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짐없는 큰 자유, 제정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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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짐없는 큰 자유, 제정구 1


88올림픽을 앞두고 이른바 ‘올림픽 철거’가 한창이던 1986년 여름, 성동경찰서 앞에서는 조금 색다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빈민운동의 대부’ 제정구가 경찰서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철거민들이 즉석에서 벌인 ‘제정구 구출 시위’였다. 당시 제정구는 하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반정부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상계동 철거민 회장이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우리 지도자 제정구 선생이 진짜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했습니까?”
시위대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안 했습니다.”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안 했는데 왜 우리 제정구 선생을 잡아갔습니까? 혹시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들었는데 ‘전두환은 개자식이다’라고 안 했습니다.”
벌건 대낮에 신성한 경찰서 앞에서 대통령 이름을 들먹이며 ‘개자식 선문답’을 하고 있는데도 경찰은 진땀을 쏟을 뿐 마땅히 제지할 명분이 없었다. 온갖 세파에 시달려 온 도시빈민 특유의 기지와 능청스러움이 살아 있는 투쟁의 진수였다.
그 시간, 경찰서 안에서도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정구 역시 취조 형사와 벌써 몇 시간째 똑같은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던 것.
“진술서에 ‘대통령은 개자식이다’라고 썼는데 그 말은 뺍시다.”
“안 됩니다. 국민을 개 패듯이 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개자식은 개자식입니다. 그것이 나의 소신이기 때문에 ‘개자식’은 절대 뺄 수 없습니다.”


“아하, 그러지 말고….”
“못 한다니까요. 당신 마음대로 고치려면 고치고, 대신 당신이 고쳤다고 쓰시오.”
지쳐 버린 경찰들은 철거민들을 수송차에 실어 망우리에 떨어뜨려 놓고는, 상부에 제정구의 훈방을 품신하는 글을 올렸다. 성동경찰서 정보과장의 품신서 내용도 재미있다.
‘…연행되어 오는 차 안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진술서의 글자 몇 구절을 바꾸자고 설득해도 안 들으며… 세계적으로 큰 상을 수상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여러 모로 처벌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심만 잃게 될 것이므로 훈방 조치했으면 한다….’
즉결재판에 회부된 제정구의 형량은 구류 5일, 그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직후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안팎 궁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이 ‘개자식’ 문답은 제정구와 철거민들 사이에 형성된 공감과 신뢰가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개자식’은 뺍시다


철거민들이 제정구에게 보여준 애정은 대중운동 지도자에게 표하는 일반적인 존경심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뜻과 정서와 생활이 일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동류의식, 우정, 신뢰, 자부심 같은 것들이 뒤섞인 따뜻한 감정이었다. 그들에게 ‘제정구’라는 이름은 3인칭이 아니었다. 복닥거리는 공동화장실 앞에서 어깨를 부딪치는 이웃, 밤 늦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벗, 농성장의 천막을 들추며 흔연한 미소를 짓는 친근한 이름, 거리낌 없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것은 물론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올려진 것이었다. 그 세월 속에는 청계천 판자촌에 첫발을 디딘 스물여덟 살의 젊은이가 거쳐야 했던 무수한 싸움과 번민과 불화의 나날이 진하게 배어 있다. 빈민을 대상화시키고 관념 속에 화석화하려는 낭만적인 민중관, 학생운동 시절의 치기와 조급함을 몰아내고 스스로 빈민이 되려는 그의 노력은 가히 전투에 가까웠다.
 



