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민주주의와 한국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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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민주주의와 한국의 역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포용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좌  담    박상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재웅 다솜이재단 이사장
진  행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
정  리    김남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관리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9월 3일 ‘아시아 민주주의와 한국의 역할’을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좌담에는 박상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재웅 다솜이재단 이사장(전 YMCA 전국연맹 이사장)이 참석했다. 이들은 국내외에서 수십 년 동안 활동해온 해외 민주주의 국제전문가 1, 2, 3세대의 대표적인 인사들이다. 이날 좌담회는 오랫동안 아시아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신 박상증, 안재웅 두 원로의 경험을 듣는 시간이자 아시아 민주주의의 현황과 과제를 진단해 보는 자리였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현주소_이슈와 현안

이성훈
2015년은 유엔 창설 70주년이자, 우리에게는 광복 70주년이다. 반둥회의 60주년, 베트남 통일 40주년을 맞는다. 오늘 좌담은 과거로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온고이지신의 관점에서 아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시대 징표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 아시아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큰 이슈가 있었다. 쿠데타로 태국에 군부정권이 다시 들어선 것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장 큰 후퇴로 꼽힌다. 올해 1월 스리랑카에서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었는데,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장 큰 부각으로 꼽는다. 

박상증
개인적으로 태국의 쿠데타는 큰 충격이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쿠데타가 일어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태국의 수도 방콕은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앞서 발전한 모델이다. 그러다 보니 태국의 정치 수준이 여타 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쿠데타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본 인도차이나 여러 국가들이 그것을 모방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악영향이다.

안재웅
태국의 정치는 ‘농촌’ 그 자체다. 국민 대부분은 농사짓는 사람들이고, 농촌을 컨트롤하는 것이 정권 안정에 중요하다. 그런데 농촌에서 제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거간, 즉 중간업자들이다. 이들은 마치 깡패집단 같아서, 정부도 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 농촌 선거를 어떻게 잘 관리하는가, 그것이 민주주의를 성장시킬 수도 혹은 후퇴시킬 수도 있는 태국 정치의 바로미터가 된다. 

이성훈
말레이시아에서도 지난 8월 말 ‘베르시 4.0’이라는 대규모 반부패 시위가 있었다. 나집 라작 총리 비자금 문제로 촉발되었는데, 시민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국부’로 불리는 90세 고령의 마하티르 전 총리까지 정부를 비판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도쿄에서는 ‘반(反) 아베 운동’이 뜨겁다. 분명 다수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정치인들인데, 그들의 활동 내용이 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현상이 자꾸 생긴다. 

박상증
말레이시아는 일찍이 영국의 영향을 받아서 민주주의 시스템 운영을 우리보다 먼저 배웠다. 그래서인지 민주적 정치가 상당히 진전된 부분도 있다. 특히 여러 종교가 있는 나라인 만큼, 종교 간 화합을 위한 정책을 잘 펼친다. 그러나 마하티르 전 총리가 안와르 전 부총리를 핍박한 것은 상당히 유감스러웠던 부분이다. 민주주의를 박해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건 후진사회의 하나의 현상이라고 본다. 

이성훈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는 다당제와 자유로운 선거를 기준으로 한다. 이 관점으로 보면 남부아시아 대부분은 빈곤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민주화에 성공했다. 주기적으로 선거를 하고 정당 간의 경쟁을 통해 정권이 바뀐다. 스리랑카가 대표적인 경우로 올해 1월 선거를 통해 보다 친인권 친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를 선거가 작동하는 나라로 꼽는다. 태국은 군사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약간 후퇴되는 상황이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는 선거는 하지만 일당 지배라서 다당제가 실제로 의미가 없다.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도 비슷하다. 

버마는 여전히 군부가 장악한 나라다. 군인이 국회 의석의 25%를 장악하고 강력한 비토권을 행사하고 있어 민주주의 제도가 매우 제한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안재웅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네포티즘’(족벌정치)이 강하게 나타난다. 필리핀의 아키노, 마르코스, 마카파,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 파키스탄의 부토, 인도의 간디, 방글라데시의 나만, 싱가포르의 리콴유……. 아시아 민주주의의 많은 문제들이 이들 가문을 정점으로 해서 거기 따라붙은 세력들 때문에 생기고 있다. 네포티즘이 민주주의 탈을 쓰고 온갖 비리와 수단 방법을 동원해 정권을 유지한다.

