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대담] 생태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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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대담] 생태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하여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사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유정길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매해 6·10민주항쟁 기념일이 되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씁니다. 이 글에서 죽어가는 생명에 대해 늘 이야길 했습니다. 인간 사회의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면서 전체 생명 사회의 민주주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긴박성을 호소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기념식 자리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은데, 지나고 나면 또 관심들이 없더군요. 생태계 파괴, 생명 문제 같은 것이 당면하면 막 끓어오르다가, 금방 잊히는 속성이 있습니다. 2010년 구제역으로 가축 천만 마리를 잃었지요. 얼마나 심각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이런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아요. 또 같은 해에 토종벌 97%가 절멸했어요. 정부는 76%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 해도 어쨌든 8할이에요. 절멸 전에는 토종벌 한 통이 7만 원 했는데 지금은 70만 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안 보입니다. 농림부에도 몇 차례 접촉해 봤지만 반응들이 미지근해요. 보통 위기가 아닙니다. 다른 생명체들이 죽으면 결국 사람은 자동적으로 죽게 되어 있어요. 모든 생명과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해야지요. 그래서 평소 이러한 생명의 위기에 대해 가장 많이 걱정하시고 실천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을 모셨습니다. 격식 가리지 마시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세요.

 

 

 

 

김종철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어야 환경 문제도 해결된다는 시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민주주의 가지고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정당정치, 소위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 가지고는 제가 생각해도 어려울 것 같아요. 4년마다 반복되는 선거가 정치인들의 가장 다급한 관심사다 보니, 환경 문제나 생태적 위기와 문명의 지속가능성 같은 장기적 문제를 선거 이슈화할 수 없는 것이죠.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녹색당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지난 선거에서 사실상 실패했고, 그 이전에 녹색당을 기획할 당시의 멤버들이 창당에 주저했던 이유도 이것입니다. 녹색당의 문제의식이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먹혀들 가능성이 있느냐는 물음에 회의적이었죠. 뭔가 극약처방이 없으면 어려워요. 결론적으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현재와 같은 대의제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 가지고 생태 위기, 지속 가능성의 위기를 올바르게 극복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정길     현재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유시장, 선거 제도로 국한되어 있지요. 첫째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철저히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있고, 두 번째로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의 문제도 있습니다. 먼저 민주주의의 오작동이 큰 문제입니다. 4~5년마다 선거로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서는, 그 중간에 주민들이 의사를 개진할 겨를이 없지 않습니까. 생태적 정의를 선거 제도가 보장하기는 힘들지요. 또 경제적 측면으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정책과 정치를 장악하는 측면이 있는데, 지금의 시장은 단기적 순이익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장기적 이해를 담보할 수 없어요. 지금의 민주주의는 ‘자연은 무한하다’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또 국가라는 틀 안에서 만들어졌고, 현세대에만 묶여있고, 인간에게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단절적 관계로 두고 발전해온 것이 바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충분하고 깊은 민주주의를 위해 오늘의 민주주의는 더 진화해야 합니다.

 

하승우     저는 요즘 주권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생태 문제는 이미 국가 주권 문제를 넘어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대처하는 방법들은 국가 주권에 묶여있습니다. 지역을 발전시킨다고 하면서 이전의 건물들을 밀어버리고 황당한 건물을 세우는 등의 일들이 지역에서는 종종 벌어집니다. 지역 주민들도 중앙정부의 일에는 이러쿵저러쿵하지만, 정작 본인이 사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지역의 문제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결국은 자기 삶에 가장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자기 삶의 핵심적인 과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후쿠시마 사태도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는 여전히 국가의 관점에서 판단합니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고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치부해 버리지요. 한 국가를 중심으로 한 주권 중심의 문화를 탈피해야 합니다.

 

김종철     주권 중심의 국가 개념으로 형성된 근대 국가가 본질적인 문제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쉽게 “자본주의가 문제이니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본 축적의 논리 때문에 약자가 유린되고 환경 파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순수한 자본주의란 건 존재하지 않아요. 항상 국가와 같이 갑니다. 국가는 주권국가로서의 자의식 때문에 더 힘이 강해지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고, 이 욕망이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표현됩니다. 국가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자본가와 손을 잡아요. 그리고 국가의 협조 없이는 시장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가 쉽게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의 논리는 식자들이 이미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우리가 새삼스레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극복해야 할 큰 장애물’이라는 인식은 확산이 되어 있어요. 그런 점에서 더 무서운 건 국가의 논리 같아요.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적어도 일본과 우리나라는 원자력과 관련해서 근본적인 정책의 변화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로아미타불이잖아요. 우리나라의 경우 이명박 정부 때 계획한 것보다 수는 조금 줄이지만, 여전히 원전을 증설하겠다는 입장이죠. 일본은 더 기가 막혀요. 국토의 대부분이 오염되어서, ‘장차 일본 땅에서는 어떤 사람이든 건강하게 살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일본의 정치 엘리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극단적인 경우가, 도쿄 도지사였던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예요.