단무지 사이소

제정구가 청계천 판자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2년 봄이었다. 4수 끝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간 이 늙은 학생이 병역 의무를 마치자마자 한 일은 ‘가문의 영광’을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1970년, 그는 복학생 서클인 부문회(復文會)를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었다. 박정희의 임기 마감과 맞물려 심상치 않은 ‘파쇼화’의 조짐이 드러나던 해였다. 각종 시국성토대회의 연사로 나서는 일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그는 어느새 문리대의 ‘1급 데모꾼’ 반열에 올라섰다. ‘문리대 생기고 나서 제일’이라는 그의 연설은 얼어붙은 교수들의 마음까지 울렁이게 할 정도였다.
1971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의 전 단계로 재야와 운동권 학생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위수령을 발동했다. 졸지에 수배자 신세가 된 제정구는 몇 달간 이리저리 떠돌다, 사건이 일단락된 1972년 2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꾸라지처럼 검거망을 벗어난 그를 저들이 곱게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박4일간의 ‘지옥’을 체험한 뒤 바깥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학교에서 제적된 그는 갈 데가 없었다. 궁색한 집안 살림에 얹혀 지내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감옥이나 군대에 끌려간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관악산을 오르내리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던 그에게 청계천에서 야학 교사 생활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청계천, 그의 눈이 확 뜨였다. 80년대의 구로나 부천, 부평의 공단이 그랬듯, 70년대 청계천 판자촌은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이 한번쯤 거쳐 가는 곳이었다. 청계천은 산 자가 올 수 있는 가장 막다른 골목이었다. 청계천변 판자촌의 참혹한 삶을 목격한 젊은이들은 말로만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자신의 관념적인 운동을 반성해야만 했다. 제정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판자촌과 첫 인연을 맺은 순간의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청계천 둑방 위에서 판자촌을 내려다보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그런 것도 모르면서 지난날 대학에서 핏대를 올려가며 ‘조국의 이방인이 되기 전에 주인으로 나서자.’던 외침도, 시위대를 진두지휘하며 최루가스를 뚫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던 용감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반성과 각성의 시간이 끝나면 대개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한번 그곳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제정구였다. 판자촌의 참상은 잠시 야학이나 하면서 향후 진로를 모색하리라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가 청계천에 정착한 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이웃에 혼자 살던 엿장수 사내가 결핵 3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그가 아주 위험한 상태라며 당분간 일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사내는 말했다.
“집에서 쉬면 더 빨리 죽게 될 텐데요, 선생님.”
“네에? 무슨 말씀입니까?”
“집에서 쉬면 당장 굶어야 하는데, 그러면 더 빨리 죽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사내의 처방은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제정구는 사내의 투병을 돕기 위해 그의 엿판을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활빈교회에서 운영하는 청년자립단을 지원하기 위해 넝마주이를 했다. 배가 고프면 부잣집 쓰레기통에서 나오는 고기나 생선을 즉석에서 구워먹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한다는 마음에 부끄럽기는커녕 그 일이 꽤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시작한 단무지 행상은 달랐다. 새벽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이어지는 단무지 행상은 엄청난 중노동이었다. 단무지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단무지 사이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굶주림과 불면, 자신에 대한 절망 속에서 며칠을 허우적대던 그는 마침내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바로 이거다. 내 맘 속의 교만함, 머릿속의 지식, 서울대 출신이 이거 아니라도 먹고 살 수 있을텐데 하는 허위의식.’(『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다음날 몸도 마음도 가뿐해진 그의 입에서는 ‘단무지 사이소.’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판자촌 중독자

