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민주주의

정치난민이 된 짜란 교수와 실종된 태국 민주주의

정치난민이 된 짜란 교수와 실종된 태국 민주주의
글  박은홍 (본지 기획위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ehpark@skhu.ac.kr

태국의 한 대안언론에서 작년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로 프랑스에 피신해 있는 짜란 딧타피차이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태국에서는 2014년 5월 22일 쿠데타 이후 해외로 피신한 인사들의 수가 백 명 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짜란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이들은 쿠데타 직후 군부의 소환 명령에 불응하면서 해외로의 피신을 택했다. 또 대부분이 국왕모독죄 피의자 신분이기도 하다. 이렇듯 조국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이들은 일상생활, 직업, 사랑하는 가족들을 포기하고 해외 망명이라는 큰 결단을 내렸다.

 

현재 프랑스 정부로부터 정치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짜란의 삶은 ‘붉은색’ 그 자체였다. 68세의 활동가 짜란은 민주화 투쟁에 가담하였다가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그는 1976년 10월 6일 군과 경찰이 탐마삿 대학 내에서 집회를 하고 있던 학생들을 유혈진압했을 때 체포되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태국 동북부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태국공산당(CPT)에 합류하였다. 

짜란은 태국 군사정부가 과거 공산당 활동가들에 대한 사면조처를 내리자 7년 동안의 밀림 생활을 끝내고 방콕으로 귀환했다. 방콕에서 짧은 기간의 신문사 근무에 이어 5년 동안의 파리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랑싯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였다. 1998년 짜란은 군부 치하 버마 양곤에서 1988년 8월 8일에 일어난 8888 반군부 시민항쟁을 기념하는 유인물을 돌리다가 체포되어 강제 추방당했다. 그는 태국에서 1992년 5월에 있었던 수찐다 군사정부 퇴진 투쟁에도 참여하였고, 민주화의 성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1기 상임위원이 되었다. 

짜란이 다시 거리에 나서게 된 것은 탁신 친나왓 전 수상을 몰아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그가 참여한 쿠데타 반대 전국연대기구인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은 동참한 시위 대중들이 붉은 셔츠를 입었다는 의미에서 ‘레드셔츠’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2007년 왕실자문기구인 추밀원 의장 쁘렘 띤술라논의 주거지를 공격한 ‘레드셔츠’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세 번째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왕실 보위를 명분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군의 출두명령을 거부하자 출두명령 불응죄 뿐만 아니라 국왕모독죄 피의자가 되었다. 물론 이것이 바로 짜란이 해외 피신을 선택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다. 짜란은 현재 파리에서 태국 민주주의를 유린한 쿠데타의 부당함을 알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짜란을 진짜 힘겹게 하는 것은 이러한 ‘망명’이란 물리적 고통이 아니다. 젊은 시절 밀림 속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총과 칼로 진압한 군사정부에 함께 온몸을 던져 저항했던 그의 ‘동지들’ 대부분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옐로우셔츠’의 지도부 혹은 동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교수와 대학생 같은 지성인들 대부분이 쿠데타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란 셔츠를 입고 일관되게 반탁신 시위를 이끈 이른바 ‘옐로우셔츠’의 주역들은 누구인가? 우선 태국에서는 요일마다 색깔이 있는데, 국왕이 태어난 월요일의 색깔이 노란색이기 때문에 이들은 노란색 셔츠를 입고 있다. 또 대부분 방콕 중산층에 속하면서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갖고 있고 불교의 윤리 개념을 중시한다. 절제, 금욕 생활운동을 벌이는 ‘산띠 아속’ 같은 불교단체도 반탁신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산띠 아속’의 지도자는 청백리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잠롱 스리무엉 전 방콕시장이다. 

