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꼽추’들, 종탑위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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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꼽추’들, 종탑위에 오르다.


- 재능교육 노동자, 오수영, 여민희씨 -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미워 미워 미워……”
카카오톡 화면에는 열다섯 번의 ‘미워’와 화난표정 이모티콘이 떴다.
엄마에게 그렇게 카톡을 날린 후 아홉 살 아들은 엉엉 울었다고 했다.

오수영 씨는 설 명절을 며칠 앞둔 지난 2월6일 아침, 편지 한 통을 적어두고 집을 나섰다. 회사와의 싸움을 시작한 지 1875일째 되는 날이었다. 철벽같이 버티고 서서 꿈쩍을 하지 않는 싸움에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재능교육본사와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혜화동성당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온 몸의 기를 끌어 모아 다짐했다. 이겨야 해.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가족들의 양해를 구하고 종탑으로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어머니와 남편과 아이는 방안에 두고 나온 편지 한통으로 이 엄동설한에 성당 종탑위에 자리를 편 오수영 씨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걱정 탓에 원망하던 가족들은 차츰 그의 뜻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살림을 맡아 해주시는 시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저지르지’ 못할 결심이었다.

종탑농성 12일째 되는 날,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동안 아이가 “통화 좀 하자”고 했지만 감정조절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문자로 대신했다. 종탑 한 칸 아래의 어두운 난간으로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올라왔다.

다른 때와 달리 아이는 낯선 사람 대하듯 쭈뼛거렸다. 좁고 가파르고 어둡고 녹슨 난간이 낯설고 무서운 것 같았다. 아이는 별로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게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다. 엄마는 자꾸 아이 눈치를 살폈지만 아이는 모르는 척 했다. 오수영 씨는 일전에 백기완 선생께 받은 세뱃돈도 줘보고 초콜릿도 건넸다. 그러나 잠깐 엄마를 쳐다보던 아이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잠시 후 아이는 돌아갔다. 평소에 저녁 무렵이면 엄마에게 전화도 잘 걸고 간혹 심통도 부리던 아이가 요즘은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 지금 엄마의 조건이 심통부려봐야 해결될게 없다는 자각을 한 것 같다. 남편과 아이는 가끔 옷을 들고 와서 얼굴한번 보고 빨래 감을 안고 돌아간다.

미혼인 여민희 씨는 그런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남동생과 각별했던 여민희 씨도 남동생에게 말하지 못했다.
남동생은 어느 날 운전 중에 켜둔 라디오에서 혜화동성당 종탑위에 재능교육 학습지 여성 노동자 두 명이 농성하고 있다고, 그런데 그게 여민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기함을 한 남동생과 올케는 전화를 걸어 댔고 곧바로 달려왔다. 누나를 지켜 본 동생은 그 후 집이 가깝지 않은데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찾아와서 빨래 감을 바꿔간다. 농성 중에 부모님 제사가 있었지만 마음속 추도로 대신했고 부모님 마음까지 안고 찾아오는 동생이 고맙고 힘이 된다. 그 마음들이 헛되지 않도록 잘 버텨 이기자고 다짐한다.




혜화동성당의 종탑은 땅에서 27미터 높이이다. 돌아보면 2007년 싸움을 시작한 날로부터 걸어온 그 날만큼이나 아득하다.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로 ‘불림 받지 못해’ 이중의 차별을 받는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의 투쟁은 길고도 아득하다. 임금 삭감안에 반발해 농성투쟁을 시작한 노조에 대해 회사는 단체교섭을 거부했다. 노조를 결성할 수 없는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된다는 것이었다. “학습지교사는 노동자 아니다.” 라는 대법판결과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행정법원의 판결이 해석에서 어긋나 있다. 이 문제는 재능교육뿐만 아니라 소위 ‘특수고용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권리인정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모두의 문제가 집약되어 있다. 이에 대해 법의 애매성을 지적하며 법조항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지만 재능교육 박성훈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노조는 안 된다.”고 문을 닫아걸었다.

그 이듬해 노조활동을 한 조합원 12명을 해고했고 구속,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손해배상소송 등 노조를 옥죄는 회사의 조치들은 계속 되었다. 노사 갈등의 골도 깊어져 갔다. 재능교육노조의 긴 여정은 여타의 자료들이 많으니 필자는 여기서 더 기록하지는 않겠다.


(사진- 정택용)


결국 두 여성노동자 여민희(40)와 오수영(39)은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 처럼 어두운 벽의 가파른 계단을 타고 혜화동성당 꼭대기 종탑으로 올라갔다. 두꺼운 점퍼와 침낭을 챙기고 작은 텐트를 쳤다. 언제까지가 될지 알 수 없는 싸움이었다.


성당 종탑위에서는 맞은편 재능교육본사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혜화동 로터리로 분주히 오가는 자동차들과 본사 앞에 자리 잡은 동료들의 농성텐트도 조그맣게 내려다보였다.


 



세상을 향해 우리가 여기 있다고 있는 힘을 다해 말했다. 가끔 기자들이 종탑으로 오르는 계단을 타고 올라왔고 각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운동의 선후배들이 찾아와 맞은 편 도로위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손들이 얼마만큼 보태져야 자본의 오만한 벽을 덮을까, 얼마만큼 크게 소리쳐야 저 문이 열릴까, 재능교육의 노동자들은 종탑과 도로위에서 얼마만큼 더 버텨야 할까. 밥해먹고 가족과 텔레비전 보고 장바구니 들고 장에 가는 일상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동료들과 집회도 하고 여기저기 선전전도 하러 다니고 할 일이 많은데 투쟁의 잡다한 일상 활동도 할 수가 없다. “여기서 늙어죽을 까 봐 걱정이에요.” 오수영 씨가 말해놓고 웃으며 덧붙였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요?”
돈을 가진 박성훈 회장과 싸운다고 생각하면 힘들다. 하지만 그는 교육재단의 이사이기도 하다. 아무리 돈을 퍼붓고 광고를 해도 교육 이미지를 손상시킨다면 모두에게 덕 될 것이 없는데 교육적으로 잘 판단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재능교육의 교사노동자들이, ‘신나고 활기찬’ 노력을 보태 우리 아이들의 재능을 잘 끌어내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부터 82년 전인 1931년의 화창한 봄날,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은 평양 을밀대 지붕위로 올라갔다. 한쪽은 평양 시내가 내려다보이지만 또 한쪽은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였다. 그는 일제의 노동착취와 수탈을 고발하며 9시간가량 농성을 벌였고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며 싸우던 그는 31세에 평양의 한 빈민굴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1970년대 도시빈민들과 그의 자식 노동자들의 절박한 처지를 함축한 철거촌의 꼽추 난장이는(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굴뚝에 올라가서 죽음을 맞이했다. 서 있을 땅 한 뙈기, 누울 자리 한 평 없이 그가 올라갈 곳은 시커먼 굴뚝이었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기륭전자 노동자들, 21세기 한국사회의 노동자들도 이어 이어 고공으로 올라가고 있다. 1인당 GDP 2만 달러를 넘어서는 ‘선진국’이면서 OECD 가입국 중 행복지수 하위를 기록하는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이 땅위에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살을 에는 바람과 오뉴월 땡볕을 다 받으며 이들은 땅을 향해 외친다. 천년을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조건 ‘사람다움’을 지키겠다고. 굴종이나 착취나 학대가 아닌, 자존과 평등과 평화를 실현하게 해달라고.


사람이 살아야 할 지상위에서 사람으로부터 거부당한 노동자들이 꽃샘추위가 일렁이는 삼월, 오늘도 고공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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