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구의 도시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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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구의 도시를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빈민결의대회에 나와 격려의 말을 하는 제정구 

15년 전,  2월 9일, 도시빈민의 영원한 친구 제정구 의원이 55세라는 너무 아까운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반백의 머리와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던 제정구 의원은 민주화 운동가로서는 드물게 자신이 만든 ‘도시’를 남겼다. ‘도시’란 표현이 거창하다면 ‘마을’로 표현해도 좋다. 그 ‘도시’ 혹은 ‘마을’ 은 그의 고향도 아니었고, 자라난 곳도 아니었으며 육신이 묻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피와 땀이 가장 많이 베인 곳으로 당시는 경기도 시흥군, 지금은 경기도 시흥시 이다. 

경남 고성에 태어난 그는 명문 진주고를 졸업하였지만, 대학 입학이 순탄하지 않아 무려 4수 끝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치를 떨다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결국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청계천 빈민촌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이렇게 결심했다. 

“판자촌을 나 몰라라 하며 진리, 정의,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판자촌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겠다.”   

1975년 청계천 주민들과 함께 시도했던 집단이주 계획이 실패한 후, 1975년 11월, 영등포구 양평동으로 이주했는데, 이 때 평생의 동지가 되는 예수회 정일우 신부를 만난다. 미국인으로 본명이 존 데일리인 정일우 신부는 제정구의 친구이자 형제, 분신으로 살아간다. 이듬해 2월 부엌까지 합해도 채 5평이 될까 말까한 공간을 마을사랑방으로 만들어 ‘복음자리’라는 간판을 내걸 때 제정구에게 천군만마 같이 든든한 지원군이 도착했다.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복음자리’라는 이름도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지어주었는데 현판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복음자리’ 란 이름은 연음현상으로 ‘보금자리’ 란 뜻도 된다. 하지만 양평동 생활도 오래 계속될 수 없었다. 

1977년 4월, 집단이주를 희망하는 170세대와 함께 천주교와 독일해외지원단체의 도움으로 시흥군 신천리 과수원과 논밭에 새로운 ‘복음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정구는 사우나 같은 천막생활을 하면서 직접 벽돌을 찍고 벽을 바르고 지붕을 만들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주민들과 대화하며 공동체 정신을 다져나갔다. 훗날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삽질’ 솜씨가 완전히 프로였다. 그런 고생 끝에 6, 9, 12, 15 평 네 가지 평형 60호가 건설된 보금자리는 9월 24일 입주하게 되었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김수환 추기경의 미사와 함께 입주가 시작되었다. 제정구는 집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건설과정에서 돈이 필요했고 비싼 사채까지 손을 대야 했기에 ‘신용협동조합’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유신말기였기에 이를 통해 참된 민주주의를 체험하고 더불어 사는 정신을 신협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은 예금 규모가 500억으로 성장했지만 맞벌이 부부를 위한 수요일 저녁 개점, 이자율 억제 등 창립 정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복음자리 마을의 성공은 또 다른 집단이주의 모델이 됐다. 1979년에는 서울 당산동과 신림동, 시흥동, 봉천동 철거민 164가구가 복음자리 공동체 근처로 이주해 ‘한독마을’을 이루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과 학생 운동이 거의 압살당해 겨우 숨만 쉬고 있을 때,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일이 터졌다. 바로 2년 이상 계속된 목동 철거민 투쟁이었다. 이 이야기는 작년 11월에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 양천벌의 전쟁 : 30년 전, 목동 철거민 투쟁의 현장을 가다

