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사 이야기

제자의 발은 씻는 맘으로, 윤영규 2

 

수능입시부정에다 학부모와 교사까지 가담한 성적조작사건 그리고 ‘일진회’가 몰고 온 학원폭력사태에 이르기까지,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탄식이 빈번한 이즈음 전교조 위원장을 지낸 그이는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딸만 일곱을 둔 그이는 ‘달궈진 쇠판 위에서 튀는 콩처럼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해왔던 터라, 아내와 자식들한테 늘 미안하다. 여느 아버지들처럼 마음먹고 용돈을 준 적이 없고 그 흔한 학원 한번 보내지 못했다. 헌데도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해서 대학까지 마치고 다들 심성이 곱게 자랐다. 그이는 언제나 그 점을 고맙게 여긴다. 명색이 교육운동을 한다면서 자식들에게 소홀히 했음은 스스로 돌이켜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이가 감옥에 가고 수배되었을 때, 가장의 빈 자리를 채운 건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 이귀임이었다. 

“남편이 구속된 후 다른 선생님들 면회하랴, 민가협 활동하랴, 동분서주하면서 아이들에게 신경도 쓸 수 없었는데 아이들은 고맙게도 엄마를 이해해 주었고, 아빠를 존경하며 고생을 잘 참아 주었어요. 80년부터 아이들에게 항상 빚을 지고 살아왔지요. 우리가 고난을 받고 살면서는 아이들 옷을 사 입혀 본 적이 없어요. 아는 분들에게서 얻어다 입혔는데도 군소리 한마디 안 하고 맞는 옷을 찾아 입은 아이들을 보면서 말없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윤영규의 자식 사랑은 가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집안 식구라고 해봐야 아홉 명이고, 그 중에 여자가 여덟 명이다. 워낙 없이 키웠기 때문에 사과 하나를 반듯이 네 쪽으로 나눠먹었다. 큰애는 1개를 줄 수도 있지만 자식 수만큼 똑같이 나눠 주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맛나게 사과를 먹었다. 가난이 가르쳐준 ‘나눔의 정신’을 그이는 자식들과 더불어 받들며 살아왔다. 그리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밥을 할 때마다 한 끼에 두 주먹씩 하루에 여섯 주먹을 따로 모은다. ‘좀도리’한 그 쌀을 그이와 아내는 연말이 오면 새벽에 고아원 문 앞에 두고 온다.

최선을 다해서 사람을 대하자

5·18민중항쟁을 겪고 나서 윤영규는 개인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서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인생을 ‘멀리 보고 가는 길’이라 여기고 ‘멀리 보고 가는 사람’이 되자고 자신을 다그쳐 왔다. 시신이라도 남에게 줘야겠다고,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온 그 밑바닥에는 젊은 날의 시련이 깔려 있다.  목포 영흥학교에서 첫 해직을 겪은 뒤였다. 윤영규는 유달원(고아원), 애중원(정신질환자수용소)에서 총무로 일했다.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라고나 할까. 겉만 사회사업이었지 그곳은 개인의 치부 수단에 불과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윤영규는 제대로 된 사회사업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이가 첫 사업대상으로 삼은 것은 섬에서 목포로 모여든 창녀들이었다. ‘아, 이들을 가르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자’ 윤영규는 이 일을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일로 여겼다. 미용, 재봉기술 따위 재활 프로그램을 구상하며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던 그이는 짐작도 못했던 벽에 부닥쳤다. 다른 데도 아닌 전부터 사회사업을 해왔던 이들이 훼방을 놓았다. 오랫동안 기관을 운영하면서 돈과 권력을 누리던 이들에게 젊은 윤영규의 ‘남을 위한 삶’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소외된 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돌려주려던 윤영규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사건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썩어빠진 세상의 속살을 맛본 그이는 인생이 무너지는 듯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윤영규는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서 무엇하냐고, 죽어버리자고 약을 먹었다. 그러나 다행히 사흘 만에 깨어났다. 그러고 나서 윤영규가 생각한 것이 바로 돈을 벌자는 거였다. 그것은 인생을 한 계단씩 밟아가기를 포기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간척사업으로 눈을 돌린 윤영규는 무안군과 함평군을 이으면 엄청난 땅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YWCA 세계본부까지 끌어들였던 그 사업마저도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그때 별명이 부엉이였어요. 단돈 몇 십 원도 없는 놈이 몇 십만 몇 백만 평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들떠 다니니까 친구들이 나를 부엉이라고 불렀어요. 과대망상증에 걸렸다 이거지. 내가 하는 짓거리에 질린 친구들이 차마 부황난 놈이라고는 못하고 봐준답시고 부엉이라는 별명을 붙인 거지.”

