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사 이야기

신부님, 우리 신부님, 김승훈 2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는 3·1절 57주년 기념 미사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사제단 신부들이 공동 집전한 이 날 미사의 분위기는 여느 때처럼 경건하고 장중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에 참석한 공화당 국회의장 서리 이효상은 잠시 장내를 둘러보았다. 신자석에 앉은 700여 명의 사람들 중에는 더러 개신교 신자, 비신자도 섞여 있었지만, 3·1절의 역사적 의미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인 명동성당의 위치를 돌아볼 때 이해하지 못할 풍경은 아니었다.

김승훈의 강론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효상은 이 미사에 대해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강론대에 선 김승훈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앞둔 1975년 2월 3일 공개서한을 통해 자신과 같은 가톨릭 정치가들의 반성을 촉구한 맹랑한 신부였으나, 그의 입에서 ‘긴급조치 9호 철폐’, ‘유신정권 종식’과 같은 대담한 발언이 터져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승훈의 강론은 모든 이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었고, 함석헌·김대중·문동환 등 각계 지도자들이 민주구국선언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핵심, 바로 그것이었다. 함세웅을 비롯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후배 사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신부 투사

“그냥 편안하게 원론적인 얘기를 해 주시겠거니 했는데 유신헌법의 부당성, 구속자 석방, 언론의 허구성, 교회의 시대적 사명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해 주셨어요. 놀라운 것은 이 강론이 2부 순서의 문동환 목사님 설교나, 이우정 교수가 읽은 선언문의 내용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 맞아떨어졌다는 거예요. 너무 기쁘고 놀라웠죠. 아유, 신부님 진작 모실 걸 그랬구나…….”(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제기동 성당 주임신부)

신·구교 합동으로 이루어진 3·1절 기념 미사는 별다른 마찰 없이 조용히 끝났다. 구겨진 휴지처럼 앉아 있던 이효상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미사’라는 가장 종교적이고 온화한 형식에 담긴 이 날의 구국선언은 당국의 구미에는 맞지 않았겠지만 3·1절이나 광복절이면 으레 나오는 종교계의 시국선언쯤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서명자 명단에 김대중이 끼여 있는 것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명동 사건’은 졸지에 종교의 자유를 악용한 종교계와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음모’로 비화되었다. 함석헌, 김대중, 문동환 등 선언문에 서명한 10명과 문익환, 이해동, 이태영,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김승훈 등 관련자들이 줄줄이 정보부에 끌려갔다. 이들 중 11명이 구속 기소되었고, 김승훈을 포함한 7명은 직접 가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동생 김승겸에 의하면, 당시 김승훈의 어머니는 관계 요로에 있는 지인들에게 아들의 선처를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김승훈의 불구속은 결과적으로 당사자와 사제단 모두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김승훈은 사제단의 최연장자 신현봉과 실질적 리더 함세웅의 구속으로 생긴 지도력의 공백을 메울 적임자였다. 그때까지 사제단 활동의 지지자요 참여자에 불과했던 김승훈은 자연스럽게 사제단 맨 앞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당시 상황에서 사제단 맨 앞자리는 곧 운동의 맨 앞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이로써 사제단은 역량 있는 또 한 명의 ‘신부 투사’를 맞아들이게 된 셈이었다.
김승훈은 각종 시국기도회를 개최하고 구속자 석방을 위해 애쓰는 한편, 법정에서 김대중이나 개신교 인사들과 함께 재판을 받으면서 종교·재야·정치권 인사들과 교분을 쌓아 나갔다. 그는 자신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겸허하고 여유롭게 받아들였다. ‘괜찮아. 다 하느님이 하신 건데 뭐.’, ‘하느님께서 다 해 주실 거야.’라며 보수적인 교구와 정부의 압력에 의기소침해진 젊은 신부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권위적이며 ‘뚝뚝한’ 성격, 투박한 말투의 위력은 특히 정보부 기관원들을 대할 때 유감없이 발휘됐다.

후배 사제들은 기꺼이 사제단의 ‘얼굴 마담’이자 ‘방패막이’가 돼 준 그를 종종 ‘단장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러면 그는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몰라. 후배 사제들이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이야!”

청동 같은 진정

과묵, 눌변. 그러나 청동 같은 진정
거리에서 미사 제단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돌아서면 어머니였습니다.
가죽으로는 오만불손인데 속살은 온통 낮고
낮은 연민의 울림으로 내내 떨리고 있었습니다
.

