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역사기념관

미술관, 현대 건축의 진정한 챔피언 3

미술관, 현대 건축의 진정한 챔피언 <3>
한국 사회가 그대로 담긴 한국의 뮤지엄들

 

글·구본준 bonbonhani.co.kr

뮤지엄은 인간의 본능이다

앞선 두 회에서 우리는 미술관과 박물관 모두를 일컫는 뮤지엄 건축이 왜 현대 건축의 총아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각광받는 건축물이 되었는지 살펴봤다. 이제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한 나라와 도시, 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뮤지엄 건축이 이렇게 각 나라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이 된 것은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그 이유를 굳이 사회문화적으로 따져볼 필요도 없다. 뮤지엄 건축은 인간의 본능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집이 마련되면 먹고 자는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가구와 가재도구를 마련한다. 그 다음은? 당연히 거실에 그림이라도 한 점 걸어놓고 싶고, 장식장이나 진열장 하나라도 놓고 싶어 한다. 엄청난 가보가 아니어도 하나하나 정성껏 모은 술병이나 예쁜 그릇이라도 진열하려는 것이다.



오죽 진열할게 없어 양주나 모으고 기성품인 그릇으로 마루를 꾸미느냐고 쉽게 폄하할 문제는 전혀 아니다. 그런 행위를 통해 집은 조금이라도 달라지고, 꾸미는 사람의 마음에는 위안과 자부심이 생긴다. 이런 속성은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모으고 보여주는 것을 통해 자긍심과 만족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루의 진열장이나 국립박물관이나 미술관이나 그 본질은 같다.
이런 인간 사회의 ‘진열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는 우리 주변만 둘러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커다란 대형 박물관은 드물어도 각 지자체들이 관광 명소나 중심지에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뮤지엄들을 짓고 있다. 인류 역사를 빛낸 엄청난 보물들은 없어도 자기 지역에 얽힌 작은 유물이나 이야기라도 기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예상 이상으로 많은 이런 크고 작은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뮤지엄들이 얼마나 각광받는지 실감할 수 있다. 21세기가 뮤지엄의 시대라는 큰 흐름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나라에서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뮤지엄 건축은 어떤 과정을 겪으며 자리잡아왔을까.
우리 미술관과 박물관들도 다른 모든 분야처럼 급변하는 시대를 따라잡기 위해 나름의 ‘압축 성장’ 과정을 겪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뮤지엄 건축들은 다른 어떤 건축 분야보다도 여러 시행착오와 시대적 인식과 지향, 제약에 따른 우여곡절을 함께 겪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뮤지엄 건축물들은 앞으로 우리 공공건축, 특히 기념관 건축이 어떻게 지어져야 할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담고 있다.

남의 손으로 이식된 왜곡된 뮤지엄 건축의 시작
한국의 뮤지엄 건축의 역사는 100년을 조금 넘겼다. 다른 모든 분야처럼 박물관이나 미술관 역시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화를 창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를 집어삼킨 일제가 일본을 빛내는 방편으로 조선의 문화를 활용하며 왜곡된 역사관까지 심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술수로 뮤지엄 건축은 시작했다.

우리 박물관의 시작이 조선을 접수한 일제가 조선 왕조를 격하한 이왕가박물관이었고, 미술관도 일제가 덕수궁 안에 지은 덕수궁 미술관에서 출발했던 것은 우리 뮤지엄 건축이 탄생부터 겪어야 했던 아픔이자 지금껏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숙명으로 남아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궐인 덕수궁 안에 지은 덕수궁 미술관은 바로 옆 석조전과 세트를 이루지만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출범을 기념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담기 위해 지은 석조전과는 달리 그 설립 취지와 출발부터 식민지의 비애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일제가 경복궁에 지은 총독부 미술관은 그 이름부터 더욱 슬픈 역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1935년 현상 공모해 지은 총독부 미술관은 궁궐 안에 들어서는 건물인만큼 주변 건물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기와지붕을 얹었지만 조선식이 아니라 일본식으로 지어졌다. 조선 특유의 지붕이 무거워 보인다는 이유로 총독부는 일본식 ‘제관양식’을 보여주는 가벼운 지붕을 얹었고, 기와도 시멘트 기와를 얹는 등 조선 건물과는 거리가 먼 일본풍 건물이었다. 지금은 경복궁에서 사라져 기록으로만 남게 됐다.