 


최근에 그 사람이 『신타락론』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에서 후쿠시마 사태는 일본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결과라고 말했어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생활 태도가 만연하여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제 원자력 발전을 그만두자는 논리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에요. 신타로는 그렇다고 원자력을 그만두자고 하는 건 바보 같은 히스테릭한 논리라며, 이럴 때일수록 강한 국가가 되어야 하고, 그러자면 ‘핵국가’로 가야한다는 겁니다. 핵무장 국가가 되어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미국 문화로부터 벗어나서 정신적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결국 극단적인 극우의 논리, 국가주의적 논리죠. 이런 논리가 우리 눈에는 생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국가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논리일지 몰라요. 극단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시하라 신타로라는 사람 특정 개인의 정서라기보다,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 전체의 소위 엘리트들의 일반적인 의식이 아닐까 싶어요. 이러한 논리에 사로잡히면 정통적인 좌파의 의제인 사회적인 공정성, 평등,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엄중한 문명사적 위기를 해결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들도 생태적 위기 현상을 모르는 건 아니고, 입만 열면 자연과 생태를 이야기는 합니다. 그런데 극복 방안이란 게 결국 녹색 자본주의 혹은 녹색 소비주의입니다. 그건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말도 안 되는 논리지요. 기술이 녹색화되면 될수록 자원 소비의 총량은 더 많아지고 그만큼 더 환경 파괴적이라는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유정길     과거 진보라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생태 관점에서 바라보면 크게 두 가지 사고의 한계를 가집니다. 하나는 국가주의입니다. 국가 안에서 민주주의나 변화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장주의입니다. 과거 진보만 해도 국가 단위의 사고에 갇혀 있었고 생산력주의, 성장주의를 신봉해 왔기 때문에, 생태 문제와 생태 위기에 있어서는 보수와 동일한 원인 제공자라고 볼 수도 있는 거죠.
지구 온난화 문제는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 세계 20%의 잘 사는 나라들이 화석연료를 사용한 것 때문에, 피해는 전 세계인들이 다 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최근 우리나라에도 중국에서 넘어온 미세먼지나 황사 문제가 심각하지요. 이러한 환경적 피해 문제를, 지금처럼 의사결정의 단위가 국가인 상황에서는 해결하기가 힘듭니다. 전 지구적 거버넌스라는 말은 있었지만 UN 기구가 그런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UN이나 몇몇 국가들의 양심이라든가, 자발적인 노력에 기대하는 일은 요원합니다. 국제회의에서 지구 온난화 같은 전 지구적 환경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는 다 동의하면서, 정작 자기 국가로 가져가게 되면 경제가 항상 1순위이고 환경 문제는 언제나 2순위로 밀립니다. 지금 현재의 국가 시스템, 민주주의로는 위기에 처한 생태 문제의 근본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더 깊은 민주주의의 다른 정치 구조가 필요합니다.
최근 우리사회는 생태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일반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한계가 있긴 하지만, 지금 유지되는 자유 민주주의 내에서라도 생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지는 많습니다. 주민 참여로 의사를 반영하고, 주민 발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직접 민주주의 등은 분명 생태 민주주의를 위한 훌륭한 장치들입니다. 이 장치들이 더욱 널리 확산되고 심화되어야 합니다. 부안 방폐장 주민투표에서 나타난 것처럼, 선거 기간이 아니어도 주민의 의사를 수렴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도 일반화될 필요가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더 심화되고 넓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김종철     요새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의 시스템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진 덕분이죠. 지금 미국에서는 여론조사 방법도 이런 숙의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한 곳이 더러 있다죠. ‘Deliberative polls’(공론 조사)라는 방식인데요, 이 방식에서는 제비뽑기로 선택된 시민들에게 미리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가를 조사한다고 합니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즉흥적으로 피상적인 여론조사를 하는 지금 우리와 같은 시스템은 사실 난센스죠. 숙의 민주주의적인 방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예전에는 인간중심주의라는 말도 많이 썼습니다만, 지금은 좀 생각이 다릅니다. 지나치게 현세대의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철학과 사상이 문제이죠. 미국 뉴욕 북부와 캐나다 온타리오 남부 지역에 걸쳐 살아온 인디언 부족 이로쿼이족(族)은 마르크스가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루이스 모건의 『고대사회』의 모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부족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는 늘 그 결정으로 7대 후손이 어떻게 될지를 먼저 고려하면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기적으로 자기 생애 동안만의 삶을 생각하는 것이나, 장기적으로 후손들까지 생각하는 것이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다 인간중심주의이죠. 7대면 거의 2백 년이 되는데, 2백 년 앞을 내다본다는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장기적 생존 기반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보다는, 장기적 생존 기반을 파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지금 우리 삶을 생각하고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아요.
인간이란 존재는 여타 생명체와 다를 게 없다는 입장에서 인간중심적 관점을 가장 래디컬하게 부정하는 심층 생태주의(Deep ecology)는 그 철학에 공감하는 동지들이나 동호인들에게는 어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성을 가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심층 생태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예를 들어 개미와 인간은 동등한 존재인 이상, 개미의 운명에 대해서 인간이 윤리적인 책임을 져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따위의 논쟁을 하게 되는데, 사실 그런 논쟁은 그저 추상적인 논쟁일 뿐 실질적으로 쓸모있는 논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소모적인 토론보다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장기적으로 생존하자면 생물권을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이라도 투철하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쿼이 부족처럼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포괄적으로, 심층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경우만 봐도 중요한 결정이라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또 한국인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기득권 위주, 강자들 위주, 거기다가 남성 위주의 단기적 정책 결정입니다. 그럴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인 약자의 이해관계를 배제하지 말고, 인간 생존의 자연적 토대도 깊이 고려하면서 포괄적인 민주주의(inclusive democracy)를 하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심화’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다, 사회 민주주의다 구분해서 결론도 나지 않는 소모적인 논쟁에 휩싸일 필요가 없어요.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민주주의를 보다 밀도 높은 것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보면 결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관계로 살 수 있는 사회가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는 생태적 사회이기도 한 거죠.
그런데 그런 민주주의 사회는 단지 이상적인 구상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 정도는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현실적으로 시도되고 있고 혹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실현되어 있습니다. 가령 숙의 민주주의를 훌륭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훌륭한 예가 있습니다. 이런 예를 우리도 받아들여서 실천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덴마크의 ‘시민합의회의’라는 제도입니다. 덴마크는 1980년대부터 이 제도를 실시해왔습니다. 원래 미국에 있던 제도였는데 덴마크가 들여와 자기나름으로 완성시킨 거죠. 계기는 197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오일쇼크를 경험했는데, 그 때문에 원자력발전소를 건립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 일어난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논쟁이 격렬해지고 국론이 양분되었습니다. 결국 원전은 짓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러나 논쟁이 격렬해져 그에 따른 후유증을 겪고는 이 경험을 살려서 보다 좋은 합리적인 제도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시민합의회의입니다. 과학 기술에 관련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 시민들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수렴하는 제도로 정착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 식품 도입 여부나 줄기세포 연구 허용 여부와 같은 이슈가 제기되면 이 회의를 열기 위해서 국회에 설립된 기술위원회라는 데서 전국적으로 시민들에게 알립니다. 이 회의에 자발적으로 참가할 의사가 있는 사람은 신청을 하라고 공고를 냅니다. 그런 뒤 신청을 받아서, 특정한 기준에 따라 심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20명 정도 정해진 수의 참가자를 제비뽑기로 뽑습니다. 이 제비뽑기라는 것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에요. 특정계층이나 그룹을 소외시키지 않고, 국민들의 일반적인 의사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이렇게 뽑힌 사람들은 변호사, 의사, 교수뿐 아니라 환경미화원, 택시운전사 등 그야말로 사회 전체를 골고루 대변하는 다양한 신분의 시민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지적 수준이나 교육 배경도 다릅니다. 그러나 주말마다 몇 달 동안 모여 관련된 자료를 충분히 검토하고, 찬반 전문가들을 초청해 그들로부터 온갖 정보를 듣고 충분히 숙지한 다음에 최종적으로는 국회에 집결해서 텔레비전 생중계로 최종토론을 합니다. 그 자리에서 다수결 투표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개는 합의를 본다고 합니다. 합의를 본다는 이야기가 참 재미나고, 그렇게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식적이고 건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한 정보를 숙지하게 되면 대개는 엉터리 판단을 하지 않거든요. 뭔가 이권·이해관계가 걸려있으면 다르겠지만요. 이 회의 결과가 법적 구속력이 있는 건 아니고, 국가 정책이 되려면 의회에서 결정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안건을 시민합의회의 결과대로 의회가 다 받아들였다고 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덴마크 사회 전체의 심층적 여론을 실질적으로 대변하는 시민들의 숙고된 판단에 의해 합의된 사항이니까 이것을 정치가들이 뒤집을 수는 없죠. 이런 것을 보면 덴마크가 우리보다 훨씬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예를 들어 무상급식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논쟁을 무작정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적대 진영으로 나뉘어 싸움을 할 게 아니라 이런 제도를 도입해서 운용해야 하는 거죠. 국회에서는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합리적으로 결정 못 하는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민주주의가 심화되는 거고요. 물론 국민적 이기주의라는 것도 있기 때문에 환경위기랄지 그런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문제의 상당 부분은 해소되지 않을까 합니다.

