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속으로 날아간 불나비, 김진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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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균이 다시 서울대 강단에 서게 된 것은 1984년 9월. 이 무렵, 그가 학교와 학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과거의 ‘관운장’이 아니었다. 5·18민중항쟁 직후의 서명 투쟁으로 해직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존재에 도덕적 우위와 무게감을 더해 주었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진보 학술운동가들이 망라해 있는 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가 그의 뒤를 받쳐 주고 있었다. 운동이 격화되는 85년에서 8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들의 대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산사연은 그의 사회학과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학회 성격의 조직으로, 사회학 외에도 역사학, 철학, 정치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상당한 규모로 결집해 있었다. 산사연의 등장으로 보수적인 미국의 실증주의적 구조기능주의에 의해 장악돼 있던 학계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진균이 제창한 ‘민족적 민중적 사회학’이라는 외피 아래서, 산사연의 연구자들은 당시의 노동운동가들과 학생운동가들에게 이념적 좌표와 노선을 제공하는 진보적 학술운동을 마음껏 펼쳐 나갔다. 산사연은 속칭 ‘김진균 사단’이라고도 불렸다. ‘김진균의 오른쪽에 조희연이 있고 왼쪽에 서관모가 있다.’는 말처럼 산사연은 그 내부에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대립·갈등·조화하는 가운데 진보적 학술운동의 강력한 진지로서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 진보운동 진영의 사회구성체논쟁을 주도한 것도, 한국사회변혁논쟁을 촉발한 것도 산사연이었다.

김진균 사단

이 새로운 흐름의 정점에 김진균이 있었다. 그는 젊은 연구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같이 토론하고 연구하면서 끊임없이 그 자신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학술운동을 외풍으로부터 적극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또한 그는 상이한 입장을 가진 제자들의 견해 차이를 폭넓게 조정하고 통합하면서 사회 변혁의 큰길로 인도해 나갔다. 더러는, 그의 이러한 ‘포괄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다른 말로 하면 불분명한 입장)에 불만을 가지는 제자들도 있었다.

“(당시) 선생님은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어요. 굳이 말한다면 민족적 민중주의라고 할까. 일례로, ‘민중적 당파성’이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나 같은 사람은 불만이었죠. 민중을 계급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는 항상 강조하시는데, 운동에서 당파성이란 프롤레타리아 당파성 아니면 부르주아 당파성이잖아요. 민중은 계급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양반은 계급이론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프롤레타리아 당파성 그건 전위당 노선하고 연결이 바로 되는 거거든요.


결론적으로 나는 다수의 마르크시스트보다는 선생님 입장이 옳았다는 생각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당파성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 이론 체계가 결국 해체됐잖아요. 계급 자체가 딱딱 떨어지는 존재, 정체성이 명확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명확성을 전제로 한 이론구조들이 다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김진균 선생은 살아남은 거예요.”(서관모, 충북대 교수)

그러면 당시 김진균은 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던 걸까. 그 답은 간단하다. 그때 그가 만일 자신의 입장과 노선을 분명히 했다면 그 많은 제자와 학생들의 상이한 운동 노선을 다 포괄하지 못 했을 것이다.‘너른 마당’이란 별칭이 말해주듯 포용적이고 온화하며 사람을 아끼는 그의 성격으로 볼 때 다소 모호하고 두루뭉수리하다는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큰길에 이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서 김진균 선생님을 ‘항아리 같은 사람’이라 표현했다고 해요. 전 거기에 전적으로 공감을 해요. 선생님은 아무 것도 없는 항아리에서 뭔가 만들어져 나올 수 있도록 북돋워주는 역할을 하셨어요.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이죠. 선생님하고 만나면 사실 별말씀 안 하세요. 그런데도 굉장히 많은 말씀을 하신 것이 돼요.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 주신다고 할까, 그렇게 툭툭 건드려 주는 역할을 하시는 거죠. 그러면서도 굉장히 창조적이고, 또 사람에 대한 배려를 통해서 그 사람 스스로 그 창조의 주인이 되게 하는 그런 분이었어요.”(정경원,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항아리 같은 사람
지난 8,90년대 ‘한국 사회학의 진보’ 그 자체로 여겨지는 김진균. 어쩌면 그는 세상에서 말하는 ‘뛰어난 이론가’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정년퇴임식장에서 말한 그대로, 자신이 배출한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을 징검다리 삼아 ‘살짝 밟고 넘어’ 갈 수 있도록 역사와 민중을 끌어안은 자세로 몸을 낮췄다. 2003년 초, 자신의 삶을 다룬 한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론적으로 절대 열심히 공부는 안 합니다. 이론가가 되기 싫어서 말이죠. 그럴 자질도 없고…….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민중과 계급이라는 두 개념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계급, 그 구성은 달라지고 있지만, 내가 채택한 그 개념에 대해 실천적 차원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거죠.”(‘불나비의 꿈’, 진보네트워크)


