출하는데, 이름처럼 바람이 머물며 흔적을 남기는 곳이다. 노랗고 빨갛고 파란 색색의 바람개비가 바람이 불 때마다 뱅그르르 돌며 내는…, 귀로 보아도 참 예쁜 풍경이다. 공원을 관리하고 있는 경기관광공사는 ‘통일 부르기’는 북쪽을 향해 통일과 평화를 강렬하고 안타깝게 부르는 작품이고, ‘바람의 언덕’은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바람의 특성을 살려 평화를 꿈꾸는 바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평화누리공원은 이들 두 작품으로 인해, 비 오는 날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부침개처럼 바람 부는 날 불쑥 찾아 거닐고 싶어지는 곳이다. 아이들과 함께 바람 많이 부는 가을날 이곳을 찾아 전통놀이 체험장에서 연을 날리며 통일을 염원해보는 것은 어떨지. 놀이하듯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그것이야말로 놀며 하는 살아있는 통일교육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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