인생 칠십을 산 오늘도 윤영규는 그 버릇을 완전히 벗어 던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요즘도 제자들이 와서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그러마한다. 그 때문에 빚을 졌으면서도 오죽했으면 자신한테 왔을까, 온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닻을 올리다

“그 무렵 교사는 국가공무원이기 때문에 노조는 힘들다는 생각을 했지요. 흩어져 있던 젊은 교사들이 가입하면서 전교협은 회원이 10만 명을 넘었어요. 헌데 전교협과 같은 느슨한 형태로는 교육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게 대의원들의 생각이었지요. 헌법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가 있다, 그러니까 교직원노동조합을 하자는 거지. 하지만 나는 반대했어요. 노조는 안 된다, 왜냐하면 노조 만들자마자 깨진다. 4·19 때를 봐라, 그때 노조 만들어가지고 깡그리 감옥가고 사형당하지 않았냐. 그 꼴 당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지금 정부가 아무리 박정희가 죽었다고 해도 전두환과 노태우가 아니냐. 젊은 교사들이 보기에 비겁할지 몰라도 노조는 반대다, 그래도 한다기에 위원장 자리를 사퇴해버렸지요.” 

그이가 물러난 다음에도 교사들은 전국교직원노조 설립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초대 준비위원장은 곧 물러났고 윤영규는 준비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교사들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다.

“못 한다고 한참 입씨름을 하다가 그러면 좋다, 대신 내가 감옥 가마 하고 딱 결정했어요. 위원장 한다는 건 감옥에 간다는 거였으니까. 그때도 노조로 바꾸는 게 너무 빠르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요.”

1989년 5월 28일 오후 2시 연세대 도서관 앞. 산을 타고 들어간 윤영규는 플래카드 두 장이 펼쳐지자 교사와 학생 200여 명 앞에 섰다. 그리고 핸드마이크를 들고 결성 선언문을 부리나케 낭독했다.
‘겨레의 교육성업을 수임 받은 우리 전국의 40만 교직원은 오늘 역사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결성을 선포한다. 오늘의 쾌거는 학생, 학부모와 함께 우리 교직원이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며 참교육운동을 더욱 뜨겁게 전개해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민족과 역사 앞에 밝히는 것이다.’ 이어서 부위원장이 ‘교직원 노조 사수하자, 전교조 합법화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역사적인 전교조 결성식은 10분 만에 막을 내렸다. 

“파탄에 빠진 이 나라 교육과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려야한다는 비장한 각오였어요. 교육의 자주성과 정치적 독립성을 되찾고 올바른 민주시민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교육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지요. 그것이 전교조 결성 당시 참여 교사들의 초발심이었어요.”



수배와 감옥생활

전교조를 만든 윤영규는 공무원법 위반, 간행물법 위반, 모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감옥 안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들어온 동지들을 숱하게 만났지만 그이는 한 명의 살인자를 잊지 못한다. 독방에 있던 그이가 제자로 삼은 이는 ‘서진 룸살롱 회칼 살인사건’의 주범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죄수는 놀랍게도 그이가 교사로 있던 광주 체육고교를 다닌 적이 있었다. 비록 감옥이지만 교사 윤영규는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다 

“한때 체육고의 레슬링 부원으로 국가대표까지 오른 학생이 사람을 찔러 죽인 죄인이 되었다는 현실이 참 안타까웠지요. 어쩌다가 폭력집단에 몸을 담아, 처형만 기다리는 사형수가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지요.” 

윤영규는 교도관실 옆에 붙은 예비실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실을 마련했다. 살인자인 제자가 책을 읽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표시해오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는 수업이었다. 3개월이 지나자 회칼로 사람을 찌른 죄인은 세상의 진리에 눈을 떠갔고, 감옥생활에도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감옥 안 그 교실에서의 수업은 어느 날 새벽,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끝을 맺었다. 

1991년에 윤영규는 ‘강경대열사장례대책회의’와 관련하여 지명수배가 되었다. 도망 다니는 게 무섭다는 걸 잘 알고 있던 그는 자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전교조 위원장이 잡혀갈 수는 없다며 무작정 도망 다니기를 바랐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로 1년 4개월 동안 도망 다녔지요. 나 하나를 숨겨주려고 전교조 전 조직이 동원됐어요. 수배 중인 나에겐 1계급 특진에다 천만 원 현상금까지 붙었으니까. 그때 나를 보호하는 데 쓴 암호가 컴퓨터였어요. 말하자면 광주에서 강릉으로 컴퓨터 보냅니다, 이런 식으로 숨어 다녔지요. 한번은 해수욕장에서 막 옷을 벗고 바다에 들어가려다가 ‘어이구, 신문에서 보니까 날마다 잡는다고 난리던데, 여기서 놀고 계시냐구.’ 누군가 알아봐서 냅다 산으로 도망갔지요.” 

서울에서 아파트에 숨어있던 윤영규는 6개월 만에 쓰러졌고 몰래 올라온 아내의 도움으로 무안에 있는 중증질환자 수용소에 숨어 들어갔다.
1992년 5월 31일 전교조 3주년 기념대회가 여의도 한강변에서 열렸다. 윤영규는 직접 참석하지는 못하고 녹음된 인사말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조합원들은 그이의 육성을 들으며 다들 눈물을 흘렸다. 

