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속의 누님” 순댓국집 임선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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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속의 누님” 순댓국집 임선호 씨

글 장남수/ jinsoo711@hanmail.net



올해로 꼭 30년, 해마다 9월이면 ‘그날’을 떠올리며 전국에서 한 공간 안으로 모여드는 여성들이 있다. 제주, 강릉, 광주, 대구, 멀든 가깝든 만사를 제쳐놓고 바람난 처녀처럼 달려가는 그곳, ‘원풍동지’모임이다. 그 모임에 30년 동안 단 한해도 결석하지 않은 임선호(53세)씨를 만나기 위해 조치원의 ‘무봉리 순댓국’으로 찾아갔다. 25년 경력의 순댓국 뽀얀 국물에 직접 담근다는 맛깔스런 김치 걸쳐 먹으니 환절기 감기가 뚝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임선호 씨는 1975년 열여섯 살에 원풍모방에 입사했다. 양성공 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언니들에게 노동조합이야기를 들었고 자신이 입사하자마자 유니언숍 제도에 의해 조합원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입사한지 몇 개월이나 지났을까, 노동조합지부장의 결혼식장에도 쫓아갔다. 기숙사 방식구들이랑 노동조합과 관련한 활동을 하고 다니는 게 참 재미있었다. 남자도 별 관심 없었고 유흥에도 관심이 없어 오로지 열심히 일했고 노동조합활동만 했다. 소그룹활동을 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노조교육장에서 노래하고 율동도 했다. 구속된 노조간부 면회를 다니면서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든든하고 가족 같았다.

그러나 1982년 9월 폭력배들에게 끌려나온 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행복했던 공간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해고자로 만든 권력을 도저히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원풍노조가 깨진 후 블랙리스트로 취업마저 막혀 오갈 데가 없어 방황하다 중매로 결혼했다. 연애 한 번 안 해보고 결혼한 게 때때로 슬며시 억울해지기도 한다. 만약 원풍노조가 깨지지 않고 원풍에서 그대로 일할 수 있었더라면 결혼은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 남편은 반듯한 사람이고 지금은 든든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공장을 다닌 삶의 이력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민주노조의 힘이었다.



임선호 씨는 밥장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사람들을 잘 기억한다는 것을 알았다. 오랜만에 온 손님한테 그때 하신다던 일 잘 되느냐고 그 일의 내용을 말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느냐고 놀라곤 했다. 순댓국 하나라도 사람들은 식성이 다 다르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순대를 많이, 어떤 사람은 내장을 많이, 어떤 이는 양념을 넣고 어떤 이는 맑은 것을 좋아한다. 2년만엔가 온 손님한테 “다른 고기 빼고 순대만 드시지 않아요?” 라고 했더니, “어휴 깜짝이야.” 라고 소스라치면서도 고마워한 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을 대할 때 비교적 공정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내 가족이라고 아닌 것 봐주거나, 남이라고 옳은 걸 아니라고 하지 않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 이게 노동조합하다 몸에 밴 습관이구나, 사람을 진지하게 대하다 보니 기억을 잘하게 되고 매사에 가능한 분별 있게 하려고 애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날 임선호 씨네 식당에서 순댓국을 먹고 소주도 한잔 하고 나가던 지역 사람들이 식당을 나가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어, 그 노래 나도 아는데.” 계산을 하던 임선호 씨가 중얼거리자 어떻게 아느냐고 놀란 듯 바라보는 그들에게 임선호 씨는 원풍노조이야기를 했고 그들은 반색을 했다. “이 지역에서 그렇게 활동했던 선배는 누님밖에 없다.” 며 그 후 지역의 노동운동 현장이나 민주화운동 관련된 사람들이 강연회를 하는 등 행사가 있으면 꼭 임선호 씨를 초대했다. 어느 날은 무슨 행사에 갔더니 임선호 씨를 단상으로 불러 소개를 하고는 “전설속의 누님”이라며 꽃다발을 주는 게 아닌가. 그때는 정말 마음이 뿌듯하고 핑 눈물이 돌 것 같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원풍노조의 활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면서 민주화운동인정증서가 집으로 배달되어왔다. 그 증서를 본 활동가들이 왜 이런 것을 장속에 처박아두느냐며 액자틀을 하나 사들고 왔다. 남편이 얼른 망치를 들고 나오더니 음식점등록증 옆에 나란히 걸었고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었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지역 활동가들은 식사하러 오면 새로운 사람들에게 항상 임선호 씨를 소개하고 주방으로 찾아가 남편에게도 형님, 형님, 하며 인사를 한다. 선호 씨는 상황 닿는 대로 마음을 보태며 지역 활동가들의 든든한 누님이 되려고 작정했다.



