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사 이야기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3

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3


이제 어느덧 조금씩 타성이 붙어가는 듯하다. 묶여 온 사람들을 바라보는 전율도 이젠 점차로 각질화되어 일상의 무감동에 조금씩 조금씩 압도되어간다. 나로서는 권력을 향유하는 최초의 체험이며… 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체험이 될지도. 그러므로 이처럼 기이하게 주어진 넉 달의 기회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맑고 신선한 숨결로 부딪쳐 나아가 최선의 것을 이루어내어야 한다고 마음먹고는 있다.
-1981년 12월 검찰청 사법관 시보 시절의 일기

조영래가 실정법의 사슬을 내던지고 다시 세상의 양지로 나온 것은 1980년 1월, 박정희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직후였다. 그해 2월, 수배시절을 함께 한 이옥경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그는 곧바로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하고 변호사 개업을 함으로써 양명한 합법공간에서 정면승부를 펼칠 채비를 갖췄다. 그가 선택한 투쟁의 무기는 ‘법’이었다. 그가 새로 속하게 된 장에서 정의가 법의 궁극적 지향점이어야 한다는 사실만큼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광주를 제물로 등장한 살인정권의 적나라한 힘의 통치하에서, 법을 정의와 관련시키는 관점은 현실을 모르는(혹은 현실을 우롱하는) 순진한 이상주의라는 비난을 받음직한 일이었다. 그는 물론 이상주의자였다. 새날을 꿈꾸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가슴에 품었던 이상보다 훨씬 더 낙관적인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이상에서 비롯된 그의 삶과 투쟁이 저 암흑과 같은 70년대적 상황 속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상이 타고난 낙천적 기질과 현실적 감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영래가 자유인이라면 그 자유는 그의 내부에서 수시로 이루어졌던 현실과 이상의 치열한 대립의 결과일 터였다. 그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 혹은 이룰 수 있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의 왕성한 실천력도 거기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발휘되었다.
시인 김지하는 《월간중앙》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80년대 초 조영래의 고민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80년에서 8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어느 날, 그를 만나 같이 밥을 먹으면서 장시간 얘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이전에는 노동자․농민 중심의 각 계층의 통일전선이 우리가 운동을 바라보는 틀이었는데 그 틀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로되, 그 틀을 보는 눈이나 다루는 방식에서 창조적인 방식이 요구된다는 얘기들을 했다. 사회과학 공부를 해서 사회를 보는 데 있어서 사회과학의 방법론이나 분석틀을 빌릴 수는 있지만 80년대로 접어든 사회변동은 기존의 틀로는 논의하기 힘든 복잡한 내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틀을 한 마디로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우리는 다양한 색깔로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롭고 폭넓은 틀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는 서로 공감했다.

당시 조영래가 고민했던 ‘새롭고 폭넓은 틀’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의 몸이 이상보다는 좀더 현실 쪽으로 기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그것은 변혁운동에 매진해 온 그가 변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순간부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망원동 수재민 사건 승소 
1984년 젊은 변호사들과 함께 ‘시민공익법률상담소’란 간판을 올린 조영래는 변호사로서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다. 제일 먼저 그는 망원동 수재민들의 집단소송을 맡아 3년간의 끈질긴 법정공방 끝에 승소함으로써 조영래라는 이름을 세간에 널리 알렸다. 1984년 9월의 대홍수로 서울 마포구 망원동 일대 5천여 가구가 물에 잠기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자, 분노한 주민들은 서울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벌였다. 그건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처럼 결말이 뻔히 내다보이는 싸움이었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할 이 싸움에 무보수로 개입한 사람이 조영래였다. 그는 일방적으로 서울시의 손을 들어주는 사법부와 정부당국, 언론기관에 맞서 3년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망원동 수재가 ‘천재’가 아니라 ‘인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토목학, 수리역학, 수문학, 콘크리트기술 등에 관한 엄청난 양의 서적을 섭렵하였고, 서울시가 증인으로 채택한 공학자를 집요하고 끈질기게 몰아붙인 끝에 마침내 망원동이 물에 잠긴 것은 배수갑문의 설계 잘못 때문이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실로 조영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뚝심이었다.
그 외에도 변호사로서의 그의 진가를 보여준 예는 많다. ‘여성의 정년은 25세’라는 1심 재판부의 판결에 분노한 나머지 항소를 망설이는 피해자를 설득하여 2심에서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라는 판결을 얻어 낸 이경숙 사건을 필두로, 1985년 대우 어패럴 사건,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1987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 소송, 월간 《말》 지의 보도지침 사건 등 80년대 굵직굵직한 사건의 중심에는 늘 조영래가 있었다.
그러나 인권변호사로서 새 장을 열어젖힌 조영래의 창조적이고 탁월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사건은 역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었다.
 