 

정성헌     비슷한 생각에 작년에 6·10민주항쟁 25주년을 맞아서 기념식만 하고 말 게 아니라 전 국민적인 행사를 해보자는 생각에 ‘대한민국 민회’라는 것을 발족시켰어요. 방금 김 선생님이 말씀하신 취지를 잘 도입해서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였지요. 당시 국회는 총선이 끝나고 밀고 당기고 정쟁하느라 개원도 안 했던 시점이에요. 편의상 50명은 전국 단위, 50명은 비례로 해서 1백 명을 선정했어요. 보수, 진보, 녹색, 중도 등 골고루 뽑았지요. 그때 녹색쪽 분들이 제일 좋아했어요. 의회에서 4분의 1을 차지해 본 적이 없었잖아요.(웃음) 우선은 인터넷으로 많이 대화를 하고, 모여서 1박 2일간 토론을 하고, 그 이후에도 논의를 심화시켜보자고 해서 지금도 계속 모임을 이어가요. 얼마 전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DMZ세계평화공원 제안을 해서, 그 문제를 다루느라 다섯 차례 정도 모였어요.

 


김종철 선생님 말씀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물론 민회가 덴마크의 사례처럼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러지는 못했지만, 자꾸만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양한 의견과 시각이 상당히 근접이 되고 합의가 될 수 있더군요. 상당히 좋은 이야기들이 나오더란 말입니다.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제대로 안 되는 지금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생명문제가 많이 진척될 것 같긴 합니다.
또 현장에서 본 것 중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 수십 년 째 고민하고 있는 문제인데 갈수록 나빠져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이건 아닌 자이건 전부 돈독들이 올라 있다는 겁니다. 저는 건전한 상식이란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교육이 엉터리여서 정말 기본적인 대화가 잘 안 돼요.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면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DMZ평화생명동산이 위치한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 68억 원을 들여 체육공원을 조성한다고 공청회가 열렸어요. 다른 읍·면이 다 하니까 서화면 만 안 할 수는 없다고, 십수 년 전에 결정이 된 것인데 형식상 공청회를 연 거죠.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깊게 한 주민이 “15년 전에는 필요했는데 지금은 안 필요하다, 오히려 토종종자 채종포를 세우자.”고 제법 좋은 의견을 내놓아도 먹히지가 않아요. 선출직이나 공무원들은 국비가 내려오는데 집행을 안 하면 패널티를 먹기 때문에 ‘먼저 결정된 것을 왜 당신이 뒤집어엎냐’고 말해요. 이건 석탄 캐러 들어갔다 옆을 보니 금이 있는데도 안 캔다는 거잖아요. 여기에 토목 등 지역 사업자들의 이해관계 같은 문제 서너 개가 얽히면 옴짝달싹 못하는 거예요.

 

김종철     그것도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 관료주의의 문제네요.

 

