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속으로 날아간 불나비, 김진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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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 했던가. 관 뚜껑을 덮은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됨의 면모를 깨닫고 그가 떠나며 남긴 것들을 헤아리는 일은 사람살이의 쓸쓸한 이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이 부박한 세상에 살아남은 이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염치’인지도 모른다.
지난 2월 14일 세상을 떠난 진보 사회학자 김진균. 진보운동 진영의 맏형이자 민중의 다정한 벗이었던 그는 가는 날까지 살아 있는 이들에게 ‘염치’를 가르쳤다. 그가 말하는 ‘염치’란 무엇이었을까. 노동자와 민중,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것, 그리고 지행합일.
2000년에 수술 받은 대장암이 재발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던 2003년 11월, 『희망세상』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전태일은 노동자를 위한 운동을 하고 분신하였지만, 우리에게 염치 있는 사람이 되라 하네. 염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네!’라며 마지막까지 자본에 대한 비판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병마와 싸우던 2003년은 노동자, 농민에게도 죽음의 해였다. 배달호, 김주익, 곽재구,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이 차례로 목숨을 끊어 자본의 횡포에 저항했고, 멕시코 칸쿤으로 날아간 농민운동가 이경해가 WTO에 반대하며 할복자살하였다. 오갈 데 없이 숨어 지내다 서럽게 숨진 이주 노동자도 있었다. 김진균은 죽은 이들의 장례위원으로 자기 이름이 들어갈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사람 목숨을 이렇게 가볍게 대접하는가? 살아 있어서 절규하는 이야기를 왜 귀 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가 어느 지경까지 추락하고자 하는 것인가?

내가 장례위원 명단에 들어갈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장례위원’, 진보네트워크 참세상, 2003년 12월 18일)’

불나비 날아오르다

산 자들의 절규에 귀를 틀어막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 짙게 묻어나는 이 글은 김진균이 죽기 두 달 전 진보네트워크에 올린 것이다. 이미 담도를 침범한 암은 그를 항암 치료조차 어려운 생의 막바지로 몰고 갔다. 황달로 인해 온몸이 샛노랗게 변색된 김진균은 그러나, 자신의 몸보다 ‘황달 든 세상’, ‘죽음의 벼랑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처지를 더 걱정했다.



  하늘이 노란 것이 아니다.
  세상이 노란 것이다.
  올해 들어 유난히도 분신한 노동자의 살 길이 노랬다.
  죽은 노동자의 자식들이 노랗다.
  불쌍한 다른 노동자들이 노랗다.
  세상이 노랗다.
  70년에 분신한 전태일의 유서나
  올해 분신한 노동자의 유서 내용이 변하지
  않았다 - 전부 노란 기가 깔려 있다.
  (김진균, ‘황달’, 진보네트워크 참세상, 2003년 11월 18일)
 

희뿌연 죽음의 문턱, 황달이 흑달로 치달아 샛노란 살갗이 죽음의 흑록색을 띠기 시작할 무렵에도, 그의 촉수는 여전히 민중의 고단한 삶에 가 닿아 있었으니, 서울대 사회학과 제자인 조희연 교수(성공회대)는 그의 이런 면모를 속 깊은 ‘사회적 감수성’으로 설명한다.
“저는 사회운동에 대해 강의할 때, 상황이 모호하고 우리가 어느 편에 서야 될지 불분명할 때는 ‘누가 더 약자냐.’, ‘약자 편에 서는 게 정답이다.’라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김진균 선생님은 논리가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감수성으로 그렇게 사셨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누가 더 약자냐, 누가 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억압 당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사회를 보는 감성, 그것이 바로 제가 김진균 선생님을 닮고 싶은 지점이죠.”

