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명장면] 광주 대단지 사건 "도시빈민의 비참한 삶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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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명장면] 광주 대단지 사건
도시빈민의 비참한 삶을 알리다

 

 

 

 

1960년대, 제3공화국이 추구해 온 공업화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고, 도시 변두리에는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1968년 당시 서울시장인 김현옥은 서울시내 무허가 판잣집 정리 사업의 일환으로 ‘광주 대단지 조성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 계획은 1970년까지 경기도 광주군의 약 200만 평의 땅에 50만 명의 도시빈민을 수용할 수 있는 신도시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1970년에 양택식 서울시장이 부임하면서 이 사업계획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이것은 소요 예산 대책도 수립하지 않은 채, 다음 해 선거를 의식하여 급조한 사업계획이었다.


1971년 선거에서의 공약세례는 많은 빈민들을 대단지로 유혹해 끌어들였고, 인구가 폭증했고 땅값도 폭등했다. 그러나 선거 이후 개발붐은 사그라졌고, 또 하나의 빈민촌만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시는 전매 행위를 막겠다는 명분 아래 불하된 토지를 기한 내에 구입하지 않으면 해약은 물론 법에 의해 6월 이하의 징역과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1971년 7월 17일 주민들은 ‘광주 대단지 토지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대표 박진하)를 조직하고 서울시와 경기도 당국에 수차 진정을 했다. 당국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주민들은 대표 217명을 선출한 뒤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의 날’로 택했다. 당일 오전 11시, 분노한 5만여 명의 군중들이 성남출장소 앞에 모여 항의했다. 이들은 오후 2시 서울시경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했으며, 관용차와 경찰차를 불태우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6시간 동안 사실상 광주 대단지를 장악하였다. 일부 시위대는 박정희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송파대로까지 진출하였다.

 


양 시장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오후 5시 주민들에게 “전매 입주자의 토지불하 가격은 원 철거이주자와 똑같은 조건으로 평당 최고 2천 원 선으로 낮춰주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였다. 주민들이 해산함으로써 소요는 진정되었고, 김성배 등 시위를 주도해 온 21명이 구속되었다.


광주 대단지 사건은 빈민들의 비참한 삶을 세상에 알렸다. 1971년 9월에는 도시선교위원회가 기독교 중요 교단의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초교파적 선교기구인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한편 이 사건은 1960년대 말부터 도시빈민층에 관심을 갖고 빈민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해오던 성직자들에 대한 당국의 탄압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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