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민주화운동을 생각하다

[Mini interview] 운동은 끝나지 않는다.

글 박한나 자유기고가 hanna_p@naver.com

1987년 직선제로의 개헌은 6월항쟁은 물론이요, 이전부터 치열하게 이어져 온 민주화운동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직선제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이자 마지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직선제 쟁취는 민주화운동의 가장 중요하고도 분명한 성과였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불과했다. 민주화운동은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이후 오히려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와 마주했다. 내면화되고 관습화된 비민주성과의 싸움,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에는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이 태동했다. 민주화운동은 세부 과제에 따라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각각 어울리는 형태로 옷을 갈아입었다.

‘민주화’라는 뚜렷한 하나의 가치를 외치던 사회운동 세력이 다양하게 갈라지다 보니 분열되고 힘이 약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식과 삶 속에서의 투쟁이라 운동의 성과를 눈으로 확인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 사이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운동’이란 단어 자체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회운동은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이 늘어나고, 5·18민주화운동과 6·10민주항쟁의 가치마저 희미해져버렸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꾸준히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비민주성을 찾아내고 우리 삶에 질문을 던졌다. 인식하지 못 했던 문제들을 끄집어내다 보니 문제만 늘고 발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사회에 의문을 던지는 그 자체가 성과였다. 노동, 인권, 통일, 교육 등 전통적인 것에서부터 여성, 환경, 예술 등 운동의 영역이 넓어진 것 또한 큰 발전이다.

이에 대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사회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래서 풀뿌리, 여성, 예술, 자원봉사 등의 분야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났다. 우리의 사회운동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어떤 성과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앞으로 운동이 어떻게 진화해야 민주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들은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람과 고충, 희망과 우려 등 활동가로서의 세월이 담긴 이야기였다. 사회 안에서, 우리 안에서 비민주성이 사라질 그날까지 계속될 이야기였다.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분야에 따라 적절한 운동의 방식은 다르죠

달동네, 말은 예쁘지만 생활은 퍽퍽한 곳. 1990년대 중반서울시 관악구의 대표적인 달동네에 재개발이 시작됐다. 주민들은 판잣집에서 떠나야 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판잣집 보증금으로 몸을 뉠 수 있는 곳은 판자촌밖에 없었다. 주민들에게 판자촌 철거는 개발의 과정이 아니라 생존권 박탈로 다가왔다. 달동네를 지켜야 했다. 필연적으로 동네마다 주민들이 모였다. 힘을 모으기 위해 개별 모임들을 하나로 합치고 지역 활동가들도 뜻을 같이했다. 1995년 ‘관악주민연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 주민 자치와 주민 정치, 모두를 위해 힘써
관악주민연대 곽충근 사무국장은 관악구 토박이는 아니다. 관악구에 위치한 대학에 들어가면서 지방에서 올라와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대학 생활을 재미없어하던 곽 사무국장에게 선배가 공부방 교사 자원을 권했고, 동네 아이들과의 만남이 곽 사무국장이 관악구에 자리 잡은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다 보니까 부모들을 보게 되고, 부모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보게 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보게 되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들을 하게 되었어요.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관악주민연대도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지역과 주민 문제에 대응하면서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판자촌 철거, 실업, 가정 해체, 임대 아파트 입주, 세입자의 권리 보장 등 문제에 따라 활동도 변화해왔다. 주요 회원들은 문제의 당사자가 많았다.

후원 회원으로 인연을 맺어 오다 2012년 활동가로 합류한 곽 사무국장은 주민 자치 활동뿐만 아니라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지역 사회의 문제에 두루 관심을 갖고 해결하는 주민 정치까지 관악주민연대의 활동 영역을 넓혔다. 활동가가 아닌 주민이 직접 구의회 의원들을 살펴 의정 활동을 평가하고, 지역 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교통사고가 잦은 학교 앞 횡단보도를 발견하고는 구의원과 면담을 하고 4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주민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문제의 당사자가 아닌 주민이 지역 문제를 찾아내고 실질적인 해결까지 이끌어 낸, 풀뿌리의 실현이었다. “지역 사회에서의 변화는 눈에 확 띄는 무언가를 기대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이렇게 개인의 생각이나 행동이 변화하는 모습이 있어요. 이 모습을 보면서 힘들어도 풀뿌리 운동을 하는 거죠.”

★ 혼자 다 할 수도, 완벽할 수도 없어
물론 어려움은 많다. 주민들 중에는 사회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 때문에 관악주민연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곽 사무국장은 흔히 그들이 지적하는 운동의 과격성 등을 개선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 시기에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봐요. 시대에 맞게 운동의 방식도 다양하게 변화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분야에 따라서도 취할 수 있는 방식이 달라지고요.”

