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시

참스승이 남긴 화두에서 지옥과 천국을 본다

참스승이 남긴 화두에서 지옥과 천국을 본다
이현승 시 ‘오줌의 색’, ‘천국의 아이들 2’

글 최규화 (인터파크도서 <북DB> 기자)/ realdemo@hanmail.net 

2016년 1월은 많은 이들에게 ‘참스승을 잃어버린 해’로 기억될 것이다. 1월 1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선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햇빛이 귀한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희귀 피부암이었다. 그것은 선생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감옥에서 보낸 20년의 시간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며 더욱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사회에 성찰과 사색, 정의와 연대의 가르침을 전하던 선생의 빈자리는 선생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슬픔으로 가득 찼다.

<담론> <강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신영복 선생이 남긴 책을 찾는 사람들로 서점은 붐볐다. 그리고 언론 지면이나 SNS에는 선생이 쓴 문장들이 올라왔다. 선생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여러 문장들 가운데 내 가슴에 가장 먼저 와닿은 것은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이 문장이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늘 나에게 숙제 같은 말이었다. 공감과 소통과 연대는 늘 그 여섯 글자, ‘같은 곳에 선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자라는 일은 늘 글이나 말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때로는 ‘기록’이라는 실천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연대해야 하는 일이다. 그저 팔짱만 끼고 떨어져 서서, ‘진보는 이래서 안 돼, 보수는 저래서 안 돼’ 하고 훈수만 두는 기자가 되지 않으려면 더욱 그래야 한다. 그래서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말은, 셔츠 어딘가에 박혀 있는 미세한 나무 가시처럼 이따금씩 따갑게 나를 찌르곤 했다.

오줌의 색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호되게 아파본 사람이다.
한 사나흘 누웠다가 일어나니
세상의 반은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이 없다.

정작 아픈 사람은 한 손으로 링거 들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춤을 잡고
절뚝절뚝 화장실로 발을 끄는데
화장실 앞 복도엔 다녀온 건지 기다리는 건지
그 사람도 눈꺼풀이 무겁다.

방금 누고 온 오줌과 색이 똑같은
샛노란 링거액들은 대롱대롱 흔들리고
통증과 피로의 색이 저렇듯 누렇겠지 싶은데
몽롱한 눈으로 링거병을 보고 있자니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도 잘한다는 생각.
링거병이 따뜻하게도 보이는 것 같다. 
 

이현승 시인의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창비, 2015년)을 읽으면서, 이 시가 실린 17쪽의 책장 귀를 제일 먼저 살짝 접어놓았다. 3연 16행으로 된 이 시를 단 여섯 글자로 줄이면 바로 ‘입장의 동일함’이 될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타계 이후로 내 머릿속에 씨앗처럼 다시 나타난 그 말이, 이현승 시인의 언어를 통해 작은 나무로 선명하게 자라난 느낌이다.

                                                               ​ 

“아픈 사람을 빨리 알아보는 건 아픈 사람”. 아픔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도 잘 읽는 법이다. 그래서 늘 “위로받아야 할 사람”과 위로하는 사람은 다르지 않다. 위로받아야 할 내가 또 다른 나를 위로하고, 그러면서 또 스스로 위로받으며 사는 것. 아프지만 착한, 우리 곁의 숱한 이웃들이 떠오른다.

그런 이웃들을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일본대사관 앞에서였다. 신문에 실린 사진 속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을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옆으로 거대한 비닐 풍선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노숙농성을 하는 대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지난해 12월 28일 갑작스런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12월 30일부터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농성. 그들은 1월 21일 오늘까지 20일이 넘는 날 동안 줄곧 침낭 하나에 의지한 채 비닐을 뒤집어쓰고 버텨왔다.

천막 하나라도 치게 해달라는 시민들의 안쓰러운 목소리는 ‘불법’이라는 경찰의 한마디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심지어 경찰은 농성 중인 대학생 여섯 명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며 출석요구서를 보냈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열린 ‘한일 위안부 협상’ 반대 문화제 등을 주최한 혐의였다. 그리고 1월 21일 경찰서로 자진출두한 대학생들에게 경찰은 ‘특정 정당에 가입했는지’, ‘집회 참여 단체의 목적과 성격이 무엇인지’, ‘농성 과정서 물품을 지급한 단체가 누구인지’ 추궁했다고 한다.(<민중의소리> 1월 21일 보도)

이 대학생들이야말로 ‘입장의 동일함’을 몸으로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들에게는 70~80년 전 자신과 같은 젊은 여성들이 겪은 비극과 아픔이 자신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아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비록 그들 사이에는 수십 년의 세월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소녀상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으로,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것으로 그들은 ‘입장의 동일함’을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 타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되새기는 문장이 또 하나 있다. 선생의 책 <담론>에 실린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는 문장. ‘한파주의보’가 발효된 날에도 소녀상 옆에서 비닐을 덮고 밤을 지새우는 대학생들은 지금 ‘위안부’ 피해여성들과 함께 비를 맞고 있다. 그리고 그런 대학생들과 함께 비를 맞겠다고 조용히 침낭 하나 손에 들고 찾아오는 이름 없는 시민들 역시 그 비를 나눠 맞으며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이영광의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유독 ‘아픔’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68쪽과 69쪽에 실린 이 시도 첫 행부터 내 눈길을 붙잡은 시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행은 첫 행과 대구를 이루면서 마음속에 쿵 하고 들어와 박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무래도 지옥에 가깝지만, 그래도 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곁은 분명 천국일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남긴 화두를 품고 시집 한 권을 읽으며, 지옥도 천국도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음을 확인한다.

천국의 아이들 2

- 이영광 형께
자기가 제일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지옥일 테지.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은 없고,
아픈 사람들도 가끔은 아프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가르르 호호호 꽁지 빠진 새처럼 웃고 난리다.

점잖게 앉아서 염치를 만들어내는 이 능력자들이
아무도 안 아픈데 혼자 다 아픈 이 능력자들이
어젯밤에 다녀온 곳은 차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곳이라서
비록 마음 한 자리 불탄 비닐처럼 흉측하게 얽었어도
한세상 장난처럼 농담처럼 지나갈 수는 없는가.

세상엔 상처 잘 만들어서 상 받는 사람도 있고
덕분에 이렇게 술추렴하면서 울혈을 푸는 사람도 있다.
상처는 상처로만 열린다.
잔뜩 풀어 헤쳐논 이 상처들은 다 뭔가.
요즘은 아무도 시를 읽으면서 울지 않고 격앙되지도 않는데
아무도 안 보는 시를 명을 줄여가면서 쓰고,
조금 웃고, 조금 끄덕이고, 들렸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람은 역시 쓰는 사람이다.
여기 통증은 조금 안다는 사람들은 다 모였는데
봉인된 저 상자는 누가 무엇으로 열었는가.
하긴 아픈 사람만 봐도 같이 아픈 곳이 천국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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