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선영열사 31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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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선영열사 31주기 추모제

○ 일 시: 2018년 2월 25일(일) 12:00

○ 장 소: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행사 정보

일요일 2018-02-25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열사 정보

박선영(당시 21세)

1966년 9월 8일 전남 화순 출생
1985년 2월 전남여고 졸업
1985년 3월 서울교대 수학교육학과 입학
1987년 2월 20일 학내 비민주적 학사운영 및 미제국주의 매판세력의 지배를 받는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분노,
항의
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자결함

85년 서울교대에 입학한 후 수학과 학회 편집부에서 활동하였고, 교대에서의 학교측의 학회와 써클의 해체 조치 이후에는 교회 대학부 연합모임에 참가하면서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서울교대는 전두환 정권 시절의 다른 학교보다도 더 악질적인 교육관료들의 횡포로 인해 학내에 지하 취조실이 있을 정도였고, 그 또한 문제학생으로 지목을 받던 처지였다. 이런 현실에 맞서는 박선영 동지는 자신의 마지막 투쟁을 자결로 표현하였으나, 학교당국은 그런 그의 죽음조차 이성관계에 의한 자살로 왜곡하는 반인륜적인 작태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유 서 1

날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 딸 자식의 불효를 부디... 강하게, 바르게, 이 세상 떳떳이 살아가지 못함이 못내 부끄럽습니다. 언니. 진정 언니를 아껴줄 이에게 시집가길 바래. 미안.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벗들. 그리고 모두에게 강하게 살길 바란다. 내가 차지했던 공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메꿔나갈 것이니... 나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추측도 억측도 싫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유 서 2

“이땅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최소생활 유지를 위한 몸짓마저 모두 빼앗긴 채 죽어가고 있다. 이 한반도에는 외국자본에 의해 더 이상 자립경제가 발붙일 곳이 없어져 가고 있다” 라고 하면서도 민중의 아픔, 나의 본질적인 억압을 멀리하려고, 무관심한 나의 안일이 역겹다. 점점 민중들 그 의미도 잘 모르지만 그들과 함게 하길 꺼려하는 나의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고 싶지 않아서 가장 못난길을 택하고 만다. 갈 수 밖에 없는 나약함에 서글퍼 하면서.

추모글

동지가 걸어온 길 박선영 동지는 2학년초에 지하철 내에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읽다 한운봉 교관에게 걸려서 수많은 자술서와 반성문을 써야만 했다. 그녀의 일기장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교관이 스쳐 지나가면서 학생들이 보는 책을 유심히 관찰한다. 아! 그 눈초리 정말 싫다 싫어. 그는 어떤 인간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는가?” 박선영 동지가 현실사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어떻게 살아가고자 노력했는지는 다음의 일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사회는 날 미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니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에 대한 나의 외면이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이 땅 한반도에 사는 신종속국의 모든 백성이여! 패배자가 아니라 승자가 되어 후세에게 떳떳이 자랑할 수 있도록 일어나자 일어나자. 백두에서 한라까지 힘찬 행진으로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녀의 운동을 향한 강한 신념은 2학년 여름방학, 광주 집에 다녀 온 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기에서 나타나듯이 그녀는 운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부모님과 형제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진리인줄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부모님께 불효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고 그런 갈등속에서 교회 대학부 활동을 정리하고 나오겠다는 선언을 부모, 형제앞에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외면할 수 없는 것. 동지는 2학기 개강후 다시 교회활동을 시작했고 열심히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현실 상황은 여전히 그녀를 갈등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나는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투쟁하는 것이다. 투쟁과 자살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2학년 2학기에 그녀는 참으로 많은 방황속에서 투쟁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다. 평소에 그녀는 민중을 위해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자주 했으며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겨울방학을 맞아 어머니의 병환 간호를 위해 광주에 거취하다가 2월10일 경에 서울에 올라온 박선영 동지는 13일(죽기 7일전, 일기장에서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미 죽음을 결정한 후인데도) 몇몇 학교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밝고 명랑한 빛은 여전했으며 고민하는 친구에게 오히려 격려까지 했다 한다. 이처럼 그녀는 친구들에겐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동료이면서 선배의 역할까지 했으며 자신의 고민과 갈등을 스스로의 방황속에서 좀더 발전된 방향으로 이끌어 갈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그의 이상을 쫓기엔 현실이 너무 암담했기에 자기극복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죽은게 아니다. “죽어 다시 깨어나리라.” “진정 역사가 원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힘을 길러 나오리라.” 그렇다. 죽음 이후에도 ‘이성관계로 인해 자살했다’라고 학교당국은 매도했으나 87년 6월 억압적인 교대의 현실을 거부하고 들불처럼 일어난 교대 학우들의 빛나는 투쟁 이후 박선영 동지의 죽음은 새롭게 재조명 되었다. 그리하여 교대의 자주와 민주를 갈망하는 학우들과 민중들의 가슴에 새로이 부활의 꿈을 안고 돌아오리라 믿는다.


국립5.18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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