8.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눈물 없이는 상기할 수 없는 ‘권양의 투쟁’― 저 처참하고 쓰라린, 그러면서도 더없이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성에의 투쟁에 대하여, 그리하여 마침내 다가올 ‘권양의 승리’, 우리 모두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로 시작되는 『전태일 평전』의 첫 구절을 연상시키는 이 글은 조영래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론 요지의 한 대목이다. 전태일 평전이 그랬듯이, 한 사람의 생애를 깊은 이해와 통찰과 연민으로 묘파하는 순간의 조영래는 이제 막 그의 내부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사무쳐 보인다. 그것은 운동과 직업과 한 개인의 모든 의무와 역할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후보 시절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조영래를 꼽으며, ‘조 변호사는 약자에 대한 애정과 사회정의를 위한 마음이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고 토로한 바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그는 변호사 아홉 명의 이름으로 고문경찰을 고발하였고, 문귀동에 대한 인천지검의 수사 결과가 기소유예로 나오자 변호인단 명의의 기자회견을 열어 ‘장외’의 맹공을 펼쳤으며,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하여 권인숙에게 보내는 위로 편지를 받아내 여론을 선점하는 등 변호인단 1백 66명의 최선두에서 빼어난 지략을 구사했다.
‘권인숙과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는 검찰 쪽 주장을 앵무새처럼 주워섬기던 언론이 성고문의 실상을 밝힌 고발장을 외면하자 조영래는 손수 30만 부를 복사하여 사방에 배포하였다. 검찰의 허위 발표와 서울고등법원의 재정신청 기각, 권인숙에 대한 실형 선고, 항소 기각 등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난관을 헤치고, 그는 마침내 문귀동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놓고야 말았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즐겨 찾아가는 조영래의 버릇은 변호사 시절에도 변함이 없었다. 활동이 너무 없어 법무부로부터 인권활동 활성화 방안을 제시하라는 굴욕적인 권고까지 들었던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는 조영래를 맞아들임으로써 5공 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 해마다 인권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그것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게 됐다. 또 1988년에는 ‘법’을 수단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조직적으로 동참하기 위해 이돈명, 한승헌, 황인철, 이상수, 박원순 등 선후배 변호사들과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만들었다.
개별적인 재판이든 변호사 사회를 활성화시키는 일이든, 그의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활동에는 독보적인 데가 있었다. 그것은 세속적인 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합리성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기존의 것을 일단 고집하고 보는 보수성, 일정한 관념의 틀에 지배받는 도식적인 사고방식이 없었다. 사람과 세계가 가지고 있는 복잡다기한 측면을 한 점의 아집이나 집착 없이 보려 했던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교조적인 맹목주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그의 노력에는 종교적인 엄숙함마저 서려 있었다.

 

스스로를 지킨 자유인
그러나 현실은 학생운동가로서, 반독재투쟁가로서, 인권변호사로서, 문필가로서의 다양한 면모와 지도력을 지닌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86년 이후 민주화운동이 열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양적으로 성장한 운동권 내부는 복잡한 이념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동세력간의 원활한 소통과 질적 성장을 위해 불가피한 진통이었으나, 대립 과정에서 지나친 감정싸움으로 치닫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 즈음 조영래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영래가 일개 변호사가 아니라 탁월한 정치지도자로서 언젠가 깃발을 들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당자는 생각지도 않는 그 깃발의 색채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젊은 축들은 조영래가 사상적, 계급적으로 좀더 분명한 색깔을 보일 것을 주문했고, 심지어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두루 교분을 나누는 그를 우경화되었다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 무렵 그와 종종 어울렸다는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는 그런 뒷이야기들에 박수라도 치듯 「그 천재가 남긴 향기」라는 글에서, 1989년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조영래가 사석에서 곧잘 ‘사회주의가 희망 없는 제도임을 힘주어 말’했다고 썼다. 다만 조영래 자신이 ‘그런 생각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솔직히 털어놓기가 힘든 인간관계에 놓여 있’는 까닭에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행동 범위 사이의 모순 때문에 적잖은 갈등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것이 전체 운동권과의 불화를 나타내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는 오히려 1988년 9월 1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른바 ‘우익의 대변자’들을 점잖게 나무라고 있다.