박상증
민주주의의 모습을 지닌 ‘올리가키’(과두정치)다. 허울은 갖췄지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아니다.

이성훈
아시아 민주주의의 역사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1950~60년대에는 탈식민, 1960년대에는 경제성장, 개발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후 1970~80년대 민주화 시대를 거쳐서 오늘날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시대다. 

박상증
1950년대에는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독립을 해가면서 민족주의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되었고, 그다음에는 건국이 큰 과제였다. 이념적 논쟁으로는 민주주의보다는 민족주의를 말하게 되면서 토착화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됐다. 



안재웅

1955년의 반둥회의야말로 아시아 나름대로 세계적으로 번듯한 입장을 표명한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당시 아시아 23개 나라와 아프리카 6개 나라, 총 29개 국가가 모여서 온 세계에 건국하는 우리의 입장은 이렇다 하고 5원칙을 내세웠다. ‘영토주권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이 원칙들만 잘 존중하면 아시아가 서로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건국 당시에도 아시아 국가들은 저마다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는 수카르노가 교조민주주의를 기치로 내밀었고, 우리나라도 4·19혁명 때 민주주의 물결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런데 결국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처럼 하면서 아시아의 민주화를 방해하는 일을 했다. 그 영향력이 아직도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거 아니겠나.

이성훈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셨다. 바로 미국이라는 화두다.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냉전시대 때 겉으로 민주화운동을 지지한 것 같았던 미국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 가치보다 미국의 반공국익에 도움이 되느냐만 따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21세기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은 무엇일까. 

박상증
동아시아 갈등은 미국과 중국과의 갈등만은 아니다. 일-중, 한-일 갈등 등 다양하다. 미국이 주요 책임국가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 상호 간에 문제가 있다. 하다못해 동남아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라도 만들었는데 동북아는 못 만들었다. 우리 책임을 먼저 말해야 한다. 

안재웅
미국이 우리나라의 박정희 군사 쿠데타를 승인을 한 셈이고, 필리핀의 마르코스도 그대로 승인했다. 결국 아시아 민주주의의 싹을 미국이 자른 것이다. 대통령이 중국에 가는 것도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과 한국은 불안한 마음에 미국의 안보 가이드라인에 들어가고,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자생 능력을 키우는 데는 도움 되지 않는다. 외교력, 경제력, 기술력 이런 것을 종합해서 국제 무대에 나서야 하지 않겠나. 

이성훈
1986년 필리핀 피플파워를 필두로 본격적으로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공식 의제가 되었다. 1987년에는 우리나라의 6·10민주항쟁이 일어났고, 몇 년 후 민주화의 물결이 몽골 등의 국가로 이어졌다. 인도네시아는 IMF가 기점이었으니 한참 뒤다. 나라마다 특성은 다르지만 크게 보면 1980년대 중반 즉 냉전 말기부터 아시아의 민주화가 확산됐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민주주의가 형해화된다는 지적이 있다. 민주화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실질적 삶의 문제를 해결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냉소적이 되었다. 민주주의에 위기가 왔다고들 말한다.  

아시아 정체성, 아시안 스피릿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안재웅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은 대표 언어와 대표 종교 등으로 지역 내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런데 아시아는 언어와 종교가 다양해 그렇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국제 모임을 해보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저녁에 술 먹고 춤을 추면 금방 하나가 되는데 아시아 사람들은 상당한 뜸을 들여야 하더라. 공통분모와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박상증
우리는 그동안 아시아를 서쪽이 아닌(nonwest) 것으로 이해했는데, 그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유럽에서는 고등학교에서 희랍어를 떼고 졸업한다. 고전어를 통해서 현대어의 뿌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아시아도 산스크리트어와 한문 교육을 확대하면 아시아 통합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시아를 어떻게 규명하고 이해할지에 대해 평생에 걸쳐 나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결국 현실적으로는 지역별로 나눠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 속해 있으니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민주화를 위해서 ‘헬싱키 프로세스’의 동아시아판을 만들면 좋겠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통일을 이야기하고 대만, 홍콩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 중국이나 북한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한국의 역할

