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기억, 삼양동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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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기억, 삼양동 사람들

 

글 장남수 (원풍노조, <빼앗긴 일터> 등 집필)


 * 이 글은 윤기현 씨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김지선 씨의 증언을 더했습니다. 
1980년 오월 광주의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음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 중 한 지역인 서울 삼양동 산동네에서 이루어진 활동들은 지면을 통해 이야기된 적이 없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지면관계로 매우 축소할 수밖에 없는 점, 관계되신 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윤기현의 기억 


그날, 윤기현(농민운동을 한 아동문학작가이며, 현재 <무등산 숲 동화학교>를 설립준비 중)씨는 광주 도청 안에 있었다. 5월 27일 새벽 두시쯤 되었을 때 그들(진압군)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미 ‘순교’를 결의한 상태였다. 다만 최후의 상황이 닥쳤을 때 청소년과 여성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폭도가 아니라 열사였음을, 그 정신을 증언해야 한다는 원칙도 결의한 상태였다. 도청에는 무장한 청장년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YMCA에는 비상상황시의 대기조들이, YWCA에는 의료, 식사, 홍보 등의 지원조가 배치되어 있었다. 미성년 학생들이 많았던 대기조와 여성이 많았던 지원조의 피신이 시급했다. 전기는 끊어진 상태고 진압특공대는 고층건물에 배치된 상태였다. 누가 갈 것인가? 대기조나 지원조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 나이도 많다는 등의 이유로 ‘윤기현’으로 결정되었다. 윤기현 씨는 하얀색 천과 하얀색 기를 세워 들고 도청을 걸어 나왔다. 


캄한 길을 건너 YMCA문을 두드렸고 사람들을 피신시켰다. 부상자가 많았던 YWCA 안의 사람들도 피신시키는데 그때 문 앞을 지키면서 피신하라는 설득을 거부하던 아이가 있었는데 후일 보니 사망자명단에 그 아이 이름이 들어 있었다. 동분서주하다 네 사람이 남았다고 느낀 순간 도청은 진압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려야한다, 뛰는 방향으로 흩어지자. 박효선은 애인과 함께 뛰어 나가고 소설 쓰는 친구는 녹두서점 쪽으로, 윤기현은 도청 뒤쪽으로 달렸는데 상황은 극렬하고 처절했다. 도청 옆의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캄캄한 금남로의 밤, 붉은 피가 어둠에 묻히던 시간이었다. 두어 시간을 나무 위에 숨어 있는데 부옇게 날이 밝아왔다. 군대를 가본 사람은 안다. 저녁에는 사람의 눈이 아래로 향하지만 밝아지면 위로 향한다는 것을. 해가 뜨면 바로 걸린다. 

나무를 타고 내려와 남동천주교회 뒤의 담 하나를 넘어 무작정 어느 집 화장실에 들어갔다. 조금 후 밥하러 나오는 아주머니가 보였고 도와달라고 절박하게 부탁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들어오라고 했고 밥을 차려주었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우유라도 먹으라며 건네준 마음이 고마워 우유 하나를 마셨다. 형상은 귀신같았을 것이다. 아주머니가 씻고 갈아입으라고 옷을 챙겨주는데 손이나 얼굴에 묻은 흔적들이 잘 지워지지 않으니 닦아낸 후 지워보라며 크림을 내주었다. 