오랜 시간을 컴컴한 동굴 속에서 헤매다가 밝은 바깥세상으로 빠져나올 때는 조심조심 눈을 뜨지 않으면 갑자기 햇빛을 쏘여 눈이 멀어 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햇빛이 눈부시다고 해서 뒷걸음질쳐서 다시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짓이 없다. 지금 우리는 길고 지루하였던 구시대의 어둠을 지나 막 민주주의의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새 시대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역사적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과거의 동굴로 되돌아가자는 사람들」 중에서

좌와 우를 떠나, 조영래가 진실로 무슨 ‘주의자’였던 적이 있었을까. 부인 이옥경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방대한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섭렵한 독서가였지만 관심분야인 경제학을 제외한 이념서적에는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다. 어쩌다 필요에 의해 읽을 때도 의식적으로 교조에 포섭되는 것을 경계했다. 조영래에게 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광범한 인문적 교양과 인간애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일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자유사상가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상은 어떠한 개인적인 야욕에 유혹되거나 위협 따위에 굴복하지 않을 뿐더러 어떠한 독단이나 교조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한 번도 무슨 ‘주의자’로 규정해 본 일이 없다. 자유의 혼란 속에서 조성되는 창조적 긴장 가운데로 부단히 자신을 던짐으로써 참된 인식에 도달하려는 것, 이것이 현재의 나의 모습이다.
-「김지하의 양심선언」 중에서

위 인용문은 물론 김지하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한 글이지만, 한편으론 필자인 조영래의 사상적 지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의 평생에 걸친 화두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바로 ‘지식인은 누구인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었고, 실제로 그의 전 생애는 그 답을 찾는 데에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성한 논쟁과 분열 속에서 그는 조금씩 지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 후보단일화 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조영래는 주변의 수많은 오해 속에서 단일화 실패의 후유증을 가장 깊이, 그리고 오래 앓았다. 연이어 들려오는 청년학생들의 목숨 건 투쟁 소식도, 『전태일 평전』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각오한 ‘결단’에 굵은 방점을 찍었던 그에게는 살을 저미는 듯한 모진 아픔이었으리라.
누구의 감정도 다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이 다정다감한 사내는 정작 자기 내부에서 치명적인 상처가 자라고 있는 것을 몰랐다. 조영래를 가장 조영래답게 만들었던 뜨겁던 열정과 적극성, 자신감도 견고한 침묵의 외피 속에 숨어버렸다. 1990년 벽두, 언제나 많은 벗들에게 둘러싸여 허허롭게 웃던 그는 도망치듯 미국으로 날아가 4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그해 8월 말, 서울대병원에서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1990년 1월 미국에서 큰아들 일평에게 보낸 엽서




조영래(趙英來)

1947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1965년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 부정선거 규탄, 삼성 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 쟁취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196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이 발생하여 전태일 정신 계승사업에 진력하였다.
1971년 2월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그 해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월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어 6년 가까이 피신 생활을 하였다. 피신 생활 중에도 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고, 특히 3년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였다.
1980년 수배 해제 및 복권되어 1982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다. 1983년 변호사로 개업하여 시민 공익 법률상담소를 개설한 이래, 1984년 망원동 수재사건 변론, 1985년 대우어패럴 사건 등 각종 노동사건 변론,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체 철폐 문제) 등 변론, 대한변협 인권보고서 집필, 1987년 보도지침 사건과 박길래 사건(상봉동 진폐증 보상 문제) 변론을 담당하는 등 노동․빈민․공해․학생 사건 등과 관련된 인권 변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 문화방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언론 매체 쪽에서도 활발한 문필 활동을 벌였다. 1990년 9월 초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였으나, 그 해 12월 12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하였다.



글_김기선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뒤 평전 작가로 일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전집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을 썼으며,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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