하승우     경기도 수원시는 시민배심원제를 조례로 제정해 운영하고 있죠. 아까 이야기 나온 덴마크 시민합의회의 같은 경우는 합의하기 전에 찬반양론을 충분히 듣고 결정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문제가 뭐냐, 이미 결정이 난 상태에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민배심원제를 쓴다는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제도들은 시민들이 충분히 토론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인데, 우리는 이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라진 상태에서 논의를 하는 것이지요. 최근 열린 에너지기본계획 공청회도 마찬가지예요. 공청회라는 것이 원래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목적인데 우리는 반대하는 사람은 다 빼고, 찬성하는 사람만 모아놓고 합니다. 법에 따라 공청회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만 급급한 거예요. 이렇게 제도 자체가 부재한 것이 아니라, 제도는 이미 있지만 운영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경우들이지요. 대중이 정치에 냉소적이게 되는 이유도 ‘해봤는데 안 되더라’ 하는 것을 자꾸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김종철      ‘민주주의’라는 용어의 남용이고 오용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피로감을 느끼고 있어요. 택시를 타보면 택시운전사들 중에 ‘우리나라는 독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꽤 있어요. 민주주의에 대해서 대중들이 신용을 안 하는 겁니다. 민주정권 10년 동안에 실질적으로 자기 생활이 나아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민주주의를 심화시키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고, 현재의 위기 국면을 타개할 수가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국민들에게 신용을 얻으려면 시스템을 전환하거나 대폭 보강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시스템에서 재미를 보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이 변화에 대해서 찬성을 하겠느냐는 말이지요.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스위스 같은 경우는 국회에서 법률이 통과되더라도 5만 명의 서명을 받으면 재심을 요청할 수 있고, 국가는 재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시민 10만 명 이상의 서명을 얻으면 새로운 법률 제정에 대한 시민발의도 가능하고, 국민소환제도 있고요. 대의 민주주의의 결함을 보완하는 장치들이 되어 있지요. 스위스에서는 지난 10월에 보도도 되었지만, 기본소득에 관한 사항도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죠. 기본소득은 앞으로 꼭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스위스 같은 직접 민주주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국가적인 의제로 삼기 힘든 문제죠. 자본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것은 경제성장의 원리인데, 기본소득은 경제성장을 더 하자는 것도 아니고 삶의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프로그램이니까요.
잠깐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지난 수십 년 동안처럼 계속 고용이 창출되고 경제가 성장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하면 직장 없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질 텐데, 기본소득 제도가 부분적으로라도 도입되지 않으면 굉장히 심각한 상황에 빠질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지금과 같이 끊임없이 분열을 초래하고, 적대적인 대립과 갈등을 낳는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제도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회의적입니다. 그러니까 꼭 선후 문제는 아닙니다만, 먼저 우리나라의 정당 민주주의 시스템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례대표제를 확대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요. 좌파 우파로 나뉘어 집권을 위해서 무한투쟁을 계속하는 지금과 같은 양당정치는 수명이 다한 게 아닌가 싶어요. 이대로 갔다가는 공멸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정치 시스템은 결국 화석연료에 기반을 둡니다.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석탄이라는 에너지가 없으면 불가능했던 것이고, 석탄과 석유라는 강력한 에너지원 때문에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지요. 통계를 보니 1900년대 초반에 비해서 2010년대에 와서 세계의 자원 소비량이 8배가 늘었더라고요. 경제 규모가 엄청나게 증가한 거죠. 그런데 경제성장이 계속됨으로써 조세는 늘었는데, 이를 어떻게 분배하느냐 하는 방법을 둘러싼 싸움이 바로 좌파 우파 정당의 싸움이잖아요. 간단히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여 서민들 위주로 재분배를 할 거냐, 아니면 경제성장을 밀고 나가서 나중에 트리클 다운 효과, 즉 낙수효과를 기대할 거냐라는 싸움으로 요약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이 싸움이라는 것이 경제성장이 멈추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좌파 우파로 나뉜 정당 시스템을 지탱해온 핵심적인 동력도 따지고 보면 석탄, 석유라는 화석연료 덕분이라는 거죠. 원자력도 석탄이나 석유 없이는 건설도 못하고 유지할 수도 없으니까 엄밀하게는 화석연료 시스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은 세계적 금융위기로 대변되는 준공황 상태가 계속되고 있고, 전반적으로 세계가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화석연료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존 정치 시스템이 인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상황이 지금의 혼란이 아닌가 싶어요.
에너지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2011년에 출판된 미국 컬럼비아대학 역사학자 티모시 미첼 교수가 쓴 『탄소 민주주의(Carbon Democracy)』라는 책입니다. 산업혁명 초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사회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던 에너지원이 석탄인데, 그 산업사회 시기에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고, 그 노동운동의 요구를 지배 엘리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인권이 개선됐고, 복지 시스템이 형성되고 완성됐고, 투표권이 확장됐다는 거예요. 지배층이 왜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느냐 하면, 석탄이라는 에너지원이 가지고 있는 생산 방식이 노동자의 작업 강도가 높고, 대규모 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미첼 교수는 해석합니다. 광부들이 막장에 들어가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석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광부로 대변되는 노동 세력의 요구에 지배 세력이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산업사회의 불가결한 핵심 노동력이 광산 노동자이고, 광산 노조란 것이죠. 소위 ‘철의 여인’이라고 불린 영국의 대처 수상이 강경하게 광산노조를 탄압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을 사실상 죽여버리고,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던 것은 80년대 초예요. 