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으로 얼룩진 오욕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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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으로 얼룩진 오욕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서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가 숨진 509호 조사실 내 모습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참고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다.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불과 23세의 젊디젊은 학생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경찰은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황당무계한 해명을 내놓는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 사건은 영화 <1987>을 계기로 30년 만에 또다시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현장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지난 2005년 경찰이 창설 60주년을 맞아 인권의 보루로 만든다며 인권보호센터를 입주시킨 이곳에는 애당초 직원 50여 명이 일하는 경찰청 보안3과가 자리하고 있었다. 용산구 갈월동 80번지에 자리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남산’으로 불리던 구 안전기획부, ‘서빙고호텔’로 불리던 보안사령부 대공분실과 더불어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행해지던 곳으로 악명 높았다. 홍제동에 있는 보안4과와 함께 보안경찰의 외근 부서 중 하나인 남영동 분실은 소위 ‘안보 위해 사범’을, 홍제동 분실은 ‘방첩’ 분야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안보 위해 사범’이란 다름 아닌 시국사범, 즉 독재자를 불편하게 했던 인사들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고문으로 악명을 높인 수사기관


남영동 대공분실 본관 건물. 5층 창문이 다른 건물들과 다른 특이한 모습이다. 고문을 하던 방에서 도망가거나 투신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가 대간첩 수사를 명목으로 만들었다. 한국 건축에서는 보기 드물게 검은색 벽돌을 사용한 이 건물은 다른 수사기관과 달리 지하실이 없고 조사실을 건물 5층에 배치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건물 뒤편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중간층을 거치지 않고 바로 5층 조사실로 올라갔는데, 이 통로는 반경이 채 1m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인데다 외부를 볼 수 있는 창문도 없이 곧바로 5층으로 이어져 있다. 이런 폐쇄적 구조는 피의자들에게 공포감을 주고 1~4층에 드나드는 어떤 인물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건물 뒤쪽 쪽문으로 들어가면 반지름이 채 1m도 안 되는 나선형 계단이 있다. 피조사자들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끌고 온 뒤 이 계단을 통해 조사실로 올라갔다.

5층은 똑같은 구조의 ‘조사실’이 들어차 있는데 각 방은 4.09평 공간에 책상과 의자, 침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일부 방에는 욕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된 가구들은 끌려온 사람들의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각 방은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긴 2개의 창문만 나 있어 비명소리 조차 새어나오기 어려웠다. 박종철의 고문사 이전에도 김근태 전 의원 등이 여러 사건을 통해 이곳에서 행해진 고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결국 한 젊은 생명이 스러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고문의 현장’이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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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문실의 창문, 폭이 15센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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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조를 하던 각 방의 사무집기가 모두 고정되어 있던 흔적이 보인다. 혹시 취조를 받던 이들이 자해하거나 하는 돌발 상황을 우려한 공안당국의 지능적인 일들이 당시 현장을 추측하게 한다.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대공분실

                            마치 오피스텔의 방처럼 5층 전체는 똑같은 크기의 고문 취조실이 있다.
                                 두 눈을 가리고 손을 결박당한 채 죽음의 기로에서 고통을 당했을 많은 
                                 민주인사들의 깊은 상흔이 남아 있다.

이처럼 겉은 시대를 초월하는 세련미를 자랑하면서도 그 내부는 지극히 지능적으로 설계한 이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당대 가장 유명한 건축가이자 ‘한국 현대건축의 풍운아’라 불렸던 김수근이다. 건축가의 작업을 그 건물에서 행해진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많지만, 일부에서는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공간배치나 동선 등 건축가의 구상이 그 공간에서 이루어진 일과 관련성이 높다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김치열 내무부장관의 이름으로 발주된 보안분실은 80년대 5층에서 7층으로 증축된 바 있고, 2001년 내부 공간을 변경하는 등 몇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건축가의 의도를 온전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설계된 타워호텔(62년)을 비롯해, 인천상륙작전기념관(82년), 치안본부청사(83년), 서울법원 종합청사(84년), 육사 교훈탑(86년) 등 3공화국부터 5공화국까지 독재자들의 뜻과 관련된 건축을 주로 수행해왔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달라진,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최근에는 이 역사적인 현장을 민주화운동을 탄압해온 역사를 지닌 경찰이 아니라 끊임없이 저항하며 민주화를 만들어온 시민의 품으로 돌려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참고 자료: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_고문으로 얼룩진 오욕을 뒤로 하고 인권센터로 바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그곳을 찾아서_이제 잊어도 되는 ‘추억’일까(6.10민주항쟁의 도화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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