더불어 운동 분야나 형태가 다양화된 만큼 각각의 역할을 인정하고 평가도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곽 사무국장은 말한다. 각기 해야 할 일이 다른데 개별 분야의 문제를 사회운동 전체로 확대 적용하면서 활동가들이 너무 많은 비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활동가를 생활인과 구분 짓는 시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오히려 사회로부터 사회운동을 고립시킨다고 곽 사무국장은 지적했다. “활동가도 생활인이고, 생활하는 사람도 운동할 수 있어요. 활동가들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운동,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금만 더 여유로워졌으면 좋겠어요.”

 

성 평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없어요

세 명의 여성이 죽음을 맞이한 일주일이 있었다. 모두 여성 폭력 피해자들이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김홍미리여성주의 연구 활동가는 거리로 나가 시위를 했다. 하지만 사회는 무관심했다. 김홍미리 연구가가 속해 있던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한 여러 여성 단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지만 관심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2016년 5월, 강남역 근처에서 한 여성이 여성이라서 살해당했다.

★ 최근 여성주의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
김홍미리 활동가는 이 인터뷰 요청 자체를 놀라워했다. 사회운동계조차 여성주의 운동에는 거리를 두어 왔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의 외면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 문제에 쏟아지는 관심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런 반응이 반갑죠. 누구나 여성혐오와 페미사이드(Femicide) 이야기를 하고,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잖아요. 반응이 있을 때 새로운 국면이 열리거든요.” 무관심 속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응이 있으니 무엇을 더 이야기할지가 보여요. 수천 명이 포스트잇을 붙여도 일반화하지 말라고 하죠? 그러면 거기다 얼마나 더 이야기해야 그것이 보편의 경험이 되느냐, ‘난 아프게 살았어’라고 해도 ‘넌 안 아파’라고 할 수 있는 젠더 권력이 있다, 사회 구조의 문제다 하고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거죠.”

여성혐오(Misogyny)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언제나 있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김홍미리 활동가도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여성운동을 알게 된 후에야 아들 없는 집에서 막내딸로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됐다. 그 뒤 여성학으로 석사 과정을 밟은 김홍미리 활동가는 5년 9개월 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일했다. 폭력 피해자들의 전화는 끊이지 않았지만 사회는 무관심했다. 이로 인해 사람이 많이 죽는데도 세상이 조용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운동을 더 잘하고 싶어서.

그래서 강남역 사건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김홍미리 활동가는 말한다. 온라인에서 메갈리아의 등장, 데이트 폭력 폭로 사건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오프라인에서는 여성 단체들이 꿋꿋이 버텨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임계점을 넘은 거죠. 이전부터 이어져 왔던 흐름들이 강남역 살인 사건이라는 기폭제를 통해 터져 나온 거예요.”

★ 민주주의와 평등이 실현됐다는 인식이 문제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의견마저 여성 문제가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워해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일부만 문제다, 편 가르기는 안 된다, 미러링은 폭력적이다’와 같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폭력적이고 과격하다며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모습과 닮았다. “운동은 유기체예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변하기도 하죠. 비판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있지만 착한 말 콤플렉스 때문에 저항을 멈추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여성주의 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공통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직선제로 민주주의가 이뤄졌다고 여기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이만하면 충분히 평등해졌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민주화와 평등이 도래했다는 믿음은 권력을 공고히 하고 새로운 문제를 양산한다. 그래서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다시, 아니 매번 민주적이고 평등한지 되물어야 한다.

김홍미리 활동가는 민주주의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은 뛰어난 지도자가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몸으로 경험하고 같이 입술을 움직이면서 그 나라의 민주주의가 만들어져요. 품이 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풀뿌리로, 각자가 하나하나 실천해서 민주주의와 평등의 감각이 길러져야 하는 이유죠.”

 

사회운동은 민중에 맞춰 변해야 해요

2006년 대구에서 사진전이 열렸다. 암 투병 중인 사진기 수리공 김성민 씨를 위한 전시였다. 전시장에는 그가 살려낸 사진기로 찍은 사진이 걸렸다. 사진기의 운명과는 달리김 씨는 곧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김 씨처럼 자신의 손발로 정직하게 노동하는 사람을 찾아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는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그 결과 사진기 수리공 김성민 씨와 세공사 김광주 씨, 제과제빵사 이학철 씨, 선박수리공 황일천 씨, 이발사 문독식 씨, 철구조물 제작사 김기용 씨 등의 삶이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이라는 전시회와 책으로 남겨졌다.

