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시

‘함께 울어라’... 댓글에서 찾은 우리 시대의 시

‘함께 울어라’... 댓글에서 찾은 우리 시대의 시 

글 최규화 (인터파크도서 <북DB> 기자)/ realdemo@hanmail.net 

 

 

“시민들의 각자도생 같은 생각이 들어요. 이성은 배제돼야 할 것으로 반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고, 남아 있는 건 감각밖에 없는 것 같아요. 분해와 분열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들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물론 존중해야겠지만 언제까지 해체만 하고 있어야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7월 말, 한국 리얼리즘시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이시영 시인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에 대해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이시영 시인은 위와 같이 대답했다.(북DB 2016년 8월 19일 기사)

한 달에 한 번 ‘시대와 시’라는 이 연재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시영 시인의 답답한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울어내는 시, 이 시대의 모순을 짚어내는 시, 이 시대 사람들의 고민에 화두를 던져주는 시, 그런 시들을 찾아 읽고 소개하는 것이 나한테 주어진 숙제다. 하지만 매달 고민이 깊다. 새로운 시집들은 꾸준히 출간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시대’가 없다. 시대의 사람들이 없다.

이시영 시인의 지적처럼, 모든 것이 배격되고 오직 감각만이 남아 있는 시가 판을 친다. 그런 시 속의 인간의 오직 감각에 지배받는 존재다. 팔다리, 손발, 머리, 가슴도 하나 없이 오직 감각만을 느끼고 배설할 뿐인 인간. 정말, 우리는 그런 존재인가? 매일 팔다리로 움직이고 손발로 노동하며 머리로 생각하고 또 가슴으로 공감하는 우리는, 이 시대에 없는 사람인가? 오늘도 인간을 해체하고 감각만 발라내느라 바쁜 시인들은 아마 우리와는 다른 시공(Mn)에 살고 있는 듯하다. 우리 시대의 시는, 시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 쇳물 쓰지 마라

광염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2010년 9월 철강업체에서 일하는 스물아홉 살 청년 노동자가 용광로에 빠져 사망했다.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 속으로 빠진 그는 비명 한번 질러볼 새도 없이 말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연히 그의 시신은 손톱 하나 찾지 못했다. 너무도 아까운 나이, 너무도 비극적인 죽음. 당시 그의 죽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고, 수많은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국민들은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시를 청년을 추모하는 시로 함께 읽고 널리 공유했다. 이름도 모르는 ‘한 누리꾼’이 온라인 뉴스 기사에 ‘댓글’로 쓴 이 시를.

그 누리꾼의 필명은 ‘제페토’. <그 쇳물 쓰지 마라>(수오서재, 2016년)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7년째 ‘댓글시’를 쓰고 있는 제페토의 시집이다. 그동안 그가 쓴 댓글시 120여 편과 개인 블로그에 올린 시들 가운데 추려 엮은 시집. 위의 시는 시집 25쪽에 실려 있다. 그는 지금도 온라인 뉴스 아래에 댓글로 시를 쓴다. 어느 평론가가 그의 시를 상찬 해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의 ‘댓글’을 시라고 부른다. 어느 이름 높은 문예지에서 그를 등단시켜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를 시인이라 부른다.

시인의 일은 현상의 이면을 살피는 일이다. 우리가 시를 읽는 까닭이 바로 그것 아닌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시인의 눈을 통해 보기 위해서. 제페토는 사건의 이면에서 ‘사람’의 존재를 본다. 육하원칙 사이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고 그의 마음을 헤아린다. 시인에게는 인간에 대한 연민, 이런 애틋한 마음이 먼저다. 언어를 다루는 교묘한 기술도, 세상에 대한 지식도 그 다음이다. 외국 철학자나 시인의 이름을 괜히 써가며,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를 낙서로 활자를 낭비하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다.

용광로 청년의 연말

그날 밤, 그러니까
이천십 년 십이월 삼십일 일이었다
내년까지는 삼 분 남짓 남았고
거리는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조금 더 부자돼야지
조금 더 성공해야지
한 해 굵직한 사건을 정리한 10대 뉴스에
청년의 죽음은 언급되지 않았는데,
새해에는 좋은 것만 생각하자며
지난 달력 떼어내듯 쉬이 잊는 건 아닌지
어머니는 지레 서러운 눈물을 쏟았다
“궁상맞게스리…”
눈 흘기며 베란다로 나간 칠순의 아버지는
착해 빠진,
참 더럽게 착해 빠진 도시를 굽어보며
불 없는 담배를 어금니에 물었다
안간힘을 썼다
“별수 있나,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기로서니 기억을, 아픔을
우리들의 과실을 모르는 척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아나운서의 카운트다운이 7옥타브를 향해 열을 냈다
오… 사… 삼… 이… 일!
직전에 아버지 눈물보가 터졌다
늦둥이네 가족은 그렇게 새벽까지 울었는데,
2년 동안 운 셈이다

비극은 끝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우리가 그 비극의 주인공이 될까 불안해하며 살아간다. 그 숱한 비극들을 목격하며,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페토가 찾은 답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씩 올라왔다 사라지는 온라인 뉴스 기사의 댓글. 몇 명이나 읽을지, 누가 그것을 시로 읽어줄지,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늘 많다. 하지만 ‘써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함께 울어주기 위해서.

시집 192~193쪽 실린 시다. ‘용광로 청년’ 사건이 일어나고 석 달 남짓 지나 새해를 맞는 그날, ‘부자 돼라’는 덕담에라도 희망을 걸고 싶은 뭇 사람들의 공허한 흥분이 지배하는 날. 제페토는 그 흥분에 도저히 가담할 수 없는 한 가족들을 떠올린다. 늦둥이 아들을 쇳물에 잃은 칠순 노인. 꾹꾹 참아오다 새해 카운트다운과 함께 터져버린 그 눈물을 시로 그리며, 제페토는 그들과 함께 운다. 시인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 눈물을 못 본 체하거나 그 눈물을 해체하려 할 때, 그는 그냥 함께 운다. 그는, 시인이다.

건물 외벽 유리창을 청소하던 노동자가 추락 사망했다는 또 다른 뉴스의 댓글에도 그는 시를 남겼다. 추석을 며칠 앞둔 때, “하필 당신 나와 같은 나이”라는 제페토는 안타까움에 고인을 오래 책망한다. 그리고 짧게 남긴 마지막 두 행, “이번 추석은 글렀다/ 음복하다 울게 생겼다”.(37쪽 ‘이름 모를 친구에게’) 이런 시구를 한 달에 한 번씩 발견할 수 있다면 ‘시대와 시’를 쓰는 일은 즐거운 숙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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