선비, 노동해방 길 떠나다

기골이 장대한 풍채 때문일까. 앎과 함이 일치된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삶 때문일까.
김진균에게서는 지사적 풍모가 강하게 느껴진다. 신들메를 단단히 고쳐 매고 이역만리 구국의 길을 떠났던 구한말 선비의 모습이 그러할까. 그의 이러한 지사적 분위기는 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 때 4·19 혁명을 맞았고, 7, 80년대의 격랑을 헤쳐 진보운동의 대부로 자리 잡는 동안에도 줄곧 다산학회에 참여하여 다산의 실학사상을 연구하였던 그의 학문적 바탕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김진균 선생님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다산학회에 쭉 참여하셨어요. 다산학회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주조로 가지고 있었던 모임인데, 4·19의 기본 이념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정치적으로 419 정신과 이념, 진보적 민족주의가 김진균 선생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서관모, 충북대 교수)



김진균은 1957년 서울대 문리대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앞 개울을 세느강이라 부르며 막걸리를 마시고, 대학로 학림 다방에 죽치고 앉아 브람스를 듣던 낭만적인 사   회학도였다. 2003년 1월 ‘교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대학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입학 당시만 해도 서울은 우울한 분위기였다. 사회학에서는 농촌 사회학, 농촌 경제학 등의 전통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나는 산업 사회학 쪽에 관심이 많았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경제발전이 시작되기도 했거니와, 변화·발전하는 것에 학문적인 관심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암울한 사회 분위기,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젊은 그의 고뇌는 깊었다. 1960년 4월 19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민중의 함성은 그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이승만의 하야로 혁명의 푸른 하늘을 엿본 그는 승리감에 젖어 광장을 뛰어다녔으리라. 그러나 뒤이은 박정희의 쿠데타로 혁명은 좌절되고, 새 세상을 갈망하던 그의 의식은 긴 동면에 들어갔다.
 
그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의 전임강사가 된 것은 1968년이었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4·19 세대로서의 긴장감’을 애써 떨쳐내고, 좋아하는 ‘테니스와 술을 즐기며 학문에만 매진하는’ 조용한 학자의 삶을 꿈꿨다. 상대에서 사회학은 비전공 과목이었으므로 마음만 먹는다면 학생들의 시위에도 얼마든지 무관심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금기시되던 군대 민주화 문제를 다룬 ‘민주군대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글을 『사상계』에 발표하고(1968년), ‘카리스마, 엘리트와 근대화’라는 논문이 계엄당국에 의해 학술논문집에서 삭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대체로 서울 상대 시절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1975년 서울대 사회학과로 자리를 옮긴 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관악산으로 캠퍼스를 옮긴 서울대학생들의 시위는 규모도 커지고 더욱 격렬해졌다. 그 해 4월에는 서울 농대생 김상진이 할복자살했고, 인혁당 관계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5월에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사랑하는 제자들, 그리고 ‘한 다리 건너면 알만한 사람들’이 각종 사건에 휘말려 줄줄이 대학을 떠났다.
‘어느 날 연구실에서 테니스 라켓을 들고 나오는데, 학생들의 시위로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다. 순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라켓과 공을 다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테니스를 치지 않았다.’(교수신문, 2003년 1월 11일)
그러나 그는 여전히 너그러운 인상과 성품으로 학생들에게 ‘관운장’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양심적인 젊은 교수일 뿐이었다. 사회학과 73학번으로 75년부터 김진균의 강의를 들은 서관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만 해도 김진균 선생님은 지사적인 기질, 비판적인 기질은 있었지만, 그 연배의 다른 비판적인 교수들에 비해 특별히 두드러질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론적으로도 ‘구조 변동론’이라 해서 고도로 보수적인 내용이었는데, 그에 대해 문제의식은 분명히 가지고 계셨지만 딱히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상태였지요.”
김진균 자신도 ‘사회학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구조기능주의 이론이 도통 현실과 매개되지 않았다. 기업 내에서 노조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계급구조가 혈연관계를 넘지 못하는 것도 많은 학자들은 경제적 구조가 안정되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교수들도 개발형 독재는 불가피하다는 시론을 신문에 쓰곤 했다. 그러나 유신정권 때 경제 발전은 이뤄졌지만, 정치는 오히려 쇠퇴했다. 알고 있는 지식과 현실의 괴리가 큰 시절이었다.(교수신문)’고 당시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조희연은 학자로서 김진균의 생애를 3시기로 나눈다. 이에 따르면, 비판적 지식인의 세계에 머물렀던 70년대가 제1 시기, 상도연구실과 산업사회연구회를 거점으로 진보학계의 맨 앞줄에 섰던 80년대가 제2 시기,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기점으로 한 90년대 이후가 제3 시기다.


