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사 이야기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2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2

  유영모 선생의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선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1960년대에 함석은 서구의 퀘이커, 한국의 민중신학, 그리고 <사상계>를 통해 삶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기존의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었던 함석헌이 300년 역사를 가진 종교조직 퀘이커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59년 2월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던 퀘이커 예배 모임이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 보다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 힘이 모아져야 한다는데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노예 제도 반대 운동, 여성 참정권 주창 등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무교회주의였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퀘이커를 ‘양심의 소리’, ‘속의 소리’, ‘속의 빛’ 이며, 이 양심의 소리는 곧 ‘하나님의 소리’이자 ‘역사의 소리’라고 했다. 함석헌은 퀘이커가 ‘새로운 종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크게 기독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생각했다.
 
  퀘이커에 참여
  퀘이커는 비국교도 전통에 속하는 기독교의 한 종파다. 비국교와 국가 종교는 상당히 성격을 달리한다. 국가 종교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화합을 도모하고 국가의 정책에 타협하며 보조를 맞추고 따라간다. 일찍이 기독교가 313년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채택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통치권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를 이용했으며, 함석헌은 이때부터 기독교가 잘못되고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기독교 지도자가 통치자의 반열에 서서 박해하는 종교로 변질 되었으며, 영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가 되었고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 정책을 선도하거나 묵인하는 그런 종교가 되었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국가 종교 대신에 영국의 비국교 퀘이커에서 그가 희망하는 것들을 조금은 보았기에 참여하며 이렇게 말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 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퀘이커와 달리 일반 동양의 전통 사상에서는 전체를 위한 참여정신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어떤 종교나 사상도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되려면 공적인 증언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공적인 증언은 산골짜기에서의 조용한 명상이 아닌 현실 참여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했다. 함석헌은 그런 자신을 외딴 들판의 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유랑(流浪)을 계속하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1976년에 함석헌이 구금당했을 때, 영국의 퀘이커들은 이 사건에 참여하여 체포된 8명의 한국인들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했다. 또한 세계퀘이커협의회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어 그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석방해줄 것을 촉구하였고, 주한 영국대사관에 함석헌을 비폭력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언급한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 포드 대통령에게도 서면을 보내어 남한의 인권 상황을 알리며 박 대통령을 위한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비폭력평화주의로 독재에 맞서
  함석헌은 비폭력 국민운동으로 독재자를 물리칠 것을 강조하였다. 대중강연을 통해 그는 5․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독재 정권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지적하였다. 박정희는 일본 군대가 길러낸 인물로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일본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특등 일본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고 나중에 만주에서의 일본군 시절에 쓰던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였다.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본 군인이었다. 이런 그가 정권을 강탈했을 때에 함석헌은 비폭력평화주의로 맞섰다.
  1970년대를 맞았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또 하나의 암울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반공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박정희는 한국 민중들을 더 욱 탄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월 19일에 함석헌은 월간지인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다. 박정희는 이 창간호가 나오자마자 폐간시킨다. 그러나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리함으로써 <씨알의 소리>는 부활한다. 1972년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시키고 유례 없는 1인 독재체제를 완성하였다. 이른바 유신체제의 시작이었다.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한 1975년 4월 9일에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을 당했다. 이런 식으로 펼쳐진 박정희 공포정치는 1979년 10월 26일 그의 심복에게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유교를 정권유지의 도구로 악용할 때 함석헌은 여기에 맞서 노장사상을 강조한다. 1971년부터 1988년 5월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노자]와 [장자]를 주제로 공개강좌를 진행하였다. 박정희가 유교의 충효사상으로 국민들을 탄압할 때, 함석헌은 노장의 자유정신과 초월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끝없이 독재자와 맞서며 꺼져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그는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74년 한 해 동안에 1,000명 이상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정치적 이유로 체포 되었다. 그 중 180명은 투옥되었고 몇 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에 장준하는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5년 징역을 선고받고 몇 달 후에 석방 되지만 곧 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함석헌은 싸우는 평화주의자였다. 1978년 5월 8일 그가 광주에서 민주화를 위한 공개 강연에 열중하고 있을 때, 61년을 함께 살았던 그의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아내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함석헌은 아내가 죽었어도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도 없이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함석헌의 신념이 무기력해진 전두환 군사독재
  1980년 군사독재 연장에 반대하는 광주시민을 학살하며 정권을 찬탈하고 무고한 양민을 폭도로 좌경분자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며 폭압의 전두환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함석헌의 무저항비폭력주의는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무장투쟁까지 해야 한다는 과격한 논리에 함석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함석헌은 80대의 고령이 되었다. 함석헌의 신념이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제멋대로 정권의 폭력을 휘두르던 전두환은 1987년 종말을 맞이했다. 파출소가 불타고 경찰들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난국을 수습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전두환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세력이 염원하던 역사적인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12월 16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당 후보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대적했던 전두환 후계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함석헌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어떤 누구에게도 표를 던지지 않고 기권했다.
  함석헌은 국무위원들에 의해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의 지도자로 선정 되었다. 1988년 10월 함석헌은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 서울평화올림픽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서울평화올림픽은 세계 평화를 선언했고 함석헌을 포함한 600명의 소위 세계 민간지도자, 세계 정치지도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이 이 선언서에 서명했다. 이 일에 참여한 함석헌은 재야와 운동권으로부터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를 했다며 심한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함석헌과 친밀했던 인사들도 비난을 함께 하였다. 그의 나이 89세였다. 기독교 사상가로서 타 종교를 향한 인도적 관용성, 포용성은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 역사는 언젠가 그의 삶을 다시 조명할 것이다. 1989년 2월 4일 고난에 차고 뜨겁게 타오르던 활화산이 꺼져들었다. 고난과 고통의 삶의 여정을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 위에 겨울의 찬 바람이 불었다. 그날을 정진동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말년에 진보진영으로부터 비판받아
 “사회장으로 진행된 함석헌의 장례식에 재야운동권은 무심했고, 국무총리가 지원했다. 장례식 때 부조가 들어왔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의 그의 활동으로 인해 비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장례식에 재야의 참석이 적었다. 그러나 그분은 위대한 인생을 사셨다. 함석헌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사람이 아플 때 그냥 앉아 있는 분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 주저하지 않고 언제 어느 곳이나 찾아가는 분이었다. 자기 소신을 지키며 사셨다. 이런 시대에 그의 희생이 따르지 않았다면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함석헌이 남긴 씨알사상에 의하면 인간이란 주체적 개체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근원적으로 자연과 우주의 모든 생명 및 존재하는 것들과 공생하는 존재이다. 자연과 이웃 생명체들은 돌볼 가치가 있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곧 자기 몸의 초월적 실천이요,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생명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씨알의 사상은 곧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초월의 자유를 함께 느낀다고 하는 것이다. 함석헌은 한국의 근대적 모순을 바로 잡고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는데 헌신하였다. 동시대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부딪쳐 한 가닥 희망을 찾아냈다. 함석헌의 생애가 무엇을 남겼는지 그것은 역사가 증언할 것이고 그가 남긴 유산의 하나인 씨알의 사상은 영원히 민중들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활화산이 될 것이다.
  함석헌으로 인해서 기독교를 탈기독교적 입장에서 재 고찰하게 되었고 씨알사상은 민중과 민중 신학을 발견하게 하였으며 비폭력 무저항의 정신은 예수의 삶을 바로 알도록 하였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길을 갔던 그에게 <사상계>는 ‘월남 언론상’을 주었으며, 1979년과 1985년에 미국의 퀘이커가 그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노자와 예수가 가졌던 삶의 좌우명이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는데 적절한 듯하다.