그게 가능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대처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기보다 이미 석탄의 중요성이 떨어지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석유 시대가 되면서 핵심적 에너지원을 다루는 노동자들의 존립과  존재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거죠. 석유라는 것은 산업국가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중동 국가에 있어요. 유조선으로 먼 거리에서 수송을 해야 하니까 이제는 군대가 필요한 거지, 예전 석탄 시대처럼 대규모로 집중화된 노동력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더 이상 노동자들이 핵심적 에너지 시스템을 장악하지 못하게 된 거죠. 또 노동자의 지위 하락에는 냉전시대의 종결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어요. 냉전시대에는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건재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양보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석탄 시대에 확보되었던 민주주의적 권리나 인권, 사회보장 시스템이 제한적이지만 유지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게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크게 훼손됩니다.
티모시 미첼 교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석유를 산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1860년부터 2010년까지 인류가 소비한 석유량이 2조 배럴이랍니다. 이 중에서 1860년에서 1990년까지 130년 동안 쓴 게 1조 배럴이고, 나머지 1조 배럴을 소비하는 데 20년밖에 안 걸렸어요.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낸 보고서도 2006년에 ‘피크 오일’이 지나갔다고 기록했고, 미국의 석유화학기업 ‘엑슨모빌’에서 2013년 초에 낸 ‘세계에너지전망’이라는 리포트도 피크 오일이 지나갔다고 분석했어요. 석유 소비가 이 추세로 간다면, 현재 매장량이 상당히 남았다 하더라도 고갈되는 데 몇 년 안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결국 석유 문명과 탄소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정치 시스템도 달라지고, 민주주의의 형태도 달라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동안 한국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석유에 의존해 왔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안 하고 있어요. 잘못하면 곧 한국사회 전체가 연옥(煉獄)으로 변할 가능성이 큰데도 말입니다.
최근에 『백년의 급진』이라는 중국 지식인이 쓴 책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저자는 원톄쥔이라는 분인데요, 중국에서 ‘삼농 문제’(농촌, 농업, 농민)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으로, ‘인민대학’ 교수인데, 그 대학의 농업 및 농촌발전대학 학장이기도 합니다. 이 분의 기본적인 시각은, 중국은 근본적으로 소농사회인데 이 기본 성격을 망각하고 서구식의 대규모 산업주의 경제를 확대하자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입니다. 미국, 호주 등 현재 세계적으로 농업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들은 원래 서구인들이 약탈한 광대한 식민지입니다. 그 광대한 땅에서 생겨난 시스템이 대농 위주의 농업시스템이죠. 이러한 농업을 동아시아 사회가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서구 세계는 공업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부작용을 대개 외부로 전가했고, 그 외부란 식민지였습니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공업화에 따른 부작용과 비용은 식민지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농촌과 농민들에게 돌아갑니다. 이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지요. 반드시 한계에 봉착한다는 거죠. 중국의 15억 인구가 농업을 떠나서 도시로 이주해서 산다고 했을 때 일자리가 나올 리 만무하죠. 그 많은 인구를 흡수할 수 있는 곳도 결국은 소농이 중심이 된 농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자명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명한 진실을 잊고 살고 있잖아요.
원톄쥔은 북한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요. 보통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대규모 기아 사태가 일어난 것은 농업 시스템을 집단농장화한 사회주의 시스템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원톄쥔은 오히려 북한 농업이 지나치게 현대화해서 비참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북한은 1970년대 이후 도농 간 비율이 7:3으로 역전됐고, 당시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공업화된 사회가 되었어요. 농업도 기계화, 화학화된 소위 현대 농업이 되었죠. 그게 바로 문제였다는 겁니다. 현대화된 농업이란 거의 전적으로 석유에 의존하는 농업입니다. 1990년 이후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소련에서 값싸게 들어오던 석유가 떨어지자 속수무책으로 북한 농업은 붕괴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물론 북의 경우와는 다르겠지만, 남한도 이렇게 가다가는 큰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지요. 조만간 석유가 떨어진다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니까요. 완전히 고갈이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와 같이 값싸고 풍부하게 석유가 공급되던 상황은 조만간 종식될 것이 확실합니다. 지금 미국이 앞으로 100년은 쓸 수 있는 셰일유(油)가 있다고 해서 난폭하게 개발을 하고 있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미국이 셰일 석유 개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큰일이죠. 화석연료를 맘대로 태우다가는 기후변화 때문에 인류 사회 전체가 무너집니다. 미국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셰일 석유 채굴은 채굴 방식 자체가 어마어마한 환경 파괴와 오염 문제를 일으키고, 엄청난 물 낭비를 초래합니다. 지금도 미국 곳곳에서 이 문제 때문에 주민들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어서 사회적으로도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만약 한국 사회가 미국의 이 새로운 석유 전략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간다면 결국은 파국 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정길     그래서 오늘 우리에겐 탈근대화가 새로운 과제입니다. 그야말로 전환기입니다. 또한 중국이 미국식 근대화를 따라간다면 이것이 인류 재앙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남북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 문제를 국민국가 차원으로 한정해서 바라봐서 문제입니다. 통일 문제를 생태적 안목과 전환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풀뿌리 자치, 직접 민주주의, 분권화, 연방 개념을 고려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근대를 벗어나기 위한 전환의 명확한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통일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관점이 나오기 힘들고, 민주주의에 대한 심화된 논의가 나오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과거의 민주주의를 그냥 기념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치와 내용, 이념을 창출해야 합니다.

