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시대읽기

영화 속에 그려진 미국, 반미 그리고 전쟁 : 미래의 승리는 더 잔인한 자의 것인가?

씨네마 에세이 <1> : 영화 속에 그려진 미국, 반미 그리고 전쟁

미래의 승리는 더 잔인한 자의 것인가?

곽영진 (영화평론가)

지금 세계의 정치적 군사적 위기의 진원지로서 초미의 관심대상이 되고 있는 뉴스거리는 이라크 위기와 북한 핵 문제이다. 역사상 고대 로마와 중세의 몽고․사라센 제국이 지녔던 위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 세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 그러나 너무 강하면 휘거나 부러지는 게 세상의 법칙이라던가. 이 나라의 일방주의는 월남전 이래 최대의 반전 운동과 ‘춥고 배고픈 작은 나라’인 북한의 거센 도전을 맞아 궁지에 몰리고 있다. 9․11 사태 당시 뜻밖에도 반(反)테러를 천명함으로써 아랍 정서에 배치되는 ‘친미적’ 제스처를 취한 북한이었건만…. 정세는 급변하여 이제 미국은 북한과 전쟁도 불사할 태세다.

미국의 우월주의와 일방주의, 그리고 ‘열등한 아시아인’

30년간의 핵 비확산 체제의 종말을 가져온 주범으로 미국이 지목하는 북한, 이라크, 이란,리비아 등 ‘악의 축’과 관련한 전쟁영화 혹은 첩보영화는 볼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영화와 비디오, 또는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는 작품들은 거의가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007 어나더 데이>(2002)에서는 북한의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강경파 소그룹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의 하수인으로 나와 우리는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9․11 테러를 예견했다고 하는 <트루 라이즈>와 <터뷸런스> 같은 액션‧재난물은 <델타포스> 등 다른 수많은 걸프전 소재의 영화처럼 오락 일변도이면서 틀에 박힌 듯 미국의 과장된 영웅상을 내세우는 미국 우월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 영화들에 등장하는 아랍인 혹은 <블랙호크 다운>의 소말리아인은 거의가 야만인이거나 테러주의자들이다. 백악관이 반복하여 강조한 전쟁논리와 맞아 떨어져 성공을 거둔 <블랙…>(2001)은 <블레이드 러너>(1982)와 <글래디에이터>(2000) 등을 통해 명장이라 불리우는 리들리 스콧의 전쟁영화다.

반면 <가을의 전설>에서 인종차별주의를 명백히 비판한 바 있는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커리지 언더파이어>(맥 라이언 주연)와 <비상계엄>(덴젤 워싱톤 주연)은 수정주의 역사관이 계승된 전쟁 액션-드라마다. 섹스 스캔들로 위기에 몰린 미국 대통령이 국민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고자 이라크 재침공을 감행한다는 배리 레빈슨 감독,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왝 더 독>(1997)은 현실정치뿐만 아니라 언론과 영화산업까지 재치 있게 조롱하는 블랙코미디이다.

<비상계엄>(1998)은 비록 항공기 테러가 등장하지 않고, 미래의 현실보다 덜 참혹하고 덜 드라마틱했지만 9․11 사태에 대한 예견을 가진 영화이다. 또 미국이 얼마나 악랄하게 아랍 국가와 단체들을 이용하고 분열시키고 차 버리고 침략했는지, 그에 대한 부메랑이 미국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제 2의 9․11’을 예고해 주는 시사점이 있다. 영화는 아네트 베닝이 분(扮)한 중동 전문 CIA요원의 ‘증언’을 통해 아랍인들이 따듯한 감성을 지닌 사람들이며, 이슬람교가 평화의 종교임을 전달하고자 한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참혹하고 드라마틱하다

아랍과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일방주의와 이른바 할리우드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 자국을 비판하는 양심적인 할리우드 영화는 검열이 아니라 흥행 때문에 이렇게 극소수이다. 다행히 이 극소수는 흥미진진한 오락과 함께 내용과 드라마가 ‘있는’ 수작들이다. 이들은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과 <7월4일생>처럼 케네디 시절의 향수가 서려있는, 반전과 인권의 시각 그리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인의 미국 비판은 가령 촘스키 교수 정도의 인식을 지향하지 않는 한은 제도권과 주류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비상계엄>이 우려하는 바처럼 미래의 승리는 더 잔인한 자의 것인가? 그러나 중동전쟁의 문제(또는 미국과 테러의 문제)는 부시와 빈 라덴 같은 일부 극렬주의자들의 문제나 석유 문제를 넘어선 인종(민족)과 문명의 충돌로 전면화 되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왜 미국, 영국, 호주 등 앵글로색슨족은 일치단결하여 초강경 논리로 설쳐대는가. 세계 지배 야욕 혹은 유대인 같은 선민의식의 발로인가? 한편 서해교전이 엊그제인데도 지금 남한 사람들 다수는 부시와 김정일, 두 극렬주의 정권 중에서 김정일 정권을 훨씬 싫어하긴 하지만 부시 정권을 더 호전적인 위험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다.

대체로 인간의 심리는 앵글로색슨족이든 한민족이든 자기 문제, 곧 일상의 이익이 최우선이며 국익과 국경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뒤를 쫓는 중요한 것이 민족감정이고 민족문제. 정 깊고 한 많은 우리의 경우 동족이란 친척 이상의 눈물 겨운 ‘형제애적’ 산물이긴 하나 잘못된 과거사로 인해 그만큼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민족문제는 중요하지만 너무 강조하면 ‘과잉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남북문제를 다룬 <쉬리>(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 <휘파람 공주>(2002)는 한반도 전쟁발발이라는 긴박한 위기가 안기부 첩보원과 휴전선 전투병의 기지로 수습되는 영화들이다. 7백만이 관람한 <JSA>는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반공이데올로기를 극복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휘파람 공주>는 비록 태작이지만 남북공조에 의한 미국 강경파 제압이 설정되고 묘사된다. 하지만 아직 한국영화에서는 반미나 배미(排美)가 아닌 비미(批美) 차원 수준의 내용을 담아내는 것도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다.

미국 반대편 당사자국의 반미 투쟁이나 대미 항전을 다룬 영화는 비디오라도 거의 접할 기회가 없다. 우선 북한영화는 개방이 안 된 상이며, 나머지 세 나라는 산유국일지언정 부국이 아닌 매우 빈곤한 형편이거나 리비아처럼 인구가 적은 나라이다. 따라서 민족문제에 관한 한 소수의 국책 영화가 아니고는 상업영화 생산이 미미한 형편이다. 해외로부터도 투자받고 또 해외로 널리 배급되고 유통되는 이란 영화는 국내에서도 개봉되고 출시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천국의 아이들> 등처럼 거의가 반미 민족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예술영화들이다. 과거 이란의 팔레비 왕정 치하 때 운동권 투사였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조차도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된 영화인 <칸다하르>처럼 인간 보편의 고통과 인권 문제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글_곽영진   7478383@hanafos.com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