 

김진균에게 있어 이론이란 실천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어떤 것이었고, 그는 늘 그 실천적 공간이 될 마당을 모색해 왔다. 그 첫 번째 마당이 87년 6월항쟁의 정점에 결성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였다. 민교협의 조직적 바탕은 80년 4월과 5월의 시국선언으로 강제 해직된 교수들의 모임인 해직교수협의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민교협 결성에 탄력을 부여한 것은 전두환 정권이 표방한 ‘대학의 문호 개방’이었다.
졸업정원제의 실시로 대학 정원이 확대되자 유학이나 박사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젊은 ‘국내파’ 교수들이 대거 대학에 진입하게 된 것.
주로 지방대학에 포진하게 된 이들은 대개 80년대 들어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좌파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민교협이라는 전국 조직에 몰려들었다.

1987년 7월, 250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민교협은 원로 명망가 중심의 조직구조를 배제하기 위해 젊은 교수들이 간사로 나서면서 운영위원회 체제로 가동되었다. 그러나 역시 조직을 책임 있게 이끌어 나갈 리더십은 필요했다.

88년 민교협 중부·호남·영남 3개 권역 중 중부권 대표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 김진균은 느슨해진 조직을 전투적인 활동이 가능한 조직으로 재편해 냈다.

민중의 벗
김진균이 민교협 공동의장으로 활동한 88년에서 91년에 이르는 기간은 우리 민중운동의 황금기이자, 민중운동의 지원, 지도자로서 그의 역할이 가장 빛을 발한 시기였다. 전국교직원노조,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등 전국적 단위의 기층 민중운동 조직이 결성될 때마다 그는 민교협의 강력한 지원을 조직하였고, 우루과이라운드 반대운동 등 각종 연대투쟁에 적극 결합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단병호(전노협), 권종대(전농), 권영길(언론노조), 이수호(전교조) 등과 가까워졌고, 특히 단병호, 권종대와는 형제애에 가까운 친교를 맺는다.
1990년 4월에 결성된 ‘민자당 일당독재 음모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국민연합)’에서 그는 놀라운 끈기와 열정으로 참여 단체들을 설득하여 국민연합의 투쟁이 노농 중심의 민중적 노선으로 나아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91년은 그의 안식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경대 타살에 항거하는 분신 투쟁이 잇따르던 그 암울한 정국의 한복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정력적으로 투쟁했다. 카툰 작가 손문상이 김진균을 기리며 ‘그 해 봄/ 그를 만나려면 우리는/ 거리로 나서야 했다.’고 한 바로 그 무렵이었다. 공안세력은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사건’(서사연 사건)을 일으켜 민중운동권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던 김진균에게 경고와 위협의 메시지를 보냈다.
“서사연은 90년 초에 김진균 선생님을 중심으로 윤소영, 서관모, 김세균, 손호철 등이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을 통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조직입니다. 혁신을 통해 사회주의 이론 틀을 유지하면서 소련처럼 망가뜨리지 않고 재생해 낼 수 있을 거다라는 희망 하에서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서사연 팀 내에서 서서히 인정하게 될 무렵, 사건이 일어나요. 결국 김진균 선생님을 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공격을 제자들이 받은 거죠. 정말 비열하게도 방위 근무 중이거나 석박사 과정에 있는 여섯 명의 제자를 붙잡아 간 거예요.”(서관모)

김진균이 이끄는 민교협과 진보학계는 즉각 학문 사상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라 반발하였고, 비난 여론에 떠밀린 공안세력은 흐지부지 이 사건을 종결시키고 말았다. ‘운동에는 지도자만이 있는 게 아니라 운동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헌신자들의 노력이 필수’라는 생전의 지론대로 김진균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전노협 결성이었다고, 정근식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회고했다. 김진균이 전노협에 쏟아 부은 애정과 정성은 실로 각별한 것이었다. 