임선호 씨는 명절 이외에는 문을 닫지 않는 밥장사를 하면서도 9월이 되면 마음이 들뜬다. 이 날만은 그 누구도, 어떤 일도, 선호 씨 앞을 막아서지 못한다. 동창회는 매번 연락와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원풍 모임은 두어 달 전부터 일정을 챙긴다. 얼른 다른 사람 쉬는 날 정하기 전에 이날은 ‘내가 나가야 되는 날’이라고 못 박기 위해서이다. 남편도 아무리 바쁜 단체손님이 있어도 이날은 이유를 달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시아버님이 생존해계실 때 생신이 겹치는 적이 있었다. 아버님 생신 날 식구들이 모여 있는데 콩나물 사러 간다고 나가서는 열차타고 원풍 모임으로 내빼버린 적도 있다.

삶의 큰 줄기이고 의미인 원풍사람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30년 개근이다. 모여서 뭐 별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얼굴보고, 소식 나누고, 같이 밥 먹는다. 안타까움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고, 때때로 어떤 상황들에 분개하기도 한다. 지금은 체력이 “쇠해서” 밤늦기 전에 돌아오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원풍모임 갈 때면 남편에게 “해 뜨기 전에는 못 올 거야.”라고 말하고 나갔다. 그러고는 해뜨기 전이 아니라 다음 날 해가 기웃해질 즈음에야 들어왔다. 밤새워 신길동 ‘원풍의 집’에 누워 수다를 떨다 해장국 먹고 서울거리를 함께 쏘다니며 놀다가 헤어졌다. 그 힘으로 또 벙글거리며 살았다. 초창기에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애들은 전부 내 자식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50대 아줌마가 되어도 변치 않는 ‘일편단심’을 지니게 할까.

임선호 씨는 말했다.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함께 느끼는 것, 이게 얼마나 귀한 거여.”

올해 모임을 여는 10월 13일은 임선호 씨에게 더욱 각별하다. 경찰행정을 공부하는 스물 일곱 살 아들과, 예술대학에서 연기를 공부하는 스물두 살 아들 둘이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난 해 원풍노조는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집단 해고한 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취업까지 차단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때 경위서를 작성하면서 컴퓨터 사용이 어려워 장남의 도움을 받았다. 아들은 엄마의 ‘사건’을 비로소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엄마 고생 많으셨다.”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가게에 필요한 장을 봐오는 일에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아들이 이제는 엄마의 ‘화려한 외출’에 동참하는 동지적 교감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설레기까지 한다.

지난해 원풍 모임은 120여 명이 참석했고 그 전해 『원풍모방노동운동사』 발간 출판기념회를 겸한 모임 때는 외부인사들 까지 300여 명이 모였다. 올해는 원풍노조 출신 100여 명과 가족, 그리고 지난 2월에 첫모임을 가진 원풍자녀들이 함께 하기로 해서 모임의 평균 연령이 확 젊어질 것이다. 모두의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있을지 참으로 궁금하고 두근거린다. 자녀들이 부모님들을 위해 노래도 불러준다고 한다. 임선호 씨는 그날 최고로 예쁘게 차리고 머리에 힘도 좀 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자식 같은 아이들과 함께 30년 전의 젊은 날로 돌아가 마음껏 노래하리라고 목청을 가다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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