현대건축사의 오점이 된 박물관 건축의 뒷이야기
이제는 사라진 이 건물의 운명처럼 해방 이후에도 한국의 뮤지엄 건축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늘 비문화적이고 건축적으로도 조악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한국 건축사에서 뮤지엄 건축은 한국 현대건축이 겪어야 했던 몰이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르였다.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무지막지한 관료주의와 권위주의가 건축에 개입한 탓이었다.
그 대표적인 건물이 1960년대 지어진 국립종합박물관이다.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경복궁 안의 이 건물은 한국 건축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뒷이야기를 남겼다.
1966년 문화재관리국은 국립종합박물관 설계 경기를 벌이면서 특별한 조건을 내걸었다. “건물 자체가 어떤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함으로써 콤포지션 및 질감이 그대로 나타나게 할 것”이며 “여러 동이 조화된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음”이라고 처음부터 어떤 건물을 지어야할지 구체적으로 정했던 것이다.
이런 규정은 당시 건축계에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건축계는 물론이고 문화계와 언론에서까지 건축의 창의성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단순한 모방 디자인으로 전통을 왜곡 해석하게 한다는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특히 전통 건축물들을 모방해서 짜 맞춰 만들라는 조항은 비문화적이고 촌스러운 발상이란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군사정부는 자신들의 취향대로 밀어부쳤고, 규정은 그대로 적용됐다. 주요 건축가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화적 만행이라고 규탄하며 설계 공모를 보이콧했다. 결국 단 10여개의 설계안만 응모해 그 중 강봉진의 설계안이 당선됐다. 그 결과 지어진 건물은 한국 건축사의 중요한 건물들을 그대로 복제해 조립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결국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을 그대로 복사해 콘크리트로 크기만 훨씬 크게 부풀렸고, 아래 기단부는 불국사의 기단을 똑같이 베꼈다.
건축가로선 건축주가 제시한 기준을 그대로 따른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건축계 전체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굴욕과 코미디였다. 그래서 이 건물은 지금까지도 한국 건축계에선 비웃음과 수치로 남았다. 국립박물관인 만큼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당시의 분위기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심했다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건물은 지금도 그 외관만 유명 전통건축물을 베꼈을 뿐 관람객들과도 제대로 교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느 박물관과 다를 바 없는 내부 전시관만 둘러볼 수 있을 뿐, 기단 윗부분 넓은 외부공간은 관람객이 자유롭게 거닐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건물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건축물들을 베껴 조립한 ‘짬뽕’ 건물이란 사실조차 모른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한 채 박정희 시대에 지어진 가짜 한옥 건물의 하나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한옥 건물을 그대로 복제하는 콘크리트 건물을 지나치게 좋아해 이 건물을 비롯해 국립광주박물관 등 많은 공공건축물이 무늬만 한옥으로 지어졌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의미는 남았지만 미학적인 측면에선 하나 같이 아주 낮은 평가를 받는다.
70년대 지어진 국립 부여박물관(현 문화재연구소 건물)은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보다도 더 큰 논란을 불렀다.
당대 최고의 스타 건축가였던 김수근이 설계한 이 박물관은 왜색 시비에 휘말렸다. 박물관 정문은 일본 신사 입구를 상징하는 나무 문인 ‘도리이’를 닮았고, 건물 자체는 일본 신사 특유의 지붕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논란이었다. 격한 논쟁 끝에 다양한 전문가들로 ‘부여박물관건축심의위원회’가 만들어져 심의한 결과 이 건물이 일본 느낌을 풍기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 신사 형식은 아니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이 나왔다. 건축가 김수근도 지적의 상당부분을 받아들여 지붕에 기와를 얹고 디자인을 보완했지만 이 건물은 왜식 건물이란 평가를 결국 떨치지 못했다. 전통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수용하느냐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 의미가 있고, 서양식 디자인으로 지으면 옳고 일본식 디자인이 모티브가 되면 죄악이 되느냐는 점에서 과연 일방적인 매도가 가능하냐는 부분도 생각해볼 필요는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은 60년대란 시대 분위기상 용납되기 어려운 측면이 확실했고, 한국 현대 건축사에 왜색 시비를 불렀던 불명예스러운 건축물로 영원히 남게 됐다.
한국 뮤지엄 건축 중에 그나마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던 건물로는 1980년대 공공건축을 대표하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꼽을 수 있다.
재미건축가 김태수가 설계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과천 산기슭으로 자리가 정해진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말이 많았지만 건축물 자체는 지형 등 자연 조건과 조화를 잘 이루는 깔끔한 건물이란 평을 들었다. 비슷한 시기 지어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이 고위층의 갑작스런 주문으로 한국 전통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원래 설계가 대폭 바뀌어 갓과 부채 모양으로 바뀐 것과 비교되는 건물이기도 하다.
국가대표급 공공건축물로서 거의 처음으로 전통 이미지를 구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버린 것이 오히려 이례적일 정도였다.
비교적 괜찮다는 평을 들은 또 다른 건물로는 옛 대법원 건물을 리노베이션한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역사적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축해서 재활용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고, 국내에서도 이 건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소수의 예외를 빼면 나머지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거의 대부분 건축주인 정부와 지자체의 한계를 보여줬다. 원인은 한국적인 것, 전통 문화를 가장 표피적으로 해석해 형태로 재현, 구현하려는 관의 획일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또한 자기 임기 내에 대형 건축물을 반드시 완공하려는 토목적 사고도 늘 건물의 완성도를 깎아먹었다. 문제는 이런 두가지 사고방식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21세기인 지금 세계 건축이 뮤지엄 전성시대를 맞았어도 한국에선 세계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뮤지엄 건축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들어설 주요 뮤지엄들의 임무는 더욱 막중하다. 한국 건축사에서 특히 비문화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오점으로 얼룩져왔던 이전 미술관과 박물관들의 건축적, 미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의 진정한 랜드마크가 되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공공건축물로 기대를 모으며 서울 경복궁 옆 기무사 자리에 들어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분관과 자랑스러운 민주화의 역사를 기리고 알릴 민주화운동기념관은 특히 주목받아야할 건물들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지는 위상과 의미가 다른 어떤 뮤지엄들보다도 크고 중요한 이 두 건물들의 미래는 지금은 암울하고 안타까운 상황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분관의 경우 벌써부터 현 대통령의 임기 안에 지어야한다는 드라이브가 걸리고 있고, 민주화운동기념관은 언제 지어질지 결론조차 나고 있지 않다.

 

글 구본준 <한겨레> 대중문화 팀장, http://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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