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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민주주의 배움터 3강 후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 배움터 3강 후기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지난 12월 11일(목)에는 2014 민주주의 배움터 세 번째 강좌 “대한민국과 민주공화국”이 박찬승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님의 강의로 진행되었습니다.

헌법 제1조에는 그 나라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

박찬승 교수는 현행 헌법 제1항과 2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이 간단한 문장이 임시정부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짚는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프랑스 헌법 제1조에서 평등을 강조한 것이나, 미국 헌법 제1조에서 자유를 강조한 것이나, 독일 현행 헌법 제1조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국가는 이 불가침의 원칙을 확인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닌다”로 되어 있는 것이나, 어느 나라든지 헌법 제1조에는 자신들의 역사가 깊숙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는 1918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 있는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의 내용을 대부분 차용했지만 ’민주공화국‘이라고 쓴 것이 특이하다고 볼 수 있죠. 

로크와 몽테스키외의 민주정치론

박찬승 교수는 우선 민주주의와 공화국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때 쓰였던 ‘민주주의’를 다시 불러낸 것은 다름 아닌 16,7세기 자유주의 사상가들이었는데요. 특히 로크와 몽테스키외를 들 수 있습니다. 로크는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제군주제, 귀족정 보다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인민주권, 국가 내 권력의 분립, 입헌군주제, 의회, 다수결 제도 등을 주장했습니다. 로크는 국가 내 권력의 분립을 입법부와 행정부로 나뉜 이권 분립을 얘기한 한편, 몽테스키외는 여기에 사법부도 분리시켜 3권 분립을 주장했습니다. 한국정치사상사에서 많이 소개되면서 큰 영향을 미친 게 바로 이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이었다고 합니다. 로마 이후에 공화주의가 등장한 것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었는데요.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원로원과 민회의 힘의 강약에 따라 귀족정의 요소가 강한(귀족 중심의) 공화국과 민주적인 요소가 강한(평민 중심의) 공화국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민주'와 '공화'의 번역

박찬승 교수는 조선왕조 시대에도 ‘공화’라는 말이 간혹 등장하긴 했지만, 왕조시대 ‘공화’라는 말은 역모의 혐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불온한 말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 속에서 ‘공화’라는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Republic"이란 말을 1845년 일본의 미스쿠리 쇼고가 ‘공화’로 번역했고, “Democracy"는 <만국공법>을 쓴 윌리엄 마틴이라는 사람이 1863년에 ‘민주’로 번역했는데요. 사실 ‘민주’라는 말도 원래 ‘백성의 주인’ 곧, 왕이라는 뜻이었는데 윌리엄 마틴이 거꾸로 의미를 번역해서 ‘민주’라고 번역한 것이라고 하네요.

의회없는 대한제국의 운명

어쨌든, 한국에서는 1880년대 개화파들이 서양의 정치사상을 배우면서 서양의 정치용어가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민의 평등권을 보장하고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제한군주제’를 도입하고자 했습니다. 아직 서양식 입헌 군주제 정도까지는 가지 못했던 거죠. 독립협회도 1898년 독립신문을 통해서 모든 인민은 천부의 인권을 갖고 있으며, 백성은 나라의 주인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은 갑오개혁 때 만들어진 ‘중추원’을 사실상의 의회로 탈바꿈시켜, 이를 통해 군주와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했죠. 그렇지만 고종은 독립협회를 ‘공화정’을 만들고 있다는 혐의를 두어서 강제로 해산시켜 버립니다. 그에 더해 고종은 1899년에 <대한국국제>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국’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표현은 조선왕조 사상 처음 쓰는 표현이었습니다. 사실 조선시대에 전제군주는 연산군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박찬승 교수는 말합니다. 신하들 눈치를 항상 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우리는 왕조시대라고 하지만 사실 왕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아니었던 거죠. 결국 중추원이 의회가 되지 못하고 무력한 상황에 처해 버렸는데, 그 결과 을사조약(1905년), 정미7조약(1907년), 병합조약(1910년) 등이 있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나라는 외국과 중요한 조약을 맺게 되면 반드시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 하는데 우리는 중추원이 제대로 의회의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왕이나 왕의 위임을 받은 몇몇 대신들이 도장을 찍어 이런 조약이 진행되고 말았죠. 당시 독립협회 사람들이 제안했던 입헌군주를 받아들여, 중추원을 의회의 기능으로 전환했다면 대한제국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박찬승 교수는 이야기합니다.

