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민주주의

시민혁명과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근대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시민혁명  

 

오늘날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보편적 지지를 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수천 년 동안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무지하고 질투 심이 강한 군중들에게 정치권력을 맡김으로써 혼란과 무정부 상태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행해진 민주주의의 실천은 매우 예외적인 것에 불과했다.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공동선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7~18세기에 걸쳐 유럽과 북아메리카 에서 일어난 시민혁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련의 시민혁명들을 통해 정치 과정에 소수의 엘리트만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근대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시민혁명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봉건제를 타파하는 저항을 통해 발생했다. 봉건제도 하에서 사람들은 신분적으로 속박 당했고 종교적으로 억압당하였다. 그 위에 소수 귀족과 성직자들은 거대한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시민혁명은 이런 소수 지배계층의 특권체제를 타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특권 타파에 대한 요구는 기득권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절대왕정체제라는 봉건적 정치체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시민혁명은 절대군주의 자의적인 지배를 방지하고 봉건적 특권 체제를 타파하는 과정에서‘인권’(human right) 개념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결과적으로 선거권 확대와 인민주권론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시민혁명을 통해 처음부터 근대 민주주의가 일거에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근대 민주주의는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조금씩 진전되었으며 근대 민주주의라는 완결적 모습을 역사의 무대에 드러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영국의 사회_경제적 변화와 정치 균열구조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 영국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동을 경험하였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자본주의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영국 사회는 이런 사회_경제 변화를 겪으면 서 봉건사회의 고립 분산된 사회_경제 구조로부터 점차 통일된 국가경제 물적 기반을 확립해 나 갔다. 한편 통일된 사회_경제체제의 형성 과정과 궤를 같이 하여 정치적인 면에서도 중앙집권화 한 국가 형태가 발달하였다. 그 같은 국가는 절대왕정체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에는 절대왕정체제 속에서 여러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왕과 의회의 갈등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고 귀족과 젠트리(gentry)와 중소 상공인, 국교도 세력과 개신교 비국교도 세력과 가톨릭 세력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대립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왕과 의회의 대립은 다소 복잡한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 처음 의회는 국 왕이 필요해서 소집했는데 웨일즈, 스코틀랜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광범위한 과세를 위해서였다. 이렇게 소집된 의회는 국왕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대귀족들의 지배를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잦은 전쟁으로 인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자 의회의 영향력은 국왕의 통제를 넘기 시작했다.
초기 영국의 절대왕정체제는 봉건적 귀족계급을 견제했고 가톨릭을 억제했으며 의회를 존중하였다.

또한 젠트리와 중산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펴지 않았다. 그런데 1603년 엘리자베스 1 세가 죽은 후 조카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하여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제임스 1세는 의회를 무시하고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억압적인 전제정치를 실시하려 했다. 이 때문에 제임스 1세는 의회와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단명했던 청교도혁명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선대 국왕의 정책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때문에 의회와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찰스 1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 자금이 필요했으나 의회가 협조하지 않자 강제로 이를 차용하였다. 그러자 의회는 왕의 과세에 동의하는 대신‘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작성하여 왕에게 의회 권한을 인정해 주도록 요구했다.

의회의 요구에 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긴 하였으나 그 후에도 독단적인 정책을 계속했다. 찰스 1세는 엄격한 국교회 의식의 실시를 강행하였다. 이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에까지 확대시키려 하였는데 이 때문에 1640년 장로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찰스 1세는 11년 만인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여 전쟁 자금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왕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고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했다가 전황이 여의치 않자 다시 의회를 소집하는 등 일관성 없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자신감이 생긴 의회는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를 강화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추진하였다.그러자 왕은 이에 격분하여 친위군대를 파견하여 주모자 5명을 체포하려 시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은 1642년부터 1646년까지 왕당군과 의회군 사의의 내전에 돌입하였다. 내전은 처음에는 왕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나중에는 전세가 바뀌어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한 의회군이 왕당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혁명 후 의회는 향후 진로를 놓고 내부에서 대립하는 등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의회 내에는 두 파가 있었다. 다수파인 장로교도는 지주 귀족과 상층 시민계급 출신들로 구 성, 1648년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고 왕과의 화해를 선포하였으며 혁명군을 해체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독립파는 중소상공인들과 소젠트리, 소농 등으로 구성되었고 의회에서는 소수였던 반면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찰스 1세가 도주하여 스코틀랜드 군과 조약을 맺고 영국 국경을 침입한 사건을 계기로 영국 의회에 침입하여 장로교파를 추방하였다. 독립파들만으로 구성된 의회는 찰스 1세를 반역 재판에 회부하여 1649년 1월 궁 앞 광장에서 처형하였다. 이제 혁명으로 영국 기획연재 민주주의의 역사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 영국은 급격한 사회_경제적 변동을 경험하였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자본주의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영국 사회는 이런 사회_경제 변화를 겪으면서 봉건사회의 고립 분산된 사회_경제 구조로부터 점차 통일된 국가경제 물적 기반을 확립해 나갔다.