2003년 김승훈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시인 고은이 지어 바친 추모시의 일부다. 이처럼 적절히 한 사람의 핵심을 묘파해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과묵, 눌변. 그러나 청동 같은 진정. 과연 그러하였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아니다, 저건 거짓이다!’라고 얘기할 수 없었던 시대에 김승훈은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누군가는 ‘아니오.’,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바로 교회가 그것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예수님이 오신 이 세상은, 그 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우리가 그 속 깊숙이 들어가 변화시켜 나가야 할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을 때 공개수배 된 문부식·김은숙을 원주 교구에서 숨겨 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가톨릭교회 전체가 수세에 몰린 적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천주교가 종교를 앞세워 좌경분자를 숨겨주고 불순활동을 방조한다.’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가톨릭교회는 ‘교회법에 따라 범죄 혐의자라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언제나 도와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맞섰지만, 어용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보도에 따라 사회 여론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을 뒤집고 당시 운동권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반미운동을 두둔하고 나선 것이 바로 김승훈이 위원장으로 있던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였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교회 이름을 내걸고 반미운동을 지지하고 나선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그때 사회선교협의회 총무였던 나도 조사를 받았는데 전부 빨갱이로 몰아갔거든. 그때 ‘반미라고 해서 무조건 터부시하거나 빨갱이로 몰아서는 안 된다, 애국적인 차원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한 행위였다, 이번 기회에 미국의 행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성명서를 내고 여론의 역풍을 막은 장본인이 김승훈 신부님이세요.”(이창복, 열린우리당 강원도당위원장)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모미사에서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쓰러지며 죽었다.”는 공안 당국의 발표가 거짓이었음을 만천하에 폭로하여 6월항쟁의 불씨를 던진 이도 김승훈이었다. 물론 이 사건엔 이부영, 김정남, 전병용 등 숨은 공헌자들이 많다. 87년 2월경, 5·3인천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이부영의 옆방에 박종철을 죽였다는 두 경관이 들어왔다.
이 경관들을 통해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 고위층의 치밀한 각본으로 은폐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부영은 이 내용을 화장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서 밖으로 내보냈다. 전직 교도관으로 수배 중이었던 전병용은 이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하였고, 역시 수배 중이었던 김정남은 우여곡절 끝에 이것을 사제단에 전달했다.

김승훈 외에도 이 엄청난 사건의 진상을 전해들은 이는 많았다. 누군가는 이를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누가 할 것인가.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이 일이 김영삼에게 전해진 후, 신민당 국회의원들이 3, 4월경 국회에서 발표하기로 한 적도 있었다.
“겁이 나니까 안 한 거야. 면책 특권 가진 국회의원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한테 왔길래 황연철 변호사하고 유현석 변호사하고 검토를 했는데 나도 좀 부담이 되잖아.
근데 마침 김수환 추기경이 무모한 짓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혁당 사건 못 봤냐 이거야, 전두환 정권이 조한경·강진규 같이 먼저 구속된 형사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거지. 핑계 김에 잘 된 거야. 나도 힘든데 뭐 목숨 걸고 할 필요 있냐…….”(함세웅)

그러나 김정남은 당시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을 통해 다시 함세웅에게 절절한 편지를 보내왔다. ‘이 정권이 망하느냐 민주화를 이룩하느냐가 신부님들한테 달려 있습니다…….’ 함세웅은 고민 끝에 김승훈에게 그 편지를 내보였고, 김승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영구의 부인은 김승훈의 폭로가 있었던 5·18 추모미사의 광경을 이렇게 전했다.
‘김승훈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면서 예를 올리는데 어찌나 경건한지 장백의가 넘쳐 머리 위로 흐르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절을 하더라. 마침내 신부님들이 해냈다.’(김정남,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신부님, 우리 신부님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 겁에 질린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는 시대에 김승훈이 보인 용기는 ‘눌림 받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응답’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 그러나 누군가 간절히 원하는 일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사랑이요 실천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김승훈이 누구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반대로, 김승훈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얘기도 들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사랑은 지극하고도 은근해서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깜짝 놀랐던 게, 김 신부님이 돌아가시니까 신부님한테 도움 받았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더라고.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간에. 나도 서명이다 후원이다 수없이 도움을 받았죠. 특히, 70년대 노동자들이 집회 한번 하려면 장소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내가 가톨릭 노동청년회 전국회장이어서 가끔 성당을 집회 장소로 이용했는데, 빌려주는 신부님이 많지 않았죠. 성당을 내주면 왜 빌려줬냐고, 정보부나 경찰에서 얼마나 신부님을 괴롭히는지 몰라. 평신도 간부들 부추겨서 신부님한테 싫은 소리 하게 하고. 김 신부님은 ‘노동자들 위해서 장소를 내주는 게 좋은 일 아니냐.’하고 반대를 물리치며 아주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셨어요.”(이창복)

70년대 중후반부터 80년대까지 인천의 동일방직, 남영나일론, 태광산업, 한양섬유, 청계피복, 한국모방(원풍모방) 등의 노동자들은 집회만 열었다 하면 김승훈의 성당을 이용했다. 심지어 데모하다 쫓겨 다닐 때나, 인쇄물 제작비용이 없을 때도 김승훈을 찾아왔고, 서명이나 지지 성명 발표 등 사회적으로 유명한 누군가가 필요할 때도 제일 먼저 김승훈을 떠올렸다. 이 사정은 재야인사들이나 단체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이상하게도 그는 가난한 이들이 다니는 성당만 골라 다녔다. 신림동 성당이 그랬고, 동대문 성당이 그랬으며, 홍제동·왕십리 성당이 그러했다. 유일하게 부잣집 신도들이 많았던 여의도 성당에서는 사목위원들의 반발로 채 2년도 버티지 못하고 시흥동 성당으로 쫓겨 왔다. 그래도 사람들은 김승훈을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라 부르며, 동대문으로 왕십리로 줄기차게 그를 따라다녔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유복하고 기름질 까닭이 없었다.