물질주의와 소비주의를 반대하는 공동체운동을 벌이는 민간 단체들도 ‘옐로우셔츠’를 지지한다. 이들은 재계 출신의 탁신이 태국 사회에서 ‘쾀뺀타이’(타이다움), ‘에까락타이’(타이 정체성)의 문화를 소비주의와 물질주의로 오염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볼 때 매번 선거에서 탁신을 지지했고 2006년 쿠데타 이후 선거가 다시 실시되면서 친탁신 정부를 탄생시킨 농촌 사람들은 불교의 악마인 ‘마라’와 같은 탁신에 현혹된 무지한 자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농촌 사람들이 교육받은 도시민들과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방콕 중산층, ‘전향한’ 민주투사들, 심지어 일부 NGO 활동가들까지 민주적 절차로서 선거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60년대에 군사정부의 슬로건이었던 ‘태국식 민주주의’가 2006년 9월 쿠데타 이후 지식인들 사이에서 다시 회자된 것도 이같은 배경을 갖고 있다.

 

태국 사회에서 푸미폰 국왕은 살아있는 부처로 인식되어 왔다. 푸미폰 국왕의 위세는 전형적인 입헌군주제에서의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불문율과는 거리가 있다. 이를테면 1973년 10월 군사정부에 항거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을 때 푸미폰 국왕은 탐마삿 대학 총장을 총리로 지명하고 과도의회 의원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와 몇 번의 쿠데타로부터 당시 총리이던 쁘렘 띤술라논 장군을 보호해주었다. 이러한 푸미폰 국왕은 ‘옐로우셔츠’에게 국가와 민족과 종교의 표상이자 국가윤리의 중심이다. 따라서 국왕과 왕실을 비난한 자에 대해 최대 15년형까지 내릴 수 있는, 국왕모독죄에 해당하는 형법 112조의 존재도 극히 당연해 한다. 

반면 일부 비판적인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에게 국왕의 신격화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구현을 방해하는, 또 군부의 정치개입 빌미가 되는 제도적, 문화적 걸림돌이다. 특히 이들에게 국왕모독죄는 전형적인 봉건적 악법이다. 물론 탁신에 대한 견해도 다르다. ‘옐로우셔츠’에게 탁신은 정치를 비지니스로 생각하는 영악한 정치인이지만 이들에게는 태국 경제를 소생시키고, 농촌 개발에 힘쓰고, 농민들의 주권의식을 각성시킨 근대화의 주역이다.  

작년 쿠데타는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 정부 축출을 목적으로 한 민주당의 수텝 터억수반 전 부총리 주도의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와 잉락 정부를 방어하려는 ‘레드셔츠’ 진영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일어났다. 수텝 전 부총리는 탁신뿐만 아니라 탁신의 지지자들에게 계속해서 권력을 안겨주는 선거민주주의의 승복문화를 거부했다. 그가 기획한 ‘방콕 셧다운’ 시위는 군부가 병영을 이탈하여 정치에 개입하도록 하는 결정적 명분이 되었다. 결국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부패한’ 잉락정부를 타도하겠다던 수텝 터억수반의 의도는 성공했다. 

 

현재 태국에서는 쿠데타를 이끌었던 쁘라윳 찬오차 육군참모총장이 과도총리에 올랐고 집회와 시위는 물론이고 언론매체도 통제되고 있다. ‘레드셔츠’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동북부 지역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더 심하다. 잉락 정부 전복에 성공한 수텝 터억수반은 절에 들어갔고 잉락 정부를 그토록 비난하던 아피싯 웨차치와 민주당 대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러한 침묵 속에서 쿠데타 발생 1주년을 맞아 14명의 학생과 활동가들이 불법시위를 벌였다. 이들을 체포한 군사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이들은 일단 풀려났다. 

격랑과 같은 태국 민주화 역사 속에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온 짜란과 같은 민주투사들의 투혼이 각인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조차 실종된 암담한 현실 속에서 14명 청년들로 시작된 민주주의를 향한 투혼이 태국 사회에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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