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F 리포트 - Issue & Review on Democracy] 민주화 30년, 6월 민주항쟁과 촛불집회의 의미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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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국정농락사태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는 이미 곳곳 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의 자유 지수, 이코노미스트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의 민주주의 지수와 같이 세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진단하는 다양한 지표들은 한국이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민주 주의 수준이 하락하고 있음을 경고했다. 유엔 특별보고관은 한국에서 집회·결사의 자유가 침해받고 있음에 우려를 표명하였고, 대선시기 박근혜 대통령을 ‘독재자의 딸’ 로 표현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외국 유력 언론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온라인, 언론 통제 등 민주주의의 퇴행을 비판해 왔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와 퇴행은 명확했다. 대선에서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세월 호 사건 등에 대한 정권의 대응은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투명하게 해명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기관을 동원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특히 검찰과 검찰 출신 인사들로 이루어진 ‘검찰세력’은 사법, 행정은 물론 의회에서까지 종횡무진 활약 하며 국정을 좌우했다. 사법통제와 언론통제 속에서 정권 반대자에 대한 억압은 비판 세력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에 빠지게 하였다. 동시에 정권은 법치주의와 같은 프레임 으로 내부의 적을 끊임없이 양산했고, 재벌과 어버이연합 등 보수·관변단체를 총 동원 하여 여론을 왜곡하고 위기를 조장하였다.

OECD 최고의 자살률(10만 명당 28.7명, OECD 평균인 11.8명은 물론 한국 다음으 로 높은 일본 18.7명보다 높음)을 기록할 정도의 삶의 위기와 빈곤층 하위 10% 대비 부유층 상위 10%의 평균소득이 10.1배에 달할 정도의 극단적 불평등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국민들을 광장으로 이끌어 낸 것은 개인 또는 우리의 위기와 힘듦이 아니라 부도덕한 국가였다. ‘이게 나라냐’라는 촛불집회 구호에서 나타나듯이 국가의 배신은 국민들이 ‘선거 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광장에서 자신이 주권자임을 선언하도 록 하였다. JTBC 보도로 드러난 전대미문의 국정농락 사건은 마치 87년 5월 정의구현 사제단이 폭로한 박종철 열사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 조작이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켜 6월 항쟁을 촉발했듯이 연인원 1천 만 명 이상의 촛불집회를 초래했다.

6월 항쟁 이후 발전하던 민주주의는 거듭된 퇴행 끝에 형식적 수준의 민주주의조차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직면했었다. 2017년 30주년을 맞는 6월 항쟁은 민주주의를 쟁 취한 국민들의 힘으로 다시 생환하고 있다. 촛불집회는 국민들이 6월 항쟁으로 쟁취 한 민주주의가 비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다는 ‘대통령 직선제’에 국한된 것이 아 니라 국민들이 위임철회와 ‘진퇴’를 명령할 수 있다는, 국민주권의 완성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촛불집회의 결과가 주권자인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귀결될지 아니면 87년 대선처럼 역사의 반복으로 귀결될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있는 6월 항쟁 30주년 기념 식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6월 항쟁은 군부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여 국민들의 힘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고 민주화 이행을 추동한 반독재 민주항쟁으로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6월 항 쟁은 1987년 6월 10일 ‘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610 대회)부터 6.29선언까지, 보다 길게는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29선언까지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와 호헌조치에 맞서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와 민 주화 이행을 요구하며 진행된 민주항쟁으로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 개정과 민주화 이행이 시작되었다. 6월 항쟁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이전의 4·19 혁명 과, 5·18 민중항쟁 등 일련의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후 87년 노동자 대 투쟁과 88년 총선에서의 여소야대 정국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6월 항쟁을 계기로 비록 군부 권위주의세력의 즉각적인 퇴진과 과거사 청산을 가져오지는 못하였지만 민주주 의가 발전함으로써 경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높은 성취를 거둔, 명실상부한 선진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6월 항쟁과 민주화 이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쟁점이 존재한다.첫째 한국에서 민주화 이행을 만들어낸 주도세력, 즉 한국 민주화에 누가 기여했는가 하는 것이 다. 둘째,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어떠했는가하는 것으로 6월 민주항쟁이 자체의 힘에 의해서 추동된 것인가 아니면 외부의 영향력이 주요했는가 하는 것이다. 셋째, 개별 사건, 단체, 인물 등에 대한 평가의 변화다. 관련자의 자서전 발간이나 구술, 새로운 자료의 발견뿐만 아니라 평가 기준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먼저 한국에서 민주화를 추동한 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한국의 민주화 이행이 위로부터의 민주화 내지 타협에 의한 민 주화였다는 것에서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한국에서 6월 항쟁이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전복 내지 직접적 퇴진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민주화 이행에서 국민들의 민 주화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거나 심지어 위로부터의 기획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6월 항쟁이 아닌 6.29선언에 초점을 맞추고 6.29선언이 민주화 이행을 가 져다주었다고 주장한다. 소위 ‘보수 주도론’으로 전두환, 노태우 진영과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90년대 초반부터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과 노태우 진영은 자서전 등 을 통해 각기 자신들이 6.29선언을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이를 근거로 자신이 민주화 이행에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보수언론에서는 ‘타협’ 내지 ‘점진 적’ 민주화가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6.29선언이 자 발적인 것이 아니라 경찰력만으로 진압이 불가능할 정도로 거센 국민들의 저항에 직 면해서 어쩔 수 없이 발표되었다는 점을 애써 무시한다는 점에서 일방적인 자기 합리 화에 불가하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6.29선언이라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축적된 민주화운동에 의해 쟁취되었다.