“전노협 지원공대위와 후원회 활동을 통해 전노협에 대한 집중적인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 주셨어요. 주도적으로 외부의 교수·의사·문인들을 조직해서 지지·지원·보호막 역할을 다해 주셨지요. 전노협 시작부터 끝까지, 서울대 교수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장치를 다 활용해서 전노협 상근자들을 거의 먹여살리다시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정경원)

전노협에 대한 그의 애정은 공적인 후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 주례를 서 주고 받는 사례금을 후원금으로 돌리는 일은 예사고, 주례나 원고료, 강연료 등 약간의 부수입이 생기면 어김없이 전노협 수배자들, 상근자들을 불러 밥을 사주었다고 한다.

정경원은 한 추모 글(‘김진균 선생님을 추도하며’, 『민주노동과 대안』)에서 월급을 탄 다음 날이면 돋보기를 쓰고 후원금을 정리하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꺼번에 1년 치를 내거나 자동이체를 하라고 권했더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목돈을 만드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매월 그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지. 만 원, 이만 원이라도 매월 보내주면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이 있어서 상근하는 사람들이 살림을 꾸릴 수가 있는 거예요. 하다못해 우표라도 산다니까.”


심혈을 기울인 전노협 결성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국립대 교수 월급을 쪼개 생전의 그가 각종 단체나 연구소에 보낸 공식적인 후원금은 월 100만 원이 넘었다. 거기에 가난한 활동가들,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쓰는 밥값, 술값을 제하면, 대체 얼마가 남는 걸까.
“돌아가신 뒤에 사모님께 들은 얘긴데, 한 달에 집에 백만 원 갖다 줬답니다. 사모님은 물론 다 이해하셨지만 무척 힘드셨을 겁니다. 선생님도 갈수록 재정적인 압박을 느끼셨겠지만, 더 힘든 건 ‘고립’이었을 겁니다. 왜, 학문도 시류를 타잖아요. 마르크스주의 하던 제자들도 차차 자리가 잡히면서 변하거든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알튀세르니 문제 제기가 쭉 나오더니 최근에는 마르크스, 레닌을 언급하는 사람도 거의 없죠. 그런 과정에서 선생님은 오히려 거꾸로 자기 단련을 해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갈수록 노동자, 민중의 관점이 분명해지기 시작하고 글에도 사회주의란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거든요.”(이종회, 진보네트워크 센터 소장)
95년 말에 전노협과 업종회의 그리고 현총련이 결합하여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면서 그는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되었다. 전노협 시절과는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달랐다. 노조운동의 여건이 좋아지면서 과거에 비해 그의 역할은 많이 축소되었다. 또한 그가 사랑했던 노동운동의 여러 지도자들이 비정규직 문제 등 산적한 많은 문제를 남겨놓고 정계로 떠나는 모습을 목도하는 외로움과 고뇌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운동진영에서 이탈하는 상황에서 ‘유기적 지식인’ 중심으로 새로운 민중담론을 세워 내기 위한 틀로서 지식인연대를 만들었고, 보통 사람 같으면 인터넷이라는 말도 이해 못할 나이에 정보 통신과 영상미디어 분야를 민중운동 내부에 끌어들였다. 정보 통신 활동가들과 함께 진보네트워크를 출범시킨 김진균은 곧 서울대 사회학과에 영상사회학이라는 강좌를 개설하여 젊은 제자들도 엄두를 못 내는 첨단의 강의를 펼쳐 나갔다. 97년에는 해외 활동가들을 초청하여 국제노동미디어를 개최하여 우리 진보진영에 국제연대라는 운동 흐름을 조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원한 청년
이런 젊음, 이런 도전의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정경원은 김진균에게 이런 대답을 들었다. ‘전선에서 고민이 떠나지 않으면 가능하다. 이 정세의 최접점을 이루는 투쟁 전선에서 떠나지 않고, 민중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사고는 더욱 새로워지고, 학문 실천의 범위도 확장될 수 있다.’
사람은 변화를 거부하는 순간부터 나이를 먹는다. 김진균이 진보진영의 한 청년으로 싱싱하게 세상을 살다 갈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낡은 것을 갈아엎고, 겸손하게 배우는 아픔을 단호히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진보적 민중운동의 한 길에서 많은 이들에게 넉넉한 품을 내어 주던 불나비 김진균. 그는 점점 젊어져서 마침내 순진무구한 어린애의 모습으로 어머니 민중의 품에 안겼다.

사진 도움 / 한겨레 신문
글 / 김 기 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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