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사

놓지 않는 ‘생각’, 노동이 빛나는 꿈 - 원풍노조 손선례 씨

놓지 않는 ‘생각’, 노동이 빛나는 꿈

- 원풍노조 손선례 씨 -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의 일꾼이었어요. 열여덟 살까지 내 등에는 동생들이 번갈아 업혀있었고 빨래, 청소, 아버지 리어카 잡아주고 밭일에 나뭇단 정리……” 



손선례(1959년생)의 일은 끝이 없었다. 오재미니, 고무줄놀이니, 그런 건 하나도 못했다. 늘 등에 애가 업혀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고 싶어 잠시 아기를 내려놓고 뛰었더니 그새 애가 흙이랑 뭘 집어 먹고 캑캑 거려 들쳐 업고 뛰어야 했다. 아버지의 아들 욕심에 딸이 여섯, 막내로 아들 하나가 나올 때 까지 줄줄이 여섯 동생이 그녀의 등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매일 욕하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었다. 공책이 다 떨어져 가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버지한테 돈을 요구하는 순간 욕부터 날아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방앗간 서랍 안에는 늘 돈이 있었다. 종이돈은 종류별로 고무줄에 묶여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동전도 반짝거렸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돈을 자식을 위해 흔쾌히 사용한 기억이 없다. 먹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라며 반짝 반짝 쓸고 닦았던 방앗간 서랍이 열고 닫힐 때 마다 그 돈을 훔치고 싶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버지는 부유했지만 자식들은 가난했다. 엄마는 평생을 아버지의 곳간에서 쌀 한 톨 꺼내 자식에게 주지 못하는 “답답이”였다. 다행히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 집 바로 옆에 중학교가 들어온 덕에 입학할 수 있었다. 물론 수업이 끝나는 대로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지만 그나마 중학교는 졸업했다.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여동생마저 공부시키지 않으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저항하기에는 너무 두려웠다. 동생의 진학문제로 아버지와 ‘맞장’을 뜬 일이 한번 있었다. “아버지 뭐 하러 자식 낳았어요! 이럴 거면 아예 진작 엎어 버리지.”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늘 ‘생각’이 많았다. 손선례의 꿈은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1977년 11월 4일,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원풍모방 입사일이다.

아, 이제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겠다 싶어 희망에 부풀었지만 웬걸, 하루 종일 서 있으려니 다리가 저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퇴근 후 기숙사에 앉아 울었다. 왜 잠시도 쪼그려 앉지도 못하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또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공장이 뭘까? 왜 이렇게 일을 시키지?

그러다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다. 산업선교회도 알게 되었다. 귀를 열고 들어 보고 ‘생각’해 보았다. 노동조합을 기웃거려도 보고 기숙사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내용을 알아가며 너무 좋았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노조에 무관심한 일부동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에서 권하는 책은 모두 사서 읽었고 ‘횃불’이라는 이름의 소모임도 즐거웠다. 아버지를 보며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노동운동만 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씩 걱정도 밀려왔다. 이게 정말 옳은 길인 건 맞는데 노동운동 계속하려면 가방끈이 좀 길어야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었다. 


남자친구도 있기는 했다. 우연히 터미널에서 만나 교류하게 된 초등학교 동창에게 늘 노동조합 이야기를 했고 그런 손선례를 그 친구가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대접받는 세상에 대한 소망이 생겼고 노동조합 활동이 행복했기에 결혼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1982년 9월 27일, 노동조합은 국가권력의 비호아래 자행 된 폭력배들의 강탈로 산산조각 깨졌다. 간부들은 감옥으로 끌려가고 수백 명이 길거리로 쫓겨났다.

정부기관에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해고자들을 고향으로 쫒아 보내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싸워야 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모여 있는데 남자친구가 찾아왔다. 군산에서 일하고 있던 그의 공장에 형사가 찾아가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열이 하늘까지 뻗힌 그는 사표를 집어던지고 올라와 손선례를 보자말자 따귀를 한대 올려붙였다. 그렇게 끌려내려 갔는데 아버지는 남자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다. 결국 얼결에 남편이 되어버린 그는 40일 만에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고 시댁에는 수시로 형사들이 기웃거렸다. 발 묶여버린 상황이 고통스러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운명은 가혹했다. 귀국한 남편은 둘째아이 태어 난지 100일도 안된 날 교통사고로 떠나버렸다. 혼인생활은 3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후 살아 온 세월은 짧은 지면에 채 담을 수가 없다.

