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종태열사 주37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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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종태열사 주37기 추모제

○ 일 시: 2017년 6월 11일(일) 12:00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일요일 2017-06-11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열사 정보

김종태(당시 22세)

1958년 6월 7일 부산 초량동에서 출생
1973년 서울 삼진 특수철 입사
1974년 소그룹 형제단 창단
1975년 8월 중학 졸업자격 검정고시 합격
1976년 3월 제일 산업중학 졸업
1977년 12월 금마실업 감원 퇴사
1979년 5월 제대 후 조나단 독서회 조직
1980년 6월 9일 17시50분 경 이대앞에서 “노동3권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광주학살 의분을 호소하는 전단을 배포하고 분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김종태 동지는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사판과 공장을 떠돌며,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77년부터 교회 청년들과 함께 전태일 추모회를 하는 등 동일방직사건에 많은 지원세력이 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다.


김종태 열사가 정신적 타격을 크게 입은 것은 79년 9월12일 Y.H사건 이후 “한울 야간학교”교사들이


경찰서로 연행되고, 학생들은 강제 해산될 때부터였으며, 방위병에 소집된 후에 그렇게 기다리던 민주주의가


광주학살로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80년 6월7일 열사는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내용의 유서를 이해학 목사님께 전달할 것을 당부하고,


5월9일 이대앞 네거리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동지를 생각하며


아! 이제 형은 가고 없다.


형은 철거민이 즐비한 천막밖에 없던 성남땅에 들어와 온갖 설움과 학대를 받았기에,


야학의 동료 노동자에 대해 너무나 애정이 깊었고, 공장운동을 소신껏 전개해 보겠다는


꿈 많은 젊은 23살의 노동자였기에 광주시민의 피에 깊이 가슴 아파했던 그는 자신의 꿈을 모두 우리에게 물려준 채 갔다.


공포와 억압이 환한 대낮에도 불같은 억압으로 닥쳐오는 시기이기에 친한 친구들마저 장례식에 참석할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조촐한 주위의 눈물 속에 갔다.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한 가까웠던 우리 친구들이,


그래서 가슴아파 했던 친구들을 남겨둔 채로......


 


유고글


<유서>


국민 여러분. 과연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하루 삼시 세끼 끼니만 이어가면 사는 것입니까?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수천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는 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지금 유신잔당들은 광주 시민 학생들의 의거를 지역 감정으로 몰아쳐(전라도 것들)이라는


식의 민심교란 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국민의 의사를 몽둥이로 진압하려다 실패하자 칼과 총으로 진압하고서,


그 책임을 순전히 불순세력의 유언비어 운운하여 국민을 기만하고 우롱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계엄철폐를 주장하면 계엄을 더 확대시키고 과도기간 단축을 요구하면 더욱 늘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도 학생들에겐 자제와 대화를 호소한다니 정말 정부에서 말하는 대화의 자세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안보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계엄령 확대와 시민의 감시 등을 위해서 전방의 병력들을 빼돌려


서울로 집결시키는 조치는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사리사욕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느꼈으며, 권력이 그렇게도 잡고 싶은 것인가를 새삼 느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국민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저력을 우습게 보고 있는 저들에게 따끔한 경고를 해주고 싶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말로가 어떻게 끝났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 싸질러서 국민 몇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몸을 던지겠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 사질러 광주 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없이 이 민족을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 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


<‘광주시민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中에서>


 


<일기>


1980년 3월 10일 밤.


나에게 인상이 깊었던 밤이다. 쌀쌀해진 시샘추위의 밤에 낮의 피로가 농축된 나의 눈동자는 나의 머리 위에


빛나고 있는 하나의 별을 보았다. 빛나고 있다기보다 그것은 하나의 불덩어리였다. 작은 태양이었다.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별은 나의 마음 속에 가득한 그 무엇을 주었고 그 숱한 시인들의 노래 속에 아로새겨둔 뜻과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숱한 시민들의 느낌을 나도 맛보았다. 나는 그 별을 한 5분간 지키고 서있었다.


나는 그 별을 보고 고요히 나의 마음을 가라앉혀 나의 마음의 물 속에 투영시켜보려고 애썼으나 끝내 나의 마음은


고요히 있지 않고 마구 흔들리고 출렁이었다. 공연한 우수에 잠겨 무언가 모방하려는 애씀이 마음 속에 그 별을


멋대로 채색하고 있었다. 나는 곧 두 눈을 감아버리고 별에 대해 등을 지고 마음 속에 전쟁을 상기하였으나,


그 별은 나에게 있어 새삼스런 아주 새삼스런 감동이었다.


 


<성명서>


10.26사태 이후 우리 국민은 19년간의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꽃피울 것을 꿈꾸며 말없이


정국을 지켜보았으나, 일당 독재의 연장을 꿈꾸며 정권을 탈취하려는 유신체제 잔당들의 음모와 계략으로


국민들의 기대는 무산되었으며, 작금 소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의 구성 등 군사 정권이 그 마각을 드러내고야 말았을 때,


모든 국민과 더불어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바이며, 광주사태의 책임전가와 왜곡보도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임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와 독재도 부정하며 목숨을 바쳐 항거할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러므로 유신체제를 존속시키려는 구체제 잔존세력들의 어떠한 책동도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경고한다.


1. 유신잔당은 전원 퇴진하라!


1.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군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


1. 김대중씨를 포함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전원 석방하라!


1980년 6월 7일 성남에서 김종태

국립5.18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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