입헌군주제로의 모색

한편,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양 정치사상이 새롭게 소개되었는데, 몽테스키외가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그의 3정체설(공화제, 입헌군주제, 전제)과 귀족공화제, 민주공화제의 공화제 2종설을 소개하는 <국가의 개념>이란 글이 당시 학술지에 실리기도 했구요. 원영의의 <정체개론>이란 글에서도 이를 소개하면서 민주공화국이 상당히 앞선 제도이긴 하지만 문명이 상당히 발달된 상황에서나 가능하다고 보면서, 당시 한국의 경우에는 민주공화제가 시기상조라고 하며 입헌군주제가 최선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1905년 이후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었지만 이미 일제침략이 본격화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1907년 신민회가 비밀결사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서도 공화제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나타났죠. 물론 신민회의 강령이나 문서 속에서는 공화제로 간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공화제라는 이름을 꺼내면 대한제국에 대한 반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공화제라는 용어를 꺼내기 어려웠을 거라고 박찬승 교수는 분석합니다. 그러나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미주에서 발간되는 공립신보의 사설에서는 국민국가론과 국민주권론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과 공화주의의 확산

1910년 국망 이후에는 임시정부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런 가운데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서게 되면서,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공화주의가 확산되긴 했지만 1910년대에는 아직 그 정도가 미약했습니다. 대부분 입헌군주제를 염두해 두고 있으면서 국내의 고종과 연계를 꾀하려고 했지만 다 부질없게 되어버렸죠. 1917년 상해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서 ‘대동단결선언’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주권은 국민에게 넘어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국망을 통해 황제권은 소멸하고 민권이 새로 발생하였으며, 따라서 ’구한국 최후의 날은 신한국 최초의 날‘이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박찬승 교수에 의하면 결국 이 대동단결 선언이라는 것은 향후 세워질 국가는 공화제 국가가 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동단결선언문>

 

1919년 3.1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났을 때 여러 전단을 통해서 너 다섯 가지 임시정부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임시정부안들 대부분이 공화제를 염두해 두고 있었으며 입헌군주제를 전제로 한 임시정부안은 하나도 없었죠. 박찬승 교수는 이런 상황이 빚어진 것은 신해혁명(1911년)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이후의 러시아 혁명(1917년), 독일혁명(1918년) 등을 통해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들이 무너진 것에 기인한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구상에 따라 러시아에서는 ‘대한국민의회’라는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서는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구성되었죠.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에서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선포했는데요. 그 때부터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헌장을 기초한 사람이 조소앙 선생이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그는 일본 명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몽테스키외의 내용들을 알고 있었고, 그 영향으로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을 넣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왜 다른 나라들이 쓰는 것처럼 ‘공화제’로 하지 않고 ‘민주 공화제’로 했을까요? 박찬승 교수는 당시 양반중심의 귀족 공화제는 아예 처음부터 배제한다는 의미에서 ‘민주 공화제’로 못밖은 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1919년 9월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져 <대한민국임시헌법>을 만들었는데, 신익희 선생이 주도하여 만든 헌법 제1조에서는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으로 바뀌어 제정됩니다. 그러나 그 이후 1925년 임시헌법에서는 다시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이 들어가게 됩니다. 박찬승 교수는 이렇게 헌법 제1조의 문구가 바뀌는 것은 헌법 제정 당시 조소앙 선생이 참여했는지 여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고 진단합니다. 결국 몇 차례의 변경을 거쳐 44년 임시정부의 마지막 임시헌장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이 최종적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한편 1930년대부터는 여러 정당들이 들어서서 정당 중심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모두 다 조소앙 선생이 제창하고 있었던 3균주의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즉 정치, 경제, 교육에서의 균등을 강조했죠. 그러던 중 37년 통합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고, 이후 1941년에 임정에서 건국강령을 발표하는데, 조소앙 선생이 강령을 쓰면서 강령 총강 제1장에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권리를 균등히 하여 고하가 없게 한다’고 하며 건국의 이념이 ‘삼균주의’에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해방 이후의 제헌헌법

해방 이후에는 좌우 대립이 심각했는데, 각기 새로이 세울 국가의 정치체제를 구상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각 진영에 지향하는 국가체제를 요청했는데, 우파는 민주공화국 체제를, 좌파는 인민공화국 체제를 제출하게 되죠. 박찬승 교수는 이 둘 사이의 핵심적 차이점은 몽테스키외가 얘기한 삼권분립 체제이냐 아니냐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의해 각각이 따로 선출되는 반면, 북의 경우에는 최고 인민회의에서 내각, 사법부, 입법부를 다 선출한다는 것이 차이가 있는 것이죠. 어쨌든 이미 이때부터 좌파에서 제출했던 정치 체제는 모두 인민공화국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 내내 우파쪽은 민주공화국을, 조선공산당의 좌파쪽은 인민 공화국을 얘기하고 있었으니까요. 해방이후 이런 좌우대립을 거쳐 1948년 5.10 선거가 있고 제헌 국회가 구성되어 제헌헌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당시 유진오 박사가 이 헌법을 기초했는데요. 이때 그가 참고한 여러 가지 기록 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과 마지막 임시헌장이 들어 있습니다. 아래 박찬승 교수가 구분한 표를 보시면 제헌헌법의 체제가 44년 임시 헌장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제헌헌법과 임시정부 헌법의 구성 비교 - 박찬승 교수>