아침에 미용실 문을 열면 제일먼저 반기는 것은 한겨레신문이다.

손선례는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이후 단 하루도 이 신문을 끊은 적이 없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할 여력이 없는 좁은 공간에서 그는 신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어떤 날은 글자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읽기도 한다. 미용실은 아이들과 살아온 생계수단인지라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미용실 고객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며 머리를 자르던 남자와 충돌한 적이 있다. “김대중이 저거는 빨갱이야.” 라고 말하는데 그냥 들을 수가 없었다. “선거로 뽑혀서 대통령을 한 분을, 더구나 돌아가신 분을 그렇게 말하는 건……” 하다가 공박이 오갔다. 급기야 그 남자는 “네 년도 빨갱이” 라고 했고, “그럼 신고하라.” 하며 언성이 높아 졌다. 그 남자는 바닥에 돈을 팽개치고 “신고한다.”며 소리 질렀다. 다른 손님이 데리고 온 일곱 살짜리 아이가 마음 쓰여 간신히 참았다.


미용실에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이 온다. 대개 성실하고 착하다. 그들을 보면 외국에서 일했던 남편 생각도 나고 ‘민주노조’에서 활동했던 전력도 살아난다. 월급은 제대로 나오는지, 근로조건은 어떤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들어준다. 양파나 감자라도 몇 개씩 쥐어주고 고구마라도 쪄서 들려 보내기도 한다. 그들은 때로는 떠난다며, 때로는 다시 들어왔다며, “누나”에게 들락거린다. 노동조합에서 굳어진 눈은 늘 사람의 삶 속살이 보이고 걱정된다. 미용실 오는 손님도 돈이 모자라면 “그냥, 되는대로 주세요.” 해버리고 본인이 하겠다는 비싼 머리요구에도 보이는 대로 “그냥 자르는 정도만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고 만류해 버린다. 어느 날 와서 지켜보던 선배는 “그래가지고 돈을 벌겠느냐.”고 혀를 찼다. 원풍에서 해고 된 후 처음 가진 일이고 평생을 해오고 있는 만큼 이 곳은 노조에서 배우고 익힌 가치를 그대로 이전해 살아온 곳이기도 하다. 도무지 실속을 차리기 위해 요령을 피울 수가 없다. 어쩌겠는가, 생긴 대로 살아야지. 그러나 실은 그게 손선례의 정신적 버팀목이기도 하다.

집회도 가고 싶고 예전의 동지들도 만나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는 현실이 참 힘들다. 매해 원풍노조 모임 날은 아예 미용실 문을 닫아걸고 나선다. 막혔던 숨통을 트는 날이다.

2011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실시한 국가폭력피해자치유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다른 무엇보다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살아 온 이야기, 억울했던 심정들…… 그리고 편하게 울 수도 있었다. 속에 눌려 있던 답답함을 조금씩 꺼내면서 마음에 햇살 한 자락이 스미는 느낌도 받았다. 요즘은 조금씩 노트에 적어보려고 한다. 적다보면 스스로 복받쳐 서러움이 치밀어오지만 그래도 조금씩 진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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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손선례 씨 집을 찾은 날은, 마침 12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다가 15 년 만에 햇살 잘 드는 두어 평 더 큰 다세대 전세로 이사한 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집이 낡아 간밤에 물이 스며들어 새벽에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일꾼’이었고 오십이 훌쩍 넘은 세월동안 일을 놓아 본 적이 없고, 노동운동한 ‘죄’밖에 없는 대한민국 한 여성의 방에 2013년 오늘도 물이 새고 있었다. 아직 이사 마무리가 채 되지 않아 수리기사도 들락거리고 있었다. 이제 딸들이 다 커서 제 밥벌이를 하니까 집도 옮길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릴 때 제대로 돌보지 못한 큰딸은 진작 했어야 할 치아교정이 늦어져 턱 관절이 약간 어긋나 있고, 둘째딸은 척추에 이상이 있어 가슴뼈가 돌출되고 몸이 말이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치료를 해보아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딸들을 볼 때마다 목구멍에 돌멩이가 걸린다.


쉬는 날인데도 문을 열고 필자의 머리를 잘라주며 손선례 씨의 이야기는 길고 아득했지만 매듭짓지 못한 체 돌아섰다. 짓궂은 4월 하순이지만, 그녀의 ‘은혜미용실’간판이 바람 뚫고 들어온 햇살에 반짝였다. 진정‘은혜’가, 그녀와 우리의 세상에 강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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