다음으로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이다. 해방 후 미국이 한국 정치에 영 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해 왔다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6월 항쟁과 민주화 이행 과정에 서도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6월 항쟁 당시부터 운동세력 등에 의해 제시되었던 입장으로 특히 전두환 정권의 군대동원을 미국이 제지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한국군의 실제적인 출동 가능성이 미 국이 군대동원에 반대의 입장보다 중요하다. 즉 전두환의 출동 명령에 군이 5.17 쿠데 타에서와 같이 따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군부에서 광주 5.18에 대한 경험 등에 의해 반대의 목소리가 존재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올림픽과 정권이양을 앞두고 광주 이상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무력진압은 전두환이나 이 후 집권을 도모했던 노태우 세력은 물론 군이 진압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그와 같은 진압에 대한 군내부의 부정적인 태도는 전두환이 군출동시 자신에 대한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지를 고려케 할 정도였다. 다음 으로 5.18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를 적극 적으로 추진하기 보다는 일정한 수준에서 관리하려는 입장에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 서의 민주화 이행 과정이 큰 틀에서 자신의 구상안에 있도록 관리하고자 했을 수는 있 다. 하지만 민주화를 추동한 6월 항쟁은 한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이 만들어 낸 것이지 미국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구조결정론과 같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아래로부터의 역동적인 전개를 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끝으로 당시 민주화를 주도했던 세력이나 단체, 인물, 사건이나 전략 등에 대한 평가 변화이다. 이는 새로운 자료나 증언 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평가기준의 변화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세부적으로 국본이나 학생운동의 역할, 노동자 대투쟁과 6월 항쟁의 관계, 대선 국면에서 민통련 방침, 민주화 과정에서 양김씨의 역할, 야당의 역할,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 군의 상황, 정치협상에 대한 태도 등이 그 대상이다. 아직까지 6월 항쟁 관련한 국내외 자료가 완전히 공개 내지 발굴되고 있지 않고 또 관 련자들의 구술채록 등도 아직은 미비한 상황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평가나 사실관계 의 수정이 불가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6월 항쟁의 의미나 기여 등 큰틀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6월 항쟁은 한국 민주주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한국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되 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은 최근의 촛불집회에 대한 외국 언론의 칭송이 아니 더라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역동적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 차원에서도 주목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내에서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념 덧씌우기나 폄훼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민주화운동을 축소 기술하거나 역사전쟁화 하려는 시도도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민주화 이행이 진행되 었지만, 민주주의 발전이 지체되고 있거나 퇴행한 한국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필요한 것은 과거로서 6월 항쟁에 대한 형 식적 제도화가 아니라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진단과 성찰이라는 ‘적극적 제도화’이다.



