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혁신과 배려의 경제 - 한국의 노동, 진단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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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동, 진단과 과제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와 노동기본권 신장을 위한 네 가지 과제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 klsiyskim@hanmail.net

한국 노동시장 유연화 20년

1974년 석유파동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30여 년간은 전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가 맹렬하게 위세를 떨치고, 노동시장 유연화가 마치 글로벌 표준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던 시장근본주의 시기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뒤 사정은 크게 달라져, 국제노동기구(ILO)와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와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노동시장 유연화가 추진된 것은 1994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다. 그 뒤 20년 가까이 노동시장 유연화는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재벌개혁과 골목상권 보호 등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핵심 이슈로 떠올랐지만, 정작 그 뿌리인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개혁은 주요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는 지난 20년 동안 추진된 노동시장 유연화가 노동시장 양극화(고용불안정, 소득불평등)로 이어지면서, 대중의 반감이 확산된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2014년 말에는 최경환 부총리의 정규직 과보호 발언을 시작으로, 노동시장 유연화가 다시 노동정책 제1의 과제로 등장했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경제정책 방향’과 ‘비정규직 종합대책’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하향평준화를 공식 천명했다. 2015년 9월 여당이 입법 발의한 노동법 개정안은 ‘쉬운 해고, 평생 비정규직’으로 요약되듯이 재벌의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와 재계가 추진한 노동개혁(?)은 노동계와 시민사회, 야당의 저항으로 좌절되었다.

저성장 체제에서 고착화된 노동지표

지난 30년 동안 노동자 대중의 삶의 질은 개선되고 노동기본권은 신장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980년부터 2015년 사이 주요 노동지표를 살펴본 분석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난 30년 동안 실질임금은 상승하고, 노동시간은 단축되고, 근속년수는 길어졌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에는 성장에 상응하던 실질임금 인상이, 2000년대 초반에는 성장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으로 낮아졌고, 2010년대 초반에는 ‘임금 없는 성장’으로 더 낮아졌다. 두 차례에 걸친 법정 노동시간 단축으로 연간 노동시간은 2800시간대에서 2200시간대로 600시간 단축되었지만, 여전히 OECD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길다. 근속년수도 3.3년에서 6.5년으로 길어졌지만 OECD 국가 중 가장 짧고, 전체 노동자의 1/3이 근속년수가 1년이 안 되는 초단기근속의 나라다.


✽ 1987년 6월항쟁에 이은 노동자대투쟁은 근로자의 노동자의 권리를 신장시킨 기념비적인 운동이다. 왼쪽은 노동기본권 쟁취대회, 오른쪽은 청계피복 노조원들의 시위 모습.

둘째, 고성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노동운동이 활성화된 1990년대 초반에는 고용사정이 개선되고 임금불평등이 축소되고 노조 조직률이 증가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성장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에는 고성장이 저성장 체제로 전환되고, 청년고용이 악화되고 비정규직 문제가 심화되었다. 임금불평등이 확대되고, 노조 조직률이 하락하거나 제자리걸음을 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이들 지표가 더 악화되고 고착화되면서, 많은 청년과 노동자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 노동시장개혁 입법을 통한 청년일자리 창출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청년들 ©연합뉴스

청년 고용률이 OECD 평균보다 낮은 것은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일할 양질의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파괴되고, 기업의 고용관행이 경력자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일단 눈높이를 낮추어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를 갖는다고 해서 더 나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는 정규직으로 옮아가는 징검다리 노릇을 하기보다는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덫으로 작용하고, 비정규직 취업 경험은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할 가능성을 높이는데다 임금수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학력 여성 고용률이 낮은 것은, 자녀출산과 양육 등으로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이 노동시장에 다시 진입하려 할 때 주어지는 일자리가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이어서 취업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고용률을 높이려면 청년과 고학력 여성의 고용률을 높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고용의 양과 질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고용의 양을 늘리려면 고용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늘려야 한다는 식으로는 청년실업 문제와 중소영세업체 인력난을 해소할 수 없다. 비정규직 남용과 차별을 막고 저임금을 일소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노동시장 불평등을 줄이고 형평성을 높여야

외환위기 이후 성장률이 낮아졌다 해도 2000년부터 2015년 사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3%였다. 저임금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정규직의 경우에도 성장에 못 미치는 임금인상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소득분배율이 빠른 속도로 하락하고 있다.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하면 노동자들 내부적으로 임금불평등이 확대된다. 그나마 교섭력이 있는 노동자들은 자기 몫을 지키지만, 교섭력이 없거나 취약한 노동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된다. 여기에 골목상권 붕괴, 하도급단가 후려치기, 부자감세 등으로 막대한 초과이윤이 몇몇 거대재벌에게 빨려 들어가면서 최상위층에 소득이 집중되고 있다. 노동시장 양극화(고용불안정, 소득불평등)는 정규직 과보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재벌 과보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이 파이는 키울 수 있지만 곧바로 소득분배 구조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우리 사회는 이미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가 깨어져 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그에 따른 소득분배 구조악화를 기정 사실(또는 ‘시장’이라는 불가항력적 힘에 의한 결과)로 받아들인 채 사후적 보완책(재분배 정책) 마련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⑴ 사회 안전망 구축 등 사후적 보완책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고 단기적으로 효과가 가시화되기 힘들며, ⑵ 현재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노동소득 분배구조를 방치한다면 수많은 노동자가 저임금과 빈곤의 덫에 빠져 설령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더라도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우며, ⑶ 노동소득은 요소국민소득(노동소득+사업소득+자산소득)의 60%를 차지하고 개인 또는 가구소득의 주요 원천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