“74년경 신림동 성당에 계실 때 처음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사제관이 너무 추운 거야. 왜 이렇게 춥게 지내시냐고 했더니 가난한 교회에 왔는데 내가 어떻게 여유 있게 살 수 있냐고 그러시는 거예요. 가슴이 울컥 했죠.”(이창복)

“신부님들은 미사 예물이라는 걸 받으니까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죠. 근데 항상 수중에 돈이 없었어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니 남아나질 않는 거지. 돌아가시고 보니까 누구 보증 서 준 서류만 있고 아무것도 없더라고.”(동생 김승겸)
“74년경 신림동 성당에 계실 때 처음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사제관이 너무 추운 거야. 왜 이렇게 춥게 지내시냐고 했더니 가난한 교회에 왔는데 내가 어떻게 여유 있게 살 수 있냐고 그러시는 거예요. 가슴이 울컥 했죠.”(이창복)

물론 다른 한쪽에서는 김승훈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정치적 성향과 신부로서의 권위의식, 종교운동의 한계, 그리고 3·1민주구국선언 당시부터 이어져 온 정치권 인사들과의 친분은 그의 활동 방식을 좀 더 정치적이고 타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투쟁보다는 협상을 선호했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적대적인) 정부와도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그는 ‘거물급 재야인사’, ‘정치하는 신부’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88년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하다 출소한 안재구는 한 지면에서 이런 증언을 했다.

‘내보내려고 하니까 자기들이 뭔가 항복을 받았다는 것을 하나 만들어야 하겠는데…… (중략) …… 형을 다 살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분질러가지고 무기를 8년 살리고 내보내야 할 판이니까 반성문이든지 뭐든지 해야겠고 철저히 받으려고 하지. 그러나 나는 못 주겠다고 하도 버티니까 김승훈 신부를 보냈드만. “안 교수, 전향서가 아무것도 아닌데 써 내죠?” 하는 거야.’(김동춘,『분단과 한국사회』)
이창복은 이것을 성직자로서의 철학으로 해석한다.

“사제로서의 철학, 소신이었다고 봐요.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한 게 인권이다, 그 사람의 인권이 이데올로기에 묶여 구속된 상태로 놔두는 게 옳지 않다고 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교도소를 찾아다니면서 양심수들에게 전향을 권고하셨어요. ‘관을 너무 대변하시는 거 아니냐.’는 비판도 물론 있었죠. 그러나 신부님이 관을 대변해야 할 아쉬움은 없잖아. 정치신부란 것도 그래요. 사실 87년 대선 당시 신부님이 후보 단일화를 위한 김대중 후보 지지 성명을 발표한 것도 저하고 몇몇이 강권한 것이거든요. 처음엔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신부로서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거든요. 결국 단일화는 단일화대로 못하고, 신부님은 정치신부 되고, 저는 죽일 놈 됐죠.”

김승훈과 함께 거리에서 늙어 간 사람들은 마땅히 그가 주교가 되는 날을 꿈꿨다. 하지만 그는 종종 지인들에게 명동성당의 주임을 해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한국의 신부라면 한번쯤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명동성당의 주임신부가 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김승훈은 주교도, 명동성당의 주임도 되지 못하고 훌훌 세상을 떠났다. 많은 노동자들과 학생, 재야인사들의 마음에 김승훈이라는 이름의 ‘작은 명동성당’ 한 채 남겨놓고는. 

 


<김 승 훈>
1939년 7월 6일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출생
1953년 8월 ‘마티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음
1962년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졸업
1962년 12월 21일 사제서품
1962년 12월 22일 신당동성당 보좌신부
1964년 2월 서울 성신고등학교 라틴어 교사
1965년 ~ 66년 혜화동성당·아현동성당 보좌신부를 지냄
1966년 ~ 96년 동두천·신림동·동대문·홍제동·왕십리·
여의도동·시흥동성당 주임신부를 지냄
1976년 ~ 89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미사에서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강론으로 고초를 당함. 이후 방림방적·동일방직·청계피복노조 등 7, 80년대 노동자·민중 투쟁 지원
1979년 ~ 80년 YWCA위장결혼식 사건,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등 각종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
1987년 5월 18일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6월항쟁의 도화선을 당김
1987년 ~ 2003년 박종철기념사업회 회장, 김재규장군명예회복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최종길교수고문치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 민주개혁국민연합 감사, 노동일보 종교계 담당이사 등을 지냄
2003년 9월 2일 지병인 간암으로 선종
노동·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모란장 추서. 저서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회고록, 1999) 



사진제공 / 박용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글 /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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