 

 

정성헌     네, 화석연료 시대가 끝났다는 전제하에 삼농 문제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김종철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려고 하면,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하지요.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취임을 축하하러 와서 당시 ‘말’지 기자와 인터뷰를 했어요. 그때 “IMF 돈 받아라, 그러나 빨리 갚기 위해 노력할 필요 하나도 없다, 빚을 갚기 위해 서민들 허리 졸라매는 정책을 펴지 말고, 그 돈 가지고 대기업 살리려고도 하지 말고, 에너지 자립과 한국의 농업 기반을 확충하는 사업을 벌여라”라고 했어요. 요한 갈퉁이 누굽니까. 단순한 평화학자가 아니고 이 시대의 현인이잖아요.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이야기했던 것이 실제로 옳았고,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한국이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제일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 에너지 자립과 농업 재생입니다. 왜냐하면 탄소시대가 곧 끝나니까요.
결국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에서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시급히 전환해야 하는 거죠.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화석연료처럼 막대한 에너지를 낼 수가 없으니, 생활도 경제도 축소될 수밖에 없어요.  또 경제가 일직선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을 순환시키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순환적 경제는 결국은 농업 중심 경제입니다. 농업이 근본일 수밖에 없어요. 에너지도 중앙집중적 시스템이 아니라 지역, 마을, 개별 가정이 주체가 되어 자립적 에너지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에너지 시스템이 분산적으로 되면 실질적으로 권력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어요. 사실 우리가 에너지 때문에 중앙집권적 국가에 의존하는 것 아닙니까. 에너지를 지역공동체나 마을 중심으로 자립하면 그야말로 진짜 실질적으로 분권적인 민주주의 사회가 되는 거죠.

 

정성헌     말씀하신 대로 지속가능한 순환사회의 가장 기본은 농(農)입니다. 농촌 연령이 높아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노른자위 땅의 임자는 다 도시사람이다, 이처럼 모두가 아는 문제 말고, 제가 직접 목격한 제일 당면한 문제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전체 국민들의 지출이 늘었기 때문에 농민도 소득을 올려야 하는 현실입니다. 벼농사를 하면 평당 2500원의 수입이 나오는데, 옥수수는 4500원, 인삼은 2만 원이고, 시설로 파프리카 같은 것을 키우면 20만 원이 넘는 수익도 올려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기농업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곡식 농업을 안 하려고 해요. 그런 데다가 농토가 너무 줄어버렸어요. 1970년대에는 농토가 국토 면적의 23%였는데 지금은 18%에 불과합니다. 제가 사는 강원도 인제는 논 면적과 길 면적이 백만 평밖에 차이가 안 납니다. 지금 준공 중인 동서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아예 같아집니다. 또 땅이 아주 나빠졌어요. 물론 농가가 줄었으니, 농가 호당 평균면적은 늘었지만요. 곡식 농사를 지어봤자 돈은 안 되고, 땅은 쪼그라드니 기본적으로 (농촌사회가)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또 하나, 사회적 문제로는 농촌 내에서도 양극화 문제가 극심해요. 시설농업으로 정책자금을 많이 받으면 억대 이상을 버는데, 그렇지 않은 소농들 중에는 농업으로 버는 수입이 1천만 원이 안 되는 사람이 70%예요. 그럼 못사는 거예요. 그나마  요새 귀농 귀촌이 일어나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이것은 새 발의 피죠. 귀농 귀촌 인구가 3만 5천 정도라는데, 제가 보기에는 100만 명 이상 들어가야 좀 제대로 돌아갈 겁니다. 가까운 몇 년 사이에 계획을 세워 유효하게 진행하지 않으면 임계점을 넘어설 것 같아요.

 

김종철     그래서 지난번 총선에서 녹색당이 농민기본소득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잖아요. 군인도 월급을 주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농민에게도 월급을 줘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자연히 농촌공동체, 지역 경제도 살아납니다.