비정규직 남용과 차별 제어, 최저임금 수준 현실화, 연대임금정책, 연대복지정책, 산업 별 단체교섭 촉진과 단체협약 효력 확장 등의 노동정책을 통해 노동시장 불평등을 해소하 고 노동자들 내부적으로 형평성을 제고할 때만이,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확립하고 소득분배 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산별체제로 전환해야

기업별 노조 체제에서 중소영세업체는 노동조합이 결성되더라도 조합원 수가 적어 조직의 정상적인 유지·운영이 어렵고, 비정규직은 단체협약이나 규약으로 노조가입 대상에서 제외되기 쉽다. 조합원 구성이 특정 산업, 대기업, 남성, 정규직에 편중되어 있어 전체 노동자의 요구와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고, 노조 활동은 기업 울타리 내에서 임금인상 등 노동조건 개선으로 한정되기 쉽다. 노조 조직률은 1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동운동은 경제주의, 실리주의로 내몰려 사회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의 노동운동은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기업별 노조 극복과 산별노조 건설을 조직적 과제로 추진해 왔다. 교원노조,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 금융노조, 공무원노조 등 산별노조가 잇달아 건설되고, 2015년 말에는 초기업 노조 조합원 수가 110만 명(56.7%)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업별 체제를 고수하는 대기업 노조가 많고 산별교섭의 진척이 느려 산별노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산별노조로 조직형태를 전환했더라도 기업 단위 가입방식을 유지하고 있어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이 노조가입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


✽ 전태일 열사의 묘역 앞 동상에 삼성전자서비스 유니폼을 입히고
추모하고 있는 금속노조의 노조원. ©연합뉴스

한국의 노동운동이 계급적 연대와 사회적 연대에 충실하려면, 기업별 체제를 극복하고 산업별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 조직화는 전국단위 산별노조나 총연합단체 주관 아래 초기업 단위(지역, 직종, 업종 등)로 진행하고,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에게 노동인권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시민사회운동과 연대를 강화하고 자원 동원을 극대화해야 한다. 기업 노조(또는 지부)는 노조 가입자격을 확대하고, ‘공장(직장)에서 사회로!’를 슬로건으로 기업 울타리에 갇혀 있는 현장 활동가들의 역량을 지역사회로 재배치하고, 지역사회와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양대 노총과 산별노조는 공동사업과 공동투쟁을 활성화하고, 산업별 동질성에 기초해서 중소산별을 통합하고, 상급단체의 지도집행력을 강화해야 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법에서 독소조항은 많이 개정되었다. 하지만 2017년에도 전교조와 전공노가 법외노조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한 지 25년이 지났음에도 ILO 헌장의 기본정신을 담은 협약 87호와 98호조차 비준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은 매년 수백 명씩 구속되지만, 사용자가 구속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ILO 협약 87호와 98호를 비준함과 동시에 노동조합법에서 각종 독소조항을 개정해야 할 것이다.

산별교섭과 사회적 대화, 경영참가를 잇는 중층적 노사관계를 구축해야

전국단위 산별노조 내지 총연맹 주관 아래 중소영세업체 비정규직 조직화를 추진한다 해도 조직률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조직화 모델을 채택한 미국과 영국의 노동조합 운동이 많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투자했음에도 아직까지 조합원 수 감소 추세를 반전시키지 못한 것은, 노동운동 활성화에 유리한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관련 노동관계 법안의 해고자 노조가입금지 조항과 파업권 제약 조항을 폐지하라는 국제노동기구 결자의 자유위원회 이행을 촉구하는 민주노총의 기자회견 ©연합뉴스

산별노조를 건설했다고 곧바로 정착되는 것도 아니다. 산별교섭을 통해 노사 쌍방이 체결한 단체협약의 성과가 단체협약 효력확장 제도를 통해 미조직 노동자에게 확대 적용될 때 산별노조 건설은 그 의의를 다 할 수 있다. 금융노조,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가 산별교섭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산업별 단체협약 효력확장 제도조차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산업 등 초기업 수준에서 단체교섭을 촉진함과 더불어, 산업, 지역, 업종별 단체협약 효력확장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정부와 재계, 새누리당이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남발한 나머지 노사정위원회는 기능이 마비된 상태다. 하지만 앞으로도 중앙 수준에서 사회적 대화와 협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될 것이므로 산업·부문·의제·지역별 노사정 협의체를 활성화하고, 중앙 수준에서 사회적 대화·협의 기구를 전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기업 수준에서 근로자 대표의 선발 절차와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종업원 대표기구와 노사협의회를 강화하고, 근로자대표 이사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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