가난하지만 인간으로 남아 있는 판자촌 주민들의 삶은 그에게 ‘가난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평생을 빈민들과 함께 하겠다는 제정구의 결심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다녀온 뒤에 더욱 굳어졌다. 판자촌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철거와의 투쟁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활빈교회 일대의 판자촌에도 철거바람이 불어 닥쳤다.
당시 빈민 지역에서 진행되는 빈민 활동은 대부분 독일이나 미국 등 잘사는 나라 종교단체의 지원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신청하면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설사 철거와 함께 판자촌이 와해되더라도 서울 시내의 또 다른 빈민지역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제정구는 빈민의 삶이 프로젝트 주체자에게 사회적 명예와 영리를 가져다주는 사업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교회 측은 정부에서 100여 명의 입주권을 얻어 남양만 간척지로 이주하자고 했다. 그러나 막대한 이주비용이 드는데다, 소금땅이라 당장은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남양만에 가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주민들이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생겼는데도 교회 유지에만 신경을 쓰는 교회 측이 못마땅했다. 그는 집단 이주를 강력히 주장하며, 56세대를 조직했다. 이주비로 받은 몇 푼의 돈과 아파트 입주권을 팔아 방이동에 2천여 평의 땅을 샀다. 그런데 도무지 건축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집단 이주를 막으려는)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방해공작 때문이었어요. 천막 치고 모기 뜯겨 가며 석 달을 버텼는데, 건축허가가 안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죠. 땅을 되팔아 동네 주민들한테 돌려주고 없었던 일로 했어요.”


방이동 집단 이주 과정을 함께 한 박재천(사단법인 제정구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회고다.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집단 이주가 좌절되자 제정구는 자책감과 패배의식으로 몹시 괴로웠다. 정일우 신부(John Daly. 한몸공동체 원장)라는 든든한 동반자를 얻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말이었지만, ‘아무 조건 없이 판자촌에서 살자.’고 의기투합하여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정보요원을 교묘히 따돌리고 양평동 판자촌에 집을 얻은 두 사람은 네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프로젝트는 하지 않는다. 둘째, 그냥 산다. 셋째,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를 필요로 할 때마다 앞장선다. 넷째, 그들 스스로 하는 일에 함께 하고 거든다.
두 사람은 부엌과 방으로 쓸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드나들면서 사랑방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일없는 사람들이 장기를 뒀고, 오후에는 학교에 갔다 온 아이들의 공부방이 되었으며, 밤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른들이 한담을 나누는 곳이 되었다. 술을 마시다가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예사였다.
1976년 제정구가 청계천 시절에 만난 신명자와 결혼하자 양평동 둑방 동네의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적극적인 요구로 신명자는 오전에 사랑방 유치원을 열었고, 제정구는 동네 사람에게 요가를 가르쳤다. 그는 지나치리만큼 아내에게 내핍과 절약을 강요했다. 신명자는 그 시절의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하루는 제가 나가면서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운동화 뒤축을 살짝 구겨 신었던가 봐요. 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부엌문 사이가 두세 걸음이나 될까, 그 정도 거리였는데, 바로 신발짝이 날아오는 거예요. 부르조아적인 습성이 남아 있다고.”
 
아내에게 내핍과 절약을 강조

그는 결혼 전부터 신명자에게 이렇게 엄포를 놓곤 했다.
‘나는 평생 판자촌에서 살거야. 그러니까 행여 나중에라도 판자촌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갖지 마. 돈을 많이 벌 가능성도 없어. 그러나 당신을 굶기지는 않을 거야.’
‘호랑이’, ‘제고집’ 등으로 불리던 제정구에게 ‘판자촌 중독자’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그냥 산다.’는 모토로 양평동에 들어온 이 ‘판자촌 중독자’도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하자 슬슬 끼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경비나 잡부를 뽑는 데다 이력서를 넣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될 듯하다가도 번번이 틀어지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장난이었다. 매형을 통해 전해오기를, 두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즉각 취직도 시켜 주고, 살림집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조건이란 ‘판자촌에서 살지 말 것’과 ‘정일우 신부와 함께 살지 말 것’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이 갈 길이 더욱 분명해짐을 느꼈다.
‘나의 길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곧 중정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판자촌에 살라는 것이고, 또한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살라는 것이구나!’(『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그는 깨끗이 취직을 포기했다. 그는 가진 돈을 털어 성서를 한 권 구입했다. 그리고 거기에 썼다.
‘축 취직 기념(하느님께), 1976년 9월 1일’

 
 
사진도움 / (사)제정구기념사업회
글 / 김 기 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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