 

하승우     그래서 지역주권 문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말만 지방자치제도이지 사업은 다 위에서 결정하고 지방정부는 실행하는 역할만 하고 있어요. 지자체가 매칭펀드로 국세를 받아야 하니 예산만 뻥튀기하는 형태입니다. 성장 전략이 아니라, 실제로 지역 자체에서 지역 내 산업들이 뿌리내리고 살 수 있는 지역사회 전략이 필요해요. 한국 민주주의 체계는 전형적인 서구사회 도시형이지, 농촌은 전혀 반영하지 않은 민주주의 시스템이잖아요. 적정기술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지역에 맞게끔 ‘적정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형태로 구조가 설계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국가 단위에서 민주주의를 다 획일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어요. 주민참여예산제도도 마찬가지로 안전행정부에서 지역으로 내리는 방식입니다. 도시형 모델을 생활 패턴도 다르고 동선도 다른 농촌 지역 주민들에게 똑같이 적용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시민의식이 낮아 제대로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지 않은 민주주의 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제도 설계도 지역에서 스스로 해야 합니다.

 


국가 단위의 민주주의에서 지역 단위의 민주주의로의 전환에서, 제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바로 협동조합입니다. 최근에 한살림의 초기 문헌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한살림이 처음 만들어질 때의 구호가 아직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호한다.”는 겁니다. 이 구호는 다른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구호입니다. 생산과 소비가 연계되어서, 우리에게 적정한 삶의 규모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중요한 전환에 있어서 핵심적 매개가 될 것입니다. 물론 가장 규모가 큰 생협들이 정말 제대로 전환을 목표로 가고 있는가는 검토해야 하겠지만요.
어쨌든 지역사회 주권을 강화해야 합니다. 농촌의 도시화 전략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농촌이 지속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도시 사람들이 이를 지지해야 하는데 단절되어서 논의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나씩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어 왔거나, 다수이지만 약자인 사람들이 힘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종철     다수결이 민주주의가 아니죠. 민중 권력이 민주주의죠.
말씀하셨듯이 농촌 문제가 제일 심각합니다. 농민 인구가 적어서 선거에 아무 영향도 못 미치니까 정치판에서도 농민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농촌 지역구 국회의원들도 공천권자 눈치만 보지 지역민의 이해관계는 전혀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아요. 지방분권화된 민주주의 시스템이 실현되는 것은, 농촌이 사느냐 죽느냐에 달려 있어요. 농촌이 살면 수도권 과밀 현상도 해결될 수 있고, 굳이 서울의 대학 가려고 사교육에 돈 쓰고 고통받고 할 일이 없을 테니 교육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될 거라고 봅니다. 농민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는 내놨지만 1%도 지지를 받지 못한 녹색당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시민운동에서 의제를 삼고, 언론들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소위 진보 언론조차 농촌 문제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농촌 전문 기자도 없는 게 지금 우리나라 현실입니다.

 
유정길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민주주의가 더 확대 심화 발전되어야 한다, 국가 안에서 지역주권을 심화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착취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입니다. 소수의 국가가 다수의 많은 사람이 써야 할 자원을 착취하는 거지요. 20%밖에 안 되는 국가들이 화석연료 83%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뒤집어보면 80%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17%의 자원을 가지고 쪼개어 쓰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가난한 나라의 그 가난 덕분에 위기의 시간을 지연해주고 있어, 잘사는 나라의 풍요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현재는 소수의 나라 사람들이 다수가 써야 할 자원을 빼앗아 쓰고 있는 것이며, 또한 미래 세대가 쓸 자원을 빼앗아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은 인간과 자연을 단절시켜 놓고 인간들만의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환경 문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를 넘어서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의사결정이 국가 단위에서만 결정되는 방식으로는 전 지구적인 위기를 해결할 수 없어요. 시간적으로는 현세대 주의에 갇혀 있어서 미래세대의 의사까지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새만금의 미래세대 소송, 천성산 도롱뇽 소송은 모두 기각되었습니다. 우리 재판부는 미래세대나 도롱뇽이 원고가 될 수 없다고 판결을 냈어요. 그러나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유사한 사례가 많아지고 있거든요. 자연권이나 미래세대의 권리에 대한 문제가 지금은 작지만, 앞으로 커질 이슈들이라고 봅니다. 문명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이런 사례가 많아질 것이고, 임계치를 넘어서면 사회, 행정, 법적 체계에서 그러한 문제의식들이 수용되는 사회가 온다고 봅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전환,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서서 준비하고 논의를 해야겠습니다.

 

정성헌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이야기들은 이제 어느 정도 짚어주셨습니다. 가장 시급한 것이 교육, 언론, 종교의 역할입니다.

 