민주주의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으로 발전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발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후퇴하기도 한다.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이행이 시작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현재의 민주주의가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87년 6월 항쟁에 이어 진행된 노동자 대투쟁은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지난하게 이어진 민주화운동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백서에 따르면 김영삼 정부 및 이후 시기에도 인정사건이 337건에 달하며, 이 중 반 독재운동에 해당하는 경우도 무려 163건에 달 하고있다.민주주의를위한실천은정권비판,노동,농민,학원,통일,언론,출판등전 통적 민주주의 영역뿐만 아니라 환경과 여성, 소수자, 다양성, 청소년, 비정규직, 안전, 생명등새로운영역으로확산,다양화되고있다.

2016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는 이러한 지속적인 민주주의 실천의 연장선상 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6월 항쟁과 30년 뒤의 촛불집회는 민주항쟁 30년 주기설 까지는 아니더라도 6월 항쟁의 시작과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시위의 규모와 양 상이라는 측면에서 상호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선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6월 항 쟁과 촛불집회는 정권의 취약한 정당성과 그것을 무마하기 위한 권위주의적 통치(언론 통제, 사법부 통제, 정경·권언유착, 국회 무력화)의 강화, 국민들의 선거를 통한 정치적 의사의 표출(정치적 대안의 조직화), 정치적 대안의 한계(무력화된 제도정치와 이기적 정당), 촉발요인의 발생, 전 국민적 항쟁(전국동시, 단일구호, 참여의 확산), 제도화(정 치권 중심)라는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권의 취약한 정당성과 그것을 무마하기 위한 권위주의적 통치는 필연적으로 권한 의 집중을 가져오고,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YH 사건의 사례와 같이 모든 사건 이 정권의 정점으로 향하는 취약성을 노정하게 된다. 그 결과 정당성의 결핍의 심화와 억압적 통치의 강화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5.17 쿠데타와 광주 학살로 정권을 찬 탈한 전두환 정권은 태생적으로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은 물론 사법부, 언론계, 출판계, 학계, 문화예술계 등 비판 세력에 대한 숙정과 통제, 검 찰, 경찰, 안기부, 국세청, 기무사와 같은 권력기관을 정점으로 하는 강권통치로 정권 을 유지하였다. 박근혜 정권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했으나 정권의 정당성과 직결 된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과 국가 운영과 관련된 각종 의혹 제기에 대해 합법적이고 투 명하게 처리하기 보다는 검찰에 대한 통제와 정치사찰, 언론통제와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 등으로 무마하려고 하였다. 세월호 7시간 의혹,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 등의 사례 에서와 같이 문제를 파악하고 개선하기 보다는 진실호도와 ‘유언비어에 대한 처벌’과 같은 반대세력에 대한 겁박과 사찰, 언론 통제라는 권위주의적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동시에 법치, 노동개혁, 바른 역사교과서 집필이라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내부의 적을 양산하였다.

85년 2.12 총선에서 국민들이 선명야당으로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발표한 신민당 을 지지함으로써 민주화 의사를 표출한 바와 같이 2016년 총선에서 국민들은 여소야 대 정국을 형성함으로써 정권의 통치방식을 변경할 것을 요구하였다. 85년 신민당의 등장과 2016년 여소야대 국회는 이전의 관제화된 국회나 여대야소의 국회에 비해 국 민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출해 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지만 공히 그것을 관철 시킬 정도의 힘을 갖지는 못하였다. 신민당은 개헌저지선을 확보했지만 소수정당으로 서 민주화를 추동하거나 국회를 주도할 힘을 갖지 못하였고, 여소야대 국회는 개혁입 법을 추진하고 정부의 독주를 다소 제어할 수는 있었으나,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을 변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따라서 선거를 통해 표출된 국민들의 의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였고, 신민당과 이후 촛불집회 과정에서 대통령을 탄핵하지 못하는 여소야대 국회라는 정치적 대안은 각각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저항을 조직하게 된다. 6월 항쟁 이전 박종철 고문치사나 4.13 호헌에 대한 규탄 시위 국면, JTBC의 보도 이전의 촛불집회 국면까지만 해도 저항이 점차 확산되 고 있었지만 전 국민적 항쟁을 예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 하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6월 항쟁에서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정의구현 사제단의 발표가 있었고, 촛불집회에서는 JTBC의 최순실 태블릿 PC 문건에 대한보도가있었다.특히 집회와 시위 직전에 발생한 87년 6월 9일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과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는 부도덕한 정권의 실상을 고스 란히 드러내 줌으로써 국민들의 참여는 급속도로 확산된다.