“사실 그 순간, 나 역시 행사장에서 백 미터쯤 떨어진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 안에서 홀로 앉아 있었어요. 동지들과 함께했던 3년 여를 돌이켜보니 한없이 눈물이 흐르지 뭡니까.”

 



전교조는 피로 맺은 조직이다

“시인이기도 했던 고 정영상 선생의 장례식이었어요. 어느 노인 한분이 계속 따라 다녔지요. 그래서 저분이 누군가 하고 궁금했는데, 현직 초등학교 교장인 정 선생의 장인이라더군요. 장례를 치르고 고인의 부인인 박원경 선생하고 인사를 했는데 자리를 피했던 아버지가 발인 날 오더니, ‘원경아 미안하다. 사위가 살아 있을 때 돕지 못한 게 평생 한이 되는구나.’ 사위란 놈이 전교조하고 술 먹고 해서 싫어했는데, 장례식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는 거예요. 네 남편은 훌륭한 사람이다 하시더니 ‘전교조는 피로 맺은 조직이다, 그 전교조를 탈퇴하라고 한 것 정말 잘못했다, 이제야 정 서방이 왜 전교조에 미쳐서 다녔는지 알겠다.’고 했다지 뭡니까.” 

윤영규는 정영상 선생의 장인이 한 ‘피’라는 말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교육운동에 뛰어들고 나서 그이는 많은 동지들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 고통을 그이는 두 눈을 감는 날까지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1986년 충남 서산시 서면중학교 이순덕 선생은 용공교사로 몰리는 시련을 겪다가 약혼자의 품에서 운명했다.조합원 동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배낭을 메고 수백 리 길을 쫓아다니다가 쓰러진 배주영 교사의 죽음을 안양교도소에서 들은 그이는 몇 시간 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소명여중에서 병마로 숨을 거둔 오원석 선생은 최초로 ‘전교조 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거듭하다가 위궤양을 얻어 출소했던 신용길 선생은 위암으로 쓰러졌다. 죽음이 다가오자 신 선생은 존경하던 문익환 목사를 뵙기를 바랐다. 병문안 간 문 목사가 서너 시간 기를 쏟아 부었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서울지부의 임희진, 이기주 선생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수배 중이어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터라 윤영규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오송회 사건의 이광웅 선생, 전교조가 합법화도 안 된 상태에서 복직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갈등하다 아파트에서 몸을 던진 길옥화 선생, 신부전증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뜬 정영부 선생은 ‘전교조 일에 매진했기에 기쁘게 죽을 수 있다.’고 해서 동지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했다.
그렇게 전교조 선생들 23명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윤영규는 몸과 마음이 극도로 나빠졌다. 장례위원장 노릇을 며칠에 한번 꼴로 해내자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인생 말년에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그이는 장학금을 모으기로 했고 다달이 저축을 한다. 

그는 전교조에 무엇을 바랄까
“교사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지요.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상식인의 기본자세를 갖추는 게 교사의 자세입니다. 교육운동을 하는 교사들이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교사 스스로 완성체를 향하는 마음가짐이 우선 돼야지요. 교원노조가 교사위주 운동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학생과 학부모들이 목소리를 못 내요. 부디 사람 냄새나는 참다움을 추구하는 진지한 자세를 보이는 조직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윤 영 규 >

1935년 광주광역시 남구 금동에서 출생
1960년 4·19 당시 한국신학대학 대표 4·19 수습위원
1961년 한국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1967년 광주상고 교사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조사 받고 해임
1977년 광주 YMCA 청소년지도자협의회 창립 주도 후 의장
1978년 양서협동조합(독서클럽) 이사로 참여
1980년 5·18항쟁 수습위원으로 활동하여 내란죄,
소요죄로 실형 7개월
1982년 전국 YMCA 교사협의회 창립 참여
1983년 나주중학교 교사
1986년 5·10 교육민주화선언 주도
1987년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 초대 회장
1988년 전국교사협의회 2대 회장, 광주체육고 교사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위원장, 파면 후 구속
1990년 민주쟁취국민연합 공동의장
1991년 강경대열사 대책회의 상임공동의장, 수배
1992년 범민련 남측본부 수석부위원장
1993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창립 주도
1994년 5·18진상 규명 및 국민정신계승국민위원회
1998년 전교조 합법화로 광주충장중학교로 복직
1999년 광주충장중학교 정년 퇴임
2000년 (재)5·18기념재단 이사장
2001년 동아시아 평화·인권한국위원회 공동의장
2005년 전교조 자문위원



글 / 윤동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벽길」 발표
2003년 평전 『윤상원』 발간
2004년 단편 「바람 속의 거미집」을 『문학과 경계』
여름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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