한편 통일된 사회_경제체제의 형성 과정과 궤를 같이 하여 정치적인 면에서도 중앙집권화 한 국가 형태가 발달하였다. 그 같은 국가는 절대왕정체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에는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은 이름뿐이었고 실제로는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파의 군사독재가 실시되었다. 정부 행정은 41명으로 구성된 국가위원회가 집행하였다. 의회는 해산되었다. 공화파는 형식적으로는 신앙의 자유와 간접선거에 의한 공화정을 주장하는 등 전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민주주의 실현보다는 엄격한 금욕 윤리에 입각한 군사독재로 나아갔다.

  명예혁명과 입헌정치의 개막  
크롬웰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이 호국경의 자리를 넘겨받았으나 크롬웰 치하의 통치에 염증을 느낀 인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그런 와중에서 세력을 회복한 왕당파가 1660년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찰스 2세를 왕위에 추대함으로써 왕정이 복구되었다. 찰스 2세는 공화정 시대에 제정된 모든 법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그 효력을 무효화했지만 전제적 군주정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과거에 폐지된 성실청, 고등종교법정 등 절대왕정의 전제적 기구들을 부활시키지 않았다. 공화정 시대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의 범위도 최소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찰스 2세는 전제적 권력을 누리기 위해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반란이 일어날 경우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제공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찰스 2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약속한 것이 치명적인 화근이 되었다. 1672년 찰스 2세는 관용령(Declaration of Indulgence)을 공포했는데 이것은 비국교도와 가톨릭교도에 대한 종교 의식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가톨릭교도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찰스 2세의 시도는 의회의 반대에 부딪쳐 좌초되었다. 그 후에도 종교 문제를 둘러싼 왕과 의회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하고 제임스 2세가 즉위하였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의회가 그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의회는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토리당과 그를 배척하는 진보적 성향의 휘그당으로 분열하여 대립하였다. 토리가 대체로 지주층과 국교회를 대표했다고 하면 휘그는 주로 상인층과 개신교계 비국교도를 대표했다. 제임스 2세는 처음에 가톨릭 신도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개인 문제로 국한시키는 한편 영국 국교회의 특권을 확인했으므로 토리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곧 가톨릭 부흥정책을 표면화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제임스 2세를 지지했던 토리당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에 의회의 토리당과 휘그당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1688년 왕의 딸인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 공 윌리엄 3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메리와 윌리엄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영국에 상륙하였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마침내 피 한 방울의 희생도 없이 무혈혁명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명예혁명이라고 불렀다.

  영국혁명이 근대 민주주의 형성에 끼친 영향  

 

명예혁명은 제 1차 영국혁명과는 달리 모든 당파가 합심하여 절대왕정을 타파한 사건이었다. 모든 당파가 합심, 왕에 대하여 의회의 우위를 확립하고 이런 조건에서 보수파와 진보파가 타협하였다.
명예혁명은 영국에서 입헌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의회의 정치적 위상은 확고 해지고 도시 상공시민과 지방 젠트리층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되었다.

당시 휘그파에서 일하던 존 로크(1632~1704)는 명예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자연법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며 인간이 계약을 맺고 국가를 형성하여 통치자에게 권리를 위탁한 것은 이런 자연권을 보다 확실히 누리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만약 통치자인 군주가 계약의 한계를 넘어 사회 구성원의 자연권을 유린한다면 인민은 정부를 전복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명예혁명은 제 1차 혁명에 비해 보수적이었지만 영국의 정치체제에 중요한 전환점을 이룩했다. 군주의 절대권한을 제한하고 귀족과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의 동의를 제도화시켰다는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을 통해 영국을 자유로운 사회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의회는 관용법(Toleration Act)을 제정하여 비국교회파 신교도들에게도 예배 참여할 수 있게 허용하였다.

하지만 명예혁명은 왕정을 존속시켰다는 점에서 제 1차 영국혁명보다 보수적 성격을 지닌 것이 었다. 또 근대 여러 혁명과 비교해 볼 때 명예혁명은 궁정쿠데타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회_정치적 권력 변화는 매우 제한적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훗날 에드먼드 버크 같은 보수주의 사상가는 영국혁명은 전혀 새로운 질서의 급진적 구축이 아니라 옛날에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 개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명예혁명은 제 1차 혁명에 비해 보수적이었지만 영국의 정치체제에 중요한 전환점을 이룩했다. 군주의 절대 권한을 제한하고 귀족과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의 동의를 제도화시켰다는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을 통해 영국을 자유로운 사회로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의회는 관용법(Toleration Act)을 제정하여 비국교회파 신교도들에게도 예배 참여할 수 있게 허용하였다. 그럼에도 영국혁명은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에서 멈췄으며 주권재민의 사상으로까지 발전 하지는 못했다. 또한 의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주로 재산이 있는 귀족이거나 신흥 부르주아지에 국한되었다는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진전되었을 뿐이었다. 결국 영국에서 근대 민주주의 발전은 유럽대륙의 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노동계급 출현에 따른 노동운동의 발전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글/고원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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