'건국절' 논란에 대하여

당시 제헌헌법을 만들 때 이승만의 경우에도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박찬승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최근 ‘건국절’ 논란에 대해서도 입장을 이야기합니다. 박찬승 교수는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일’이라고 일부러 썼다는 주장합니다. 임시정부 맥을 잇고자 했던 것이죠. 1919년 임시정부에서 민국 1년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년호도 ‘민국 30년’이라고 썼습니다. 이승만은 분명히 대한민국 정부 출발이 1919년이라고 강조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정통성의 문제였던 것이죠.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북을 의식해서 임시정부를 승계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19년부터 48년 과정이 건국과정이었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48년 당시에 제헌국회에서는 ‘건국’이라고 표현한 게 아니라 ‘광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일부러 ‘건국’이라는 말을 피했던 거죠. 박찬승 교수는 이러한 설명에 덧붙여 광복절을 건국절로 고치려고 하는 건 매우 얕은 생각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관련자를 ‘건국 유공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런 ‘건국절’ 논란을 부추기고 있어 찬동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제헌헌법의 공화주의적 요소

박찬승 교수는 48년 당시 제정된 아주 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제헌헌법 전문을 읽어나가면서 민주, 독립, 균등 이 세 단어만이 두 번 나온다고 지적합니다. 그만큼 ‘균등’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는 걸 알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제헌헌법을 요약하면 "독립된 민주국가를 세우고, 자유롭고 균등한 사회를 만들고자“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당시 제헌의원들의 바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정신이 자유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이런 대목은 제헌헌법에 아예 들어간 적도 없다는 것이 박찬승 교수의 주장입니다.

박찬승 교수는 이 대목에서 다시 ‘공화’의 의미를 되새겨보자고 합니다. ‘res publica’라는 것은 ‘공공의 것’, ‘공공의 일’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루소는 “나는 정부형태가 어떤 것이든 간에 법에 의해 통치되는 모든 국가를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때 비로소 공공의 이익이 우위에 서고, ‘공공의 것’이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공화국이란 “법과 공공성에 기반을 두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만들어낸 정치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었죠. 즉 공화국은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를 의미하게 됩니다. 박찬승 교수는 이러한 입장에서 제헌헌법에 공화주의적 요소가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살펴봅니다. 제5조를 보면 “개인의 자유, 평등, 창의를 존중하되 ‘공공의 복리’를 위해서는 이를 조정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구요. 경제와 관련된 조항에도 “‘공공의 필요’를 위해서 개인이나 기업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헌헌법은 공공의 이익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고,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제헌헌법은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다는 게 박찬승 교수의 주장입니다.

오늘 바로 여기, 민주공화정의 새로운 위기

그렇다면 오늘날 현행 헌법은 어떨까요? 안타깝게도 이승만 정권 시절에 공화주의적 요소들을 다 삭제시켜 버렸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87년 현행 헌법을 만들 때 119조에 경제 민주화 조항이 처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제 대한민국 헌법 어디에도 이제 ‘균등’이라는 말이 없다. 박찬승 교수는 우리는 어떻게 보면 건국정신의 핵심을 발로 차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로 현재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은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 박찬승 교수의 지적입니다. 그 위기는 막강 권력을 가진 국가기관의 전횡, 강력한 금력을 가진 재벌의 영향력 확대, 소득격차의 심화와 사회 양극화 등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부유층은 10% 남짓으로 유지되고 있는 반면, 빈곤층은 계속해서 늘어나며 중산층이 와해되어 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특히 비정규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죠. 이런 가운데 국가권력과 재벌, 지배계층을 견제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 세력은 점차 무력화되고 있어서 민주공화정은 더욱 위기에 처하고 있죠. 박찬승 교수는 말합니다. 공화정은 참여 시민들이 균등한 경제상태에 있어야만 균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격차가 심해지면 권리의 격차가 될 수밖에 없다고.

제헌헌법의 공화주의 정신의 복원이 요구된다

박찬승 교수는 이렇게 위기에 처한 민주공화정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헌헌법의 공화주의 정신의 복원과 계승 발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당시 제헌의원들이 공화주의를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공화주의 요소가 분명 담겨 있었다는 것이죠. 공공의 이익과 공공의 복리를 우선하는 공화주의의 복원이 필요합니다. 또한 삼균주의, 만민균등주의에서 나타난 ‘균등’의 이념의 복원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복원하는 것이 제헌헌법을 만들었던 선조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대적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오는 12월 18일(목) 오후 7시에는 2014 민주주의 배움터 마지막 강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균형을 위하여”가 김경희 성신여자대학교 교수의 강의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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