김종철     종교계는 많이 달라졌어요. 20여 년 전 『녹색평론』 시작할 때를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종교인들은 일상적인 하루하루의 이해관계로부터는 초월한 분들이니까 본질적인 것, 즉 생명의 위기에 민감한 것 같아요. 전통적으로 종교에서는 생명이 핵심적 화두이기도 했고요.
지금 동북아시아 정세를 보세요. 엉뚱하게 역사가 퇴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투기가 날고 군함이 대치하고…. 지금 세계가 문명사적 위기에 처해서 벼랑 끝에 있는데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습니까. 낡은 국가의 논리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동안은, 예견할 수 있는 미래까지는 이런 국가의 틀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완전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더라도 보다 더 민주적인 사회로 가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모델이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엄중한 국제 경쟁 질서 시스템 속에서도 자연의 권리를 헌법에 명문화한 에콰도르나 볼리비아의 사례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 두 라틴아메리카 국가에는 국민 중에 토착민, 즉 인디오의 비율이 많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아왔던 곳들 아닙니까. 서방 열강의 식민지를 거치고 오랫동안 군사독재 치하에 있었죠. 인권의 맛도 못 본 나라들이잖아요. 참 묘해요.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극단적으로 겪은 나라에서 헌법에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세계사적인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동안 근대국가 시스템에서는 인권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이야기했지만, 자연의 권리라는 건 농담으로 생각했단 말이에요.
에콰도르의 야수니 프로젝트(Yasuni-ITT)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2010년에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이 정식으로 환경보호와 생물다양성 보장을 위해서 아마존의 유전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고, 그 대신 세계의 부국에게 빈국인 에콰도르를 도와달라고 선언을 한 것이죠. 아마존 지역 야수니 국립공원에서 2006년에 유전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에콰도르 전체 석유 매장량의 20%에 달하는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해요. 이 유전을 개발하면 에콰도르가 돈은 벌겠지만, 인류사회가 지금 직면한 기후변화라는 현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데 기여할 거란 말이죠. 그래서 세계의 앞날을  위해서 석유 개발을 포기하겠으니 에콰도르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도록 국제사회가 지원해주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UN을 포함해서 라틴아메리카 몇몇 나라와 독일, 스페인 등등 소수의 나라들이 찬동을 하고 돈을 보내왔지만 목표액에는 턱없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결국 라파엘 대통령이 지난 8월에 이 프로젝트를 중단한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이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현지의 시민운동가들은 국민투표에 붙이자고 지금도 캠페인 중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계획이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정신적 진화 과정에서 굉장히 의미있는 중대한 사건이고, 생태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꼭 참고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유정길      환경과 생태 관련 단체들에 하나의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미래의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기구가 필요합니다. 또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개발하고, 부분적으로는 시도되어야 합니다. 환경과 생태 문제에 관심 있는 단체들이 힘을 합쳐서 여러 주제를 놓고 공동 연구를 하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생태 민주주의의 한 실험으로써, 회의를 할 때 의도적으로 미래세대와 뭇 생명과 자연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한두 사람을 두고 회의를 하는 민주주의의 실험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회의에 참여한 사람 스스로가, 항상 현세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고민하게 되겠지요.
 
하승우     저는 교육 문제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미래세대가 있는 곳이 학교이지요. 학생이 훗날 시민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학교 자체가 굉장히 폭력적입니다. 학생을 교육의 파트너로, 주체로 생각하는 문화가 없습니다. 이건 좌파라고 하는 전교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도 학생을 위계적 관계로 보고,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 관계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 문제도 지역에서 풀어야 합니다. 하나의 학교를 바꿔서 대안학교로 만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지역 내 학교 문제에 지역사회가 개입해야 합니다. 지금 존재하는 학생회나 운영위원회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상태에서, 학교 내에 다른 기구를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미래세대인 학생들과 교육 문제를 같이 구상하고, 함께 학습하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서 제도를 설계해야 합니다.

 

정성헌     강원도 인제에서 ‘인제생명사회실천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신 시도를 해보고 있는데, 구호도 비슷한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20년 정도의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인제생명사회 실천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요. 이 단체의 구호가 “모든 집을 발전소로, 모든 집을 저수지로, 모든 집을 텃밭으로, 모든 집을 학교로”입니다. 현실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럼 마무리 발언을 좀 해주시지요.

 

김종철     우리처럼 험난한 역사의 현실 속에서 실컷 고생하고도 제대로 된 철학도 사상도 안 나온 곳이 없어요. 공부들을 안 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어요. 대개 정치가 막히고, 정치적 실천이 가망 없다고 판단되면 우리가 기댈 곳은 교육입니다. 현실의 좌절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이겨내려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교육도 지금과 같은 교육으로는 절망적입니다. 시민들 자신에 의한 광범한 자치, 자립 교육이 훨씬 활발해져야 할 것 같아요.
생태 민주주의에 관련한 활동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전국적으로 눈에 안 보이지만, 밑바닥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각자 소소하게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서로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없어요. 그래서 저희가 녹색당을 만들어 네트워크를 형성해 보려고 하는데, 꼭 참여할 만한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네요. 모여서 네트워크를 만들면 우리 사회와 정치를 전체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은데도, 무슨 까닭인지 협력이나 합류를 주저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체념하거나 비관할 수도 없고요. 조금이라도 먼저 깨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움직일 수밖에요.

 

유정길     공화제 사회에서의 선거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현실 민주주의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하나 살펴봐야 합니다. 제대로 안착되지 않은 현재의 민주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하승우     지금의 민주주의는 힘이 없습니다. 시민들이 서로 많이 만났으면 좋겠어요. 힘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거리든 광장에서든 만나고 모이면 힘이 생깁니다. 제도 개혁도 많이 되어 있으니, 시민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해요. 모여서 무언가를 집단적으로 경험해 보아야 변화가 있습니다.

 

정성헌     김종철 선생님의 “생각이 깨어있는 사람들이 비관하지 말고 많이 움직여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저도 올해  2~3월 두 달 동안 5~12명 단위의 인제 주민들을 23회에 걸쳐서 만났습니다. 많이 만나면 엉터리건 알맹이가 있건 무언가 그루터기들이 생기긴 하더군요. 역시 현장에서 살아가는 분들을 많이 만나서 서로 연계되고 엮이게 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낙관적인 마음으로 부지런히 움직입시다. 긴 시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위의 글은 계간민주 겨울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계간민주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www.kdemo.or.kr)에서 정기구독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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