 

*함석헌
1901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남
1919년 3.1운동에 참가
1921년 오산학교 입학 이승훈, 유영모 등을 만남
1923년 동경유학 첫 동경대지진 첫 감옥생활
1924년 우치무라 무교회 모임 참석
1928년 오산학교 역사 교사가 됨, [성서조선]참여
1933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씀
1945년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수감됨
1947년 월남
1948년 대중을 상대로 YWCA 강당에서 성경공부 시작
1950년 피난지에서도 성경공부 계속
1956년 (50세) 사상계 집필 시작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57년 씨알농장 창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가문제가 되어 수감 됨, 간디 공부 모임 창설
1961년 퀘이커 모임에 참석. ‘뜻으로 본 한국역사’
1963년 반독재 민주화운동 전개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단식투쟁
1967년 장준하를 위해 캠페인지지
1970년 (70세) 유신헌법하에 [씨알의 소리 창간]
1971년 [노자]공부 모임,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참여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퀘이커리즘 공부 모임 창설.
1974년 민주회복국민협의회 창설
1976년 3.1구국 선언 사건으로 수감
1977년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인권을 위한 협의회 창설.
1978년 반정부 시위 확산, 부인 황득순 별세.
1979년 YMCA 위장 결혼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수감. 노벨상 후보로 추천.
1980년 전두환 정권, 5.18민중항쟁, [씨알의 소리]폐간 됨.
1984년 남강문화재단 설립.
1985년 노벨상 후보로 추천.
1987년 암으로 입원, 인촌 언론상 수상.
1988년 서울평화올림픽위원장으로 추대. [씨알의 소리]복간
1989년 (89세) 별세


글_김창규
1954년 충북 보은 출생
시인, 목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시집으로 <푸른벌판>, <그대 진달래꽃 가슴 속 깊이 물들면>, <슬픔을 감추고>

사진도움_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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