주머니에 있던 소지품들을 꺼내어 박종현 선생과 김삼진 선생 전화만 남겼다. 두 분은 아동문학 하는 분들로 좌, 우익 양 진영으로 다 관계가 편한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버릴 것을 소각해 준 아주머니는 “이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다 해드렸습니다. 저도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다. 도리가 없었다. ‘공무원들은 출근하라’는 가두방송이 들려왔다. 대문을 빠져나와 100미터도 채 못 갔는데 진압군에게 잡혔다. 그러나 운이 있었는지 파출소 옆에 박종현 선생의 집이 있었고 마침 선생의 눈에 띄었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긴 했지만 박종현 선생이 ROTC출신이었던 김삼진 선생께 연락하고 진압사단과 인연이 닿아 풀려날 수 있었다. 왼손에 양 대령 이란 사람의 사인을 받아든 후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박 선생집에 들른 후 홍성담 씨의 화실로 숨어들었다. 당시 홍성담 씨 화실에서는 유인물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 대령의 사인이 지워지지 않게 하려고 목장갑을 끼고 자전거를 타고 계림교회집사로 있던 지인을 찾아갔고 교회공사 중이던 자재 안에 틈을 만들어 한동안 기거했다. 그곳에서 29일 12시를 기해 진압군이었던 24사단이 현지 31사단으로 교체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탈출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화순으로 걸어가는데 군인은 있지만 경찰은 배치가 안 된 상태여서 다행히 통과를 했고 순천을 거쳐 부산으로 가기위해 벌교를 지나는데 낚시꾼으로 위장한 문병란 시인과 황인봉 씨를 버스 안에서 만났고 잘못하면 세 사람 다 걸릴 수 있다싶어 두 사람은 내리게 했다. 그렇게 부산을 거쳐 완행열차를 타고 간 곳은 서울 삼양동이었다. ‘광주탈출 1호’였다. 삼양동에는 얼마 전 운명하신 허병섭 목사(동월교회)와 이철용(『어둠의 자식들』 저자, 전 국회의원)씨가 있었다. 

 새벽에 도착해서 삼양동 언덕배기에 있던 이철용 씨 집 앞에서 두 시간 가량 서성이고 있는데 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김현숙(남영나일론 해고노동자)이었다. 당시 해고된 김현숙은 역시 해고자였던 김지선(삼원섬유 해고)과 함께 삼양동 주변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당시 이철용 씨 집은 많은 활동가들의 아방궁이었다. 집안에는 황석영, 김지선 들이 있었고 그들을 만나 주저앉는 순간 비로소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철용 씨가 신길동의 어느 수녀원으로 피신처를 마련해주었고 수녀원에서는 증언록을 만들었다. 나중에 이 증언 테이프로 수녀들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서히 광주 사람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삼양동 사람들은 이들의 도피처를 마련하고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살벌한 전선에 섰다. 윤기현은 허병섭 목사의 방과 이장호 감독집에 신세를 지며 이철용 씨와 함께 증언을 하러 다녔다. 아, 그때 성남의 주민교회에서 증언을 했는데 주민교회출신인 김종태가 막 제대하고 나왔다가 윤기현의 증언을 듣고 무슨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윤기현이 말했다. 


“ ‘그럼 광주에 가봐라. 지금은 다 치워버렸겠지만 흔적은 있을 것이다. 건물의 총알자국과, 시신은 사라졌겠지만 병원에 누워있는 부상자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더니 6월 7일쯤인가 김종태는 광주로 갔어, 보고 온 거야, 사실이었어. 17일인가, 이 친구가 유인물을 들고 신촌에서 분신을 한 거야. 김의기도 그런 경우고․ ․ ․ ․ ․ ․내가 참 광주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네.” 

김지선의 기억 

김지선(전 삼원섬유노조, 인천산선 등 인천지역에서 활동)씨의 기억에 80년 오월 당시 삼양동 사람들은 어제의 기억처럼 선명하다. 그 기억 중 한 토막을 꺼내었다. 

그때『어둠의 자식들』 출판관계로 황석영, 이철용 씨가 현암사에 가는데 우연히 동행하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황석영 씨가 광주의 지인에게 전화를 해보더니 연결이 안 된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는데 아무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윤기현 씨가 왔고 광주의 상황을 세밀하게 전했다. 허병섭 목사가 “우리가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다. 광주가 저대로 고립되게 둘 수 없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부르짖었다. 황석영, 허병섭, 이철용 등은 유인물을 작성했고 배포작전을 짰다. 상황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선이었다. 삼양동 이철용의 집은 밤낮없이 논의의 장이 되었고, 여러 팀을 나누어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중 이철용 김지선, 홍석화, 김현숙 팀은 위장 ‘부부’가 되었다. 큰 여성용 가방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광주의 증언을 생생히 기록한 유인물을 가득 채워 광화문 덕수제과 옆 육교위로 올라섰다. 사람이 없는 틈을 노려 육교의 중앙지점에서 통째로 호외를 뿌리듯 휙 날렸다. 다음날 그 장소를 다시 가봤는데 육교의 양쪽 입구에는 전날 없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고려대학교 등 교정에 탱크가 진입했다하고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흉흉한 정세, 말 그대로 살벌하던 때였다. 이 일은 아마도 광주탈출1호와 함께 시작된 서울의 첫 유인물작업이었을 것이다. 