6월 항쟁과 촛불집회의 가장 큰 유사점 중 하나는 조직되지 않은 시민의 참여가 성공을 좌우 했다는 것이다. 6월 학생 시기 소위 ‘중산층’, ‘넥타이 부대’라 불렸던 운동 세력과 대비되는 ‘일반 국민들’이 참여했다면, 촛불집회에서는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 이 가족단위나 또는 스스로 모임을 조직하여 참여했다. 이들의 참여는 단순히 ‘다수’를 형성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를 ‘주권자로 호명하는’ 즉, 정치의 주체로 전환 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들이 참여한 이유는 정권에 대한 분노가 일차적이겠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요구’와 ‘쉬운 참여방식’도 중요했다. 촛불집회에서 일제 소등은 6월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 소위 ‘땡전뉴스’에 맞춰 일제 소등하는 방법으로 참여 할 것을 제시한 것과 동일한 방법이다.누구나 참여할수있는 퇴근시간(6월)과 주말(촛불)에 진행했다는 점, 각 지역에서 편의에 따라 전국에서 개최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평화적으로 참여할 것에 대해 강조했다는 점도 공통 적이다.

6월 항쟁에서 전국 동시다발 투쟁은 경찰로 하여금 진압을 어렵게 함으로써 항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고, 촛불집회에서 전국동시 집회는 전 지역에서 시민참 여를 추동하고 전국적인 연대를 확인하는 한편 지역에서의 민주주의를 확산하는 계기 가 되었다. 양자는 공히 이전에 비해 평화적인 방식으로 전개 되었고 단일 요구사항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87년을 전후로 하여 학생운동을 필두로 한 민주화운동 진영은 대중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 연장선 상에서 민주화를 요구 하는 모든 세력이 ‘4.13조치 철회 및 직선제 쟁취’를 요구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본부’(국본)라는 ‘최대다수연합’을 형성하였다. 촛불집회에서는 국본과 같은 조직은 없으나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집회를 주관하고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 내지 ‘탄핵’이라는 비교적 단일 요구사항을 내세우고 있다.

촛불집회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6월 항쟁 당시 대중노선을 표방하는 한편 평화적인 참여를 강조한 것과 같이 무엇보다 참여 주체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양자의 집회 또는 시위의 전개 양상의 차이 는민주화의수준과경찰의진압방식및집회보장여부에따라차이점을드러낸다.촛불집회가 완전평화집회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의식 성숙 뿐만 아니라 전근대적인 통치 행태에 대한 95% 이상의 압도적인 국민 비판 여론과 정권교체 가능성, 촛불집 회 참여자 수 등이 전향적인 법원의 집회에 대한 판결과 경찰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는 6.10대회 전날 대대적인 검문과 가택연금, 100여개 대학 등에 대한 수색을 하고, 당일에는 불법임으로 원천봉쇄 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원천봉쇄하는 등 초강경책으로 대응하던 전두환 정권에서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외에도 6월 항쟁 당시 전두환이 국회에서 합의하면 개헌을 받아들이겠다는 주장 과 같이 박근혜 대통령도 국회에서 합의가 있으면 퇴진을 고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국회에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는 점, 시위 규모가 크다보니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인 원도 많아졌다는 점, 다양한 전문가 집단과 단체의 성명서와 시국선언이 연이어 전개 되었다는점,소수 언론에서 시작되어 언론 전체로 확산된 언론보도양상 등 많은 공동점이 있지만 가장 큰 공통점은 국민들이 직접 자신을 ‘주권자’로서 호명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만들고 또 지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야 6.29선언이나 탄핵 동조와 같은 방식으로 최소한도로 받아들였다.