김진균의 인생에 혁명이 시작된 것은 제2 시기였다.
제2 시기의 시작은 1980년 7월의 해직이었다. 그러나 1979년 4월의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이 없었다면 김진균 생애의 혁명적 전환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사회주의 실현을 획책하는 불법 지하용공 세력으로 규정,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중간집단이론을 강의한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부 6명을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고 학문의 자유를 유린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여동생 김귀균의 남편 장상환과 동생 김세균의 뒷바라지를 위해 구치소와 법정을 돌아다니던 김진균은 이소선 어머니와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법정은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학교였다. 결국 김진균을 진보학계의 맨 앞줄에 서게 한 것은 결국 혹독한 군사정권인 셈이었다.
‘70년대 말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을 당했을 때에는 늘 보자기에 자료를 싸서 들고 재판정에 나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세균 형도 함께 당한 이 사건을 겪으시면서 독재체제와 분연히 싸울 마음을 굳히셨고 결국 80년 교수선언으로 신군부에 의해 4년간이나 해직되셨지요.’(장상환, 경상대 교수, 김진균 추모사이트에 올린 글)
80년 광주 학살의 소식이 들려오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서울지역 교수 361명 시국선언, 지식인 100인 선언에 잇따라 동참했다. 그리고 곧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되었다. 그는 사직서에 도장을 찍고서야 나올 수 있었다. 80년 7월 31일, 혹독하던 여름의 일이었다. 뒷날 그는 ‘불나비의 꿈’이란 다큐멘터리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그 값을 치러야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일종의 자존심이지. 그래 내가 그렇게 하지만 느그들한테 굴복하지는 않겠다.’(‘불나비의 꿈’, 진보네트워크 참세상)


‘해직 교수’가 된 김진균이 1984년 8월 복직할 때까지의 4년 1개월은 김진균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을 이루는 시기였다. 특히 ‘강호’를 떠도는 스승의 처지를 헤아려 제자들이 이심전심으로 연구실을 마련해 준 1983년은 그에게는 아주 의미 있는 해였다.
상도동 허름한 여관 건물 3층에 자리 잡은 이 연구실은 김진균 개인만의 장소는 아니었다. 조희연, 서관모, 임영일, 정근식 같은 제자들이 속속 이 곳에 몰려들었다. 이들 모두는 해방 이후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기 시작한 80년대 진보적인 학술운동의 독보적인 존재들이었다. 김진균은 자연스럽게 그 새로운 흐름의 한 상징이 되었고, 외풍으로부터 젊은 지식인들을 보호하는 병풍 같은 역할을 해 내었다. 서울대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그들은 진보적 학술운동의 진영에서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동지가 되었다.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틀이 서 있던 제자들은 때로 세미나에서 자신들의 스승과 그 역할을 바꾸기도 했다.

선생님, 참 무식하십니다

1989년 초. 10평도 안 되는 비좁은 상도연구실에서 민중사회학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다. 그 날은 김진균이 논문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젊은 제자들 앞에서 논문을 발표한 그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제자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참 무식하십니다.”
분위기는 일순 얼어붙었다. 막 학부를 졸업한 80년대 학번까지 있는 자리에서, 삼십대 초반의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비판으로서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혹독하게 느껴졌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홍성태(상지대 교수)는 그 비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선생님의 태도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계급론에 입각한 그 비판을 잘 들으시더니 오히려 ‘아주 고맙다’고 답하셨습니다.”
진보학계의 고목 김진균을 면전에서 거침없이 비판한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당시 ‘김진균 사단’에서 가장 좌파로 알려진, 또한 이론적으로 제자들 중에서 조희연의 가장 대칭되는 지점에 서 있던 서관모였다. 이에 대해 서관모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발표를 열심히 준비해 가지고 발표를 하고 제자들 반응이 어떨까 자못 심각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삼십대 초반의 올챙이 교수인 서관모, 제가 턱 하는 얘기가 그거였어요. 선생님 참 무식하십니다. 모두가 얼어붙고 당혹했는데, 그 양반이 웃으면서 ‘고맙네’ 그러더라고요. 그리도 또 이어서 토론해 나갔다고. 그런 분이에요.”
 

  

사진 도움 / 한겨레 신문
글 / 김 기 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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