★ 예술 자체가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것
“자기 기술로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이 돈 버는 재주가 있는 사람보다 시대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분들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어요. 보통 사람들의 위대함이랄까요?” 이 작업을 기획한 한상훈 대구 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사무처장은 예술을 통해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과거 사회운동 분야에서 예술을 보조적으로 바라봤던 시각에서 벗어나 예술 본연의 힘에 주목한 것이다. 대구 민예총에서 진행한 ‘탈춤 추는 B-boy 거리로 나서다’에서도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만 여겨지던 풍물굿을 예술화하면서 민중예술의 의미에 질문을 던졌다. 국악기와 서양 악기의 협연 속에 탈춤 추는 춤꾼과 비보이들이 춤 대결을 펼치다 함께 어울려 굿판을 벌이는 내용으로, 할렘에서 시작된 비보이 문화와 우리나라 전통 민중예술의 공통점에 주목하고 이들을 접목하는 예술적 실험을 통해 각 장르에 대한 편견과 한계에 의문을 제시한 것이다. “항상 의심하고 도전적이고 위험하고, 이런 것을 잘 드러나게 하는 것이 예술이에요. 예술은 정치가나 학자가 언어로 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요.”

한 사무총장은 같은 이유로 예술에 대한 통제를 경계했다.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꺼ㄴ내는 자체가 금기시되는 것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경계(境界)에 있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 대중 스스로 생각하고 자정할 능력이 있어요.”

★ 대중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려는 활동이 필요해
한 사무총장은 예술의 저항성만큼이나 대중을 신뢰했다. 그래서 지금의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와 인디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대중과 예술이 더 가깝게 만나도록 하는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지난해 초 대구에 문을 연 ‘오오극장’은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오오극장’은 대구 민예총과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미디어 핀다가 힘을 합쳐 추진하고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설립한 서울 이외 지역 최초의 독립영화전용관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 생각의 자유로움이 넓어져요. 이를 위해 대중들이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매개자 역할이 필요해요.”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은 예술운동만의 과제는 아니다. 시대가 변해도 운동의 형태가 과거에 머물러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모습은 대부분의 사회운동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다. 한 사무처장은 운동가들이 시대에 맞는 운동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운동은 시민운동인데 시민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접촉면이 얇았어요. 미시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 거시적인 것도 가능하거든요. 대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해요.”

 

발 디딘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운동이죠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던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학과 학술지에 소개하려고 방문했던 기관에서 진행하는‘사랑의 토요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죠. 토요일마다 장애인이 자원봉사자와 1:1로 짝이 되어서 사회 적응 훈련을하는 프로그램이라, 지적 장애인 짝을 만나러 집에 갔는데그 아이 방이 없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숨겨져 있는 다락방이 그 아이의 방이었어요. 장애인이라 숨기고 싶었던 거죠. 그밖에도 지체 장애인은 버스나 택시에 안 태워 주는 모습들을보면서 사회적 차별을 많이 느꼈어요. 자원봉사인지도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 자원봉사는 생활 속의 운동성 지녀
윤순화 사무국장이 몸담고 있는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는 자원봉사 정책 및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역 자원봉사센터를 지원하는 기관이다. 지역 자원봉사센터에서는 자원봉사자와 현장 연결, 자원봉사자 교육, 활동 실비 지원 등의 역할을 담당한다. 분명 시민 참여 활동이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자원봉사를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을까?

“자원봉사라고 하면 보통 남을 돕는 것, 온정적인 활동만 생각들 해요. 공익에 기여하는 것, 공익을 저해하는 요소를 차단하는 것이라면 모두 자원봉사의 주제가 될 수 있어요.” 실제로 자원봉사활동 기본법은 그 범위를 사회복지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환경, 교육, 인권에서부터 범죄, 질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공익 증진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윤 사무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독도를 지키기 위한 민간 활동이나 아동 학대 관련 법 개정 탄원 활동처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자원 활동도 자원봉사에 포함된다.

“저는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장에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 그게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자원봉사는 우리 사회의 빈 곳을 시민이 자발적으로 채운다는 측면에서 사회운동 영역 안에 있다. 그것도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시민운동의 형태로.

★ 시민의 성장과 사회적 연대가 절실
자원봉사의 운동성은 활동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한 시민들의 변화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윤 사무국장은 자원봉사를 통해 성장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공감 능력을 갖게 되고, 그걸 계기로 해서 인식이 많이 바뀌어요.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체계를 점검하자 하는 식으로요.”

그렇다. 지체 장애인과 하루만 다녀보면 비장애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턱과 계단이 이들의 움직임을 얼마나 제한하는지,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된다. 추상적으로 인식해오던 문제를 직접 경험하면서 사회 변화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시민 스스로 움직이고 참여하는 사회적 행동으로 쉽게 이어진다. “확장성은 시민에게서 나오잖아요. 자기 역할을 하는 시민이 많아지면 그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인 거죠. 자원봉사계에서 노력하고 있는 시민 참여를 통한 사회 변화는, 시민의식 성장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해요.”

이처럼 윤 사무국장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시민교육을 내세우는 동시에 사회적 연대를 강조했다. “지금 일어나는 사회 문제들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연대와 협력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해요. 여러 영역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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