광주 사람들이 서울로 들어오면서 일이 더 많아졌다. 
어느 날은 김현숙과 둘이서 윤한봉 씨의 망명을 위해 대사관 탐색 작업을 하러갔다. 대사관 앞에 경찰이 있거나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안 보이는 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윤한봉 씨 팀에게 신호를 하기로 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경찰이 있는 것이고 그냥 걸어 나오면 괜찮은 것’으로 정했다. 대사관은 처음 가보는 곳이라 두려웠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였다. 

대사관 안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괜찮다는 신호를 했다. 그런데 실은 그날 김지선의 신호를 받을 윤한봉 팀은 나와 있지 않았다. 계획이 변경된 것이었다. 죽을 각오로 갔는데 실은 혼자 북치고 장구 친 셈이었다. 나중에 이철용 씨가 말했다. “지선아 미안하다.” 만나지 않고는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피신해있던 박효선(지금은 고인이 된)씨는 한 달 가량을 김지선의 집에 숨어 있었다. 
박효선 씨를 데리고 집으로 가던 날, 삼양동 이철용 씨 집 아래 육교를 지나 수유리 방향으로 가는 길옆에 파출소가 있었다. 파출소 앞에는 박효선의 수배전단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었다. 박효선 씨가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것을 김지선이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파출소 앞을 지나갔다.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금부터 외삼촌이야, 삼촌!” “네” “삼촌이 ‘네’가 어디 있어? 삼촌!” “어 어 그래.” 집 앞 가게에서 큰 수박을 한 통 사서 다닥다닥 붙어살던 이웃에 한 조각씩 돌렸다. 

“삼촌이 시험 볼 게 있어서 잠시 공부하러 왔어요. 며칠 있을 거니 잘 좀 봐주세요.” 
작은 말소리도 다 들리던 집이었다. 말을 매우 조심해야했고 늘 공부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 
80년 오월 삼양동에서 김지선의 인생은 갈래가 명확해졌다. 

윤기현 씨는 삼양동에서 김지선과 김현숙을 보며 “자기들 문제만 해도 힘든 노동자들이었는데 몸을 사리지 않고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유인물을 배포하고 다니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이철용 씨의 헌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철용 씨 부인이 묵묵히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밥을 지어대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윤기현 씨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광주의 사람들, 삼양동의 사람들, 역사 속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역할을 생각하며 ‘論功行賞’이란 말을 떠올린다고. 

“논공행상에서 제외된 사람들, 아니 참작도 되지 않는 사람들, 70~80년대 운동권에서도 실제로 일을 다 해냈던 건 ‘간사’들이지만 논공행상의 장에는 장급들만 있고 간사들은 다 배제되었다. 정신적, 물질적, 기록, 그 무엇에서도 배제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냉소적으로 되는 것이 불행한 일이다. 어찌 보면 반동보다 무서운 게 냉소다.” 

이런 ‘냉소적’ 현상을 극복하고 논공행상의 줄기를 바로잡아 역사의 진정성을 신뢰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기현 씨는 다양한 역할이 있겠지만 그 중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말했다. ‘역사는 강자의 역사가 되지만 예술은 패자의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패자’들이 만들어 온 ‘승자의 역사’를 조명하는 것, 그래서 ‘패자’들의 승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윤기현 씨가 마음에 담고 실천하고 있는 문화운동의 지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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