이성훈
우리나라는 지난 5년간 공적개발원조(ODA)를 양적으로 많이 늘렸고, 그 내용도 기후변화까지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ODA는 공적 원조가 2조 원, 민간 원조가 1조 원으로 총 3조 원 규모인데, 대부분 빈곤퇴치기금으로 사용된다. 궁극적으로는 빈곤퇴치가 민주주의에 기여를 할 수는 있겠지만, 보다 명시적으로 한국적 특성을 살려서 민주주의와 인권 분야의 ODA를 하면 좋겠다.

박상증
옛날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 도와주던 외국 단체들처럼 그 나라의 풀뿌리 운동을 도와줄 조직이 없다. ODA 기구들을 감시하고 비판하면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로비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국내에서의 책임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보고 배워라’라는 식의 태도로는 안 된다. 

이성훈
정부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야기하면 민감해진다. 그런 면에서 민간차원의 ODA가 중요하다. 가칭 ‘민주나눔기금’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아시아 사람 스스로가 우리의 민주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하면 좋겠다. 예를 들어 11월에 있을 버마 선거 지원을 할 수도 있다. ‘대만민주주의기금’이라는 유사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만과 연대를 해도 좋고, 2016년이면 피플파워 30주년을 맞는 필리핀과 힘을 합쳐도 좋다. 

안재웅
ODA도 중요하지만, 해외에서 활약하는 재외동포로 하여금 더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급선무다. 작가, 기자, 교수 등에게 한 번 기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꾸준히 지원해서 그들이 자기 분야에서 꽃을 피우고 활약하게 해야 한다. 

박상증
독일과 미국 등은 나라 돈을 민간단체 교회단체에 줘서 ODA를 하게 했다. 당시 노동운동, 빈민운동, 교회운동, 청년운동이 다들 지원을 받았고, 이것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그것을 못하고 있다. 아직 그만한 돈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서 문제다. 



안재웅

우리에게 필요한 게 로비스트다. 잘 다듬어진 로비스트를 여성, 인권 등 여러 분야에서 길러내야 한다. 이 사람들이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자금을 마련해서 지원해야 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그런 역할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박상증
1980년대 해외에서의 민주화운동은 국제적인 네트워크 형성에 성공했는데 국내는 그것을 못한 점이 참 아쉬웠다. 해외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네트워크다. 그런데 아직 우리 사업회 같은 조직도 해외 민주화운동의 네트워크 성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다문화사회로의 발돋음

이성훈
민주주의는 일국 차원이 아니라 국제화의 문제다. 빈곤을 매개로 한국 기업이 아시아로 나가고 또 한편으로는 결혼 이주나 이주노동으로 그쪽에서 사람이 들어온다. 이것이 다 민주화의 문제다. 1960~1970년대의 민주화는 그냥 독재정권과 싸우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구성과 맥락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포용적 민주주의(inclusive democracy)가 필요하다. 

박상증
우리는 백의민족, 단일민족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다문화민족이라는 것을 한국 국민들이 인식하는 것도 민주화의 과정이다. 다른 가난한 나라 사람들 깔보고 피부색 검은 사람 차별하고 하는 습성이 바뀌는 것도 민주화다. 이런 의식을 바꿀 수 있는 제대로 된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안재웅
지역으로 가면 다문화 관련 사업들이 다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다.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교육, 취업 알선, 보건 문제 등을 다 정부가 주도하고 실제적으로 민간은 틈도 없다. 정부가 하는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 가는 프레임 워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잘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성훈
9월 마지막 주의 유엔 총회에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를 채택하게 된다. 이는 유엔 70주년을 계기로 만들어진 통합적 패러다임으로 2016년부터 2030년까지 15년간 국제개발의 목표가 된다. 그 중 16번 항목에 민주주의 조항이 들어간다. ‘단순한 민주주의로는 안된다’, ‘개발과 민주주의 인권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한국이 민주주의 이슈에 앞장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늘 말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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