목화 마을의 입주를 기다리는 천막촌 지역을 돌아보는 제정구

목동 철거민 중 대부분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고 입주권을 끝까지 거부하고 생활 터전을 요구하던 105세대는 복음자리와 한독마을 인근으로 이주해서 제정구의 영원한 벗 정일우 신부가 독일에 가서 얻은 지원금과 10%의 이자를 내는 정부의 ‘융자금’ 으로 목화 연립을 건설했다. 목화연립이란 ‘목’동 출신들이 잘 ‘화’합해서 살라는 의미라고 한다. 당시 민중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는 목화연립 세 개동은 35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 봐도 매우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다. ‘ㄷ’ 자 모형의 연립은 모든 세대가 외부 복도를 통해 다 연결되어 있고 야외극장으로도 활용 가능한 ‘중앙 광장’을 향해 문이 나 있다. 언뜻 보기에도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려 한 건축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건물 자체도 무척 튼튼해 못이 안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 현재도 65%가 초기 이주 세대와 2세대가 살고 있고 나머지는 그 후 새로 들어온 입주자들이다. 목화연립이 완공되고 주민들이 입주했는데 ‘데모꾼’들이란 이유로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강한 단결력과 생명력을 가진 이주민들은 이 곳에 뿌리내리는데 성공했다.

재개발, 재건축의 바람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한 목화연립

1985년에는 복음자리와 한독마을, 목화연립을 연결하는  ‘작은자리’ 회관이 문을 열었다.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반듯한 건물이 들어섰고, 제정구 선생의 흉상과 기념비도 서있다. 1986년 제정구와 정일우는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인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1988년, 양 김의 분열에 실망한 민주화 운동 세력은 한겨레 민주당을 창당하여, 제정구를 종로구에 내보냈으나 ‘물론’ 낙선하고 말았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이력도 평탄하지 않았다. 3당 합당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야권이 통합 민주당으로 통합되자 제정구도 1992년 14대 총선에서 시흥과 군포에 출마했다. 수많은 이들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가며 선거운동에 나섰고. 복음자리에서 자란 청년들이 운동원을 보호하고자 나섰다. 목화마을 사람들은 폐품을 모아 팔아 만든 돈을 10원 짜리 까지 모아 선거자금을 보탰다. 그는 거뜬히 당선되었고, 국회 건설위에서 맹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선 패배, 그에 따른 김대중의 정계은퇴와 복귀는 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고 결국, 1996년 재선에 성공했음에도 임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제정구의 자식들’은 국회의원으로, 자치단체장이 되어 현실정치 무대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제정구의 자식’이란 생전 제정구 의원실에서 근무했던 보좌진들을 말한다. 재선 시장인 김윤식 시흥시장은 제정구가 14대 국회의원 시절이던 1994년, 제 의원의 6급 비서였다. 이후 김윤식 시장은 경기도의회 의원(1995년)을 거쳐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시흥시장에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2007년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거친 뒤 2009년 4월 재선거에 시장에 도전해 당선되었다.

당시 7급 비서는 백원우 전 민주당 의원이었다. 백 전의원은 노무현 의원 비서관과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을 거쳐 시흥갑에서 17대와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8, 19대에 연속으로 당선된 재선의 조정식(경기 시흥을) 의원은 초선의원 제정구가 통합민주당 당무기획실장을 할 때 전문위원으로서 도왔던 참모출신이다. 조 의원은 지금도 “정신적 스승인 고(故) 제정구 의원의 죽음은 내 가슴의 반쪽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고 말한다.

제정구 당무기획실장 밑에서 부실장을 지내며 보좌했던 인물이 김부겸 전 국회의원이다. 김 전의원은 국회의원 3선 경력을, 14대 때 시흥과 더불어 제정구의 지역구이기도 했던 군포 지역에서 이뤘다.  김 전의원 역시 제정구를 `정치적 스승`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을 줄줄이 배출한 의원실은 거의 없다. 더구나 제정구의 국회의원 생활이 7년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정구의 자식들’은 지금도 도시빈민의 벗이었고, 상생의 정치를 외쳤던 ‘제정구의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는 게 ‘내가 정치하는 이유’라고 입을 모은다.

경제민주화와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가 넘쳐나는 지금, 이미 37년 전에 이를 시도해, 성공한 제정구!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의 상황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 그의 빈 자리가 더 커 보이는 현실이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신 분만 그리워할 수는 없는 일. 그 분의 성공과 실패를 잘 배우고 시대에 맞춰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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