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실 에어컨 반대!” 당신의 밝은 눈이 보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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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실 에어컨 반대!” 당신의 밝은 눈이 보지 못한 것

- 신경림 시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외

글 최규화 (기자)​/ realdemo@hanmail.net

“6단지 경비실에 에어컨 설치를 반대합시다.”

며칠 전 우연히 SNS에서 사진 한 장을 봤다. 어느 입주자가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말자고 쓴 유인물(?)을 누군가 찍어 올린 것이다. ‘반대 이유’가 다섯 가지나 되기에 꼼꼼히 읽어봤다.

“첫째 : 매달 관리비가 죽을 때까지 올라갑니다. 둘째 : 공기가 오염됩니다. 셋째 : 공기가 오염되면은 수명 단축됩니다. 넷째 : 지구가 뜨거워지면 짜증이 나서 주민화합이 되지 않고 직원과 주민화합 관계도 파괴됩니다. 다섯째 : 6단지보다 큰 아파트에도 경비실에 에어컨 설치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지구의 대기오염과 주민들의 화합을 대단히 생각하는 사람 같지만, 결국 한마디로 ‘관리비 올라서 싫다’는 소리다. 사진을 찍어서 올린 사람의 글을 읽어보니,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에 대해 주민투표에서 95%가 찬성했다고 한다. 압도적인 찬성 앞에서도, 이분의 걱정은 참 깊다.

무더위가 악명 높았던 지난해 여름 접한 기사도 생각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자, 입주자 대표들이 ‘동의 절차를 어겼다’며 에어컨을 철거해버린 사건이 있었다. 어디 에어컨 설치 문제뿐인가. 최저임금을 1만 원까지 올리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 발표되자, 최근 어느 아파트에서는 일찌감치 경비원들을 해고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2014년 입주자들의 비인간적인 횡포와 폭언에 자살을 선택한 경비원의 안타까운 소식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 치는
가난한 아내와 함께 부엌이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 산다
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
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로 신발이 더럽다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 섞여 화장실 앞에서 서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
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
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고
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 잡지에서
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
떠들다보면 그것도 꿈이다
지금도 밤늦게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
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
전기도 없이 흐린 촛불 밑에서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는데도
어쩌면 꿈만 아니고 생시에도
번지가 없어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지금도 이 번지에 산다

위의 시는 ‘민중적 서정’의 원로시인 신경림 시인의 시다. 2014년에 나온 <사진관집 이층>(창비) 18~19쪽에서 찾았다. 시인의 의도와는 좀 다르겠지만, 나는 ‘이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를 읽어봤다.

60․70년대 번지도 없는 “산비알 무허가촌”에 살던 사람들, “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인 사글셋방에 살던 사람들.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80․90년대를 거치면서, 그들 중 누구는 중산층이란 이름을 달고 ‘아파트’로 입성하기도 했을 것이다. 가난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해온 세대들을 우리는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들에게 다시 가난해지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또 있을까. 그들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아파트’는 성공의 상징이자 욕망의 상징이다.

‘집값 떨어진다’는 말은 전쟁만큼이나 무서운 말이 됐다.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아파트 한 채 잘 마련하면 목돈도 만지고 팔자도 펴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의 공식. 그러다 보니 착한 아빠, 선량한 시민들도 ‘아파트 입주자’가 되면 입장이 달라진다.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불쌍해하던 그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어느 신도시 어느 단지에서 시세를 셈하고 거래량을 따지며 살까. 번지도 없는 무허가촌에 살다가 결국 자신의 번지 하나 당당하게 갖게 된 사람들은, 지금 그 번지 위에서 무슨 생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사진관집 이층> 47쪽에서 찾은 시다. 1935년 생, 여든 셋의 시인은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고 한다. 눈이 밝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별. 잇속에 눈이 밝고 요령에 눈이 밝은 사람들에게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빛나는 별을 볼 수 없다.

나이만 든다고 그 별이 다 보일까. 관리비 한 푼이라도 아껴서 차 사고 집 사고 성공하라고 가르치는 할아버지로 늙어서야 되겠나. 사람들 사이에서 별을 볼 줄 아는 눈을 물려주며 늙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다행히 그런 눈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별처럼 빛나고 있나 보다.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말자고 유인물을 붙인 아파트 입주자에게, 또 다른 입주자가 반박 유인물을 붙였다. “말 같지도 않은 이유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라는 단호한 한마디 아래, “경비 아저씨들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한 명의 소중한 인간입니다”라는 평범한 문장이 참 새롭다. ‘소중한 인간’을 발견하는 소박하고 어둑한 눈이, 관리비 한 푼 더 아껴 조금이라도 더 부자가 되겠다는 잇속 밝은 눈을 타이르고 있다.

이 아파트처럼 입주민들이 뜻을 모아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해줬다는 기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 미담들이 더 이상 ‘뉴스’가 되지는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사진관집 이층> 52쪽에 실린 아래의 시처럼, 부끄럽게 꼭 쥔 손들이 “당당한 빈손”으로 빛나는 세상에 살고 싶다.

당당히 빈손을

버렸던 것을 되찾는 기쁨을 나는 안다.
이십년 전 삼십년 전에 걷던 길을
걷고 또 걷는 것도 그래서이리.
고목나무와 바위틈에 내가 버렸던 것 숨어 있으면
반갑다 주워서 차곡차곡 몸에 지니고.

하지만 나는 저세상 가서 그분 앞에 서면
당당히 빈손을 내보일 테야.
돌아오는 길에 그것들을 다시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으니까.
찾았던 것들을 다시 버리는 기쁨은 더욱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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