연인원 천만 명 이상의 촛불집회로 이제 한국사회는 소위 386 민주투사뿐만 아니라 전연령, 전지역, 전계층이 민주화 대열에 참여한 경험을 갖게 되었다. 특히서울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서 발생한 촛불집회는 6월 항쟁의 성과를 제약한 지역주의를 넘어선 지역간 민주주의 연대로 이어질수도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갖고있다. 촛불 집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대다수 국민들이 스스로가 자신을 주권자라 호명하며 공 동체의 일에 참여하는 ‘주체로서 시민’이라는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촛불집회는 6월 항쟁의 완성과 결과의 반복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마치 30년 전 백만의 시민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듯이, 30년 후 오늘 다시 백 만의 시민이 모여 일단의 권위주의 세력들이 망가트린 민주주의의 복원은 물론, 민주 주의를 보다 발전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들이 정치협상을 정치권에게 맡겼던 6월 항쟁 당시와 달리 정치의 주체로 참여하고자 온라인 대표를 선출하거나 시민의회 와 같은 공론장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여전히 대표성이나 책임성 등 의 측면에서 대의제 정치 이상의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촛불집회의 보다 큰 한계는 6월 항쟁에서와 같이 제도화 과정에 시민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그러한 현실이나 헌재에 의해 탄핵이 기각될 가능성에 있지 않다. 우선 촛불 집회는 여전히 6월 항쟁과 같이 최대다수연합에 근거해 있다는 점이다. 광장에 있는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나 세월호 등 국민적 사건을 제외한 그외의 연대에 대해서는 거의 경험이 없다. 당장 어떤 선거에서 어떤 후보를 지지 할것인가는 물론 환경, 소수자, 청소년 같은 다양한 이슈들을 어떻게 함께 해결할지에 대해서 는 경험한 바가 없다. 즉 국가적 수준의 공동 문제에 대한 연대로서 ‘집합적 다수’는 존재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과 요구에 근거한 소수들의 ‘연대로서 다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음으로 장기간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촛불집회는 일상적 정치 참여가 아니라 예외적인 분출에 가깝다는 점이다. 촛불집회는 국민들이 직접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을 쟁취했던 6월 항쟁에 이어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를 물러나게 하는 민주주의를 통해 국민주권을 완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주권자로서 국민이 자신의 주권을 위임하고 또 위임을 철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촛불집회는 온전한 ‘국민 주권’의 행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촛불집회는 선거 날에만 자유로운 시민을 넘어 일상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정치’로 이어지고 있지는 못하다. 시민항쟁은 역사적 으로나 일반적으로나 임계점이 매우 높다. 따라서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선거와 예외 적으로 전개되는 항쟁의 사이를 매개할 정치적 영역, 즉 시민정치의 영역이 필요하다. ‘시민정치’는 권력을 대표에게 위임하거나 정치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의 주체인 시민의 정치를 통해 일상적으로 통제되고 분배되고 공유하는 정치이다. 시민정치는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대행자에 의한 주체 없는 민주주의를 넘어 ‘구성원으로서의 시민과 주체로서의 시민이 일치되는 정치’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의원 정수와 비례대표 확대, 결선투표제나 선호투표제와 같은 반응성이 높은 정치 제도의 도입, 지방자치의 확대, 협치의 확대와 같은 정치혁명과 무엇보다 일상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훌륭한 시민이 요구된다.

참고문헌

1) 김원외.2012. 인문정치와주체:역사,이론,그리고현실.경북:열린길.
2) 김윤태 외. 2014. 한국 정치, 어디로 가는가: 새로운 정치를 찾아서 .서울: 한울아카데미.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한국민주화운동사 3 . 서울: 돌베개.
4) 한국정치연구회 편. 2010. 다시보는 한국 민주화운동: 기원, 과정, 그리고 제도 . 서울: 선인 5) <한국, 역동적 민주주의 모범>. 2012. <<중도일보>> 2012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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