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언론인 송건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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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에 공직으로 진출한 어느 언론사 회장의 부동산 투기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이곳저곳의 땅을 사들이면서 위장전입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그런 식으로 4만 5천 평을 사들인 그는 언론인답게 기자 간담회를 열어 국민들에게 사죄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가 저지른 땅 투기 사건은 얼렁뚱땅 넘어갔다.
과연 우리 사회에 언론은 살아있는가?

3공화국에서 6공화국에 이르기까지의 언론 변천사를 송건호는 짧게 정리한다. “전두환 정권은 탄압만 한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월급을 많이 줬어요. 그때부터 기자들도 정부 편이 됐지요. 박정희 때처럼 두들겨 패지 않아도 기자들이 자진 협조를 했지요.”

몇 해 전에 그 언론사 회장은 탈세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다. 1천여 개가 넘는 차명계좌를 만들어 700억 원의 소득을 빼돌리고 세금을 포탈한 죄였다. 놀라운 것은 그가 검찰청에 들어설 때에 기자들이 보여준 행동이었다. 검찰청 정문에 두 줄로 늘어선 기자들은 사주가 들어서자, “회장님, 힘내세요!”라고 외치며 머리를 숙였다.
 

그 풍경에서 조직폭력배가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 죽은 송건호가 살아있는 이들에게 속삭인다.

“현실의 길이란 세속적 영화의 길이다. 역사의 길이란 형극과 수난의 길이다. 세상의 온갖 가치로부터 소외되더라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발표하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은 오래가지 못했다.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중정) 부장 서리를 맡으면서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저버린다. 현역 군인인 보안사령관이 중정 부장을 맡은 것은 법을 거스르는 짓이었다. 바야흐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은 계엄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고, 거기에 발맞춰 송건호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5월 15일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 일정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오늘의 시국은 지난 19년 간 독재정권의 반민중적인 경제시책과 강권 정치의 소산이다. 이는 민주 발전을 저해하는 비상계엄령의 장기화로 빚어진 필연적인 사태악화이다.

“밤 10시쯤인가, 텔레비전에서 계엄령이 내렸다는 자막이 나오자마자 애들이 ‘아버지, 아버지 자막에 나왔어’ 그래요. 우리 집 양반이 ‘어, 그래’ 하고 우왕좌왕하는데, 초인종이 울렸어요. 경찰들이 잡으려고 몇 시간 전부터 집을 포위하고 있었어요. 대문이 쿵쾅거리자마자 우리 집 양반이 냅다 담을 넘어 옆집으로 내뺐지요.”
부인 이정순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확대되고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던 그 밤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그러나 잠옷 차림으로 도망쳤던 송건호는 사흘 만에 막내 여동생 집에서 글을 쓰고 있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경찰이 고향 옥천과 처가인 춘천에서 사돈의 팔촌까지 샅샅이 뒤지는 동안, 그는 원고 마감을 앞두고 글을 쓰고 있었다. 송건호는 무엇 때문에 체포되고 연행되는지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맞은 데가 새카맣게 멍이 들었는데도 그때는 아픈 줄을 몰랐어요. 김대중 씨한테 돈 받은 것으로 조작하려고 마구 때렸지요. 막 두들기다가 자기네들도 걱정되는지 ‘벗어’ 하더니 팬티까지 까내리더라구요. 보니까 새까맣게 멍이 들었어요. 내가 그걸 보고 그냥 기절했지요.”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한 신군부는 집권에 걸림돌이 되는 민주화 세력을 제거하는 각본을 짜 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었다. 송건호는 재야,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인물들과 함께 계엄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3년 6개월을 구형받았다. 그 무렵 군사재판은 ‘정찰제 재판’이라고 해서 검찰 구형과 재판장의 선고 형량이
같았다. 내란음모죄로 엮인 그는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였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위한 강연을 하고 그에 관한 글을 쓴 일밖에 없는 그로서는 왜 체포되고 고문을 당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송건호는 그때 인간이란 육체적 고통을 참는데 한계가 있음을 체험했다. 만일 노련한 수사관이 연행해 온 피의자한테 모종의 자술을 받고자 한다면 백퍼센트 가능한 일이었다. 허위로라도 자백하지 않았다면 그는 맞아 죽거나 평생 불구자가 되었을 거였다. 송건호는 “이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필요로 하니 자술하겠다.” 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술서 아닌 자술서를 썼다. 고문은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말고는 못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신문사에서 내쫓고 직장을 구하려고 해도 방해를 하기 때문에 민주인사가 된 것이지 내가 민주인사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에요.

정상적인 직장을 가지려고 해도 자꾸 방해를 하고 그쪽으로 가게끔 몰아붙였죠. 그래서 재판받을 때도 ‘당신들이 나를 이런 자리에 놓았지 내가 하고 싶어서 했느냐.’고 말했어요.”


해직, 생활고에 시달리다

1975년 송건호는 22년 동안 몸담았던 언론계에서 쫓겨났다. 그의 나이 50이었다. 아울러 대학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니는 6남매의 가장이었다. 친구가 찾아와도 다방에도 못 가고 살아온 그였다. 오죽했으면 편집국장 차량기사가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리가 보통 자리인 줄 아느냐, 눈 딱 감고 계시면 돈을 아주 많이 버는 뎁니다.”라고 그에게 충고를 다했을까.
“내일 또 식량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굶어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이 왈칵 밀려와요.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어떻게 사나? 내달은 어떻게 사나? 아니 내년에는 어떻게 될까? 온갖 잡념이 거의 24시간 쉴 새 없이 나를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어요.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지요.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멍하니 있기만 하는가, 수입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나,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 거의 미칠 것만 같았지요.”

그야말로 먹고사는 문제로 날마다 불안이 엄습해 왔다. 갑자기 두려움에 빠지면 현기증이 일어나고 토하기까지 했다. 죽기보다 싫은 구직운동에 나선 그에게 언론계 선배는 하필이면 신문사를 추천해 주었다. 


그날 송건호는 유신을 위해서 글을 쓸 수 없다는 결심을 한 이상 신문사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다짐만 되새길 따름이었다. 그리고 ‘종이 장사’라고 불렸던 옛일을 떠올리며 자신을 다잡았다. 1958년, 그가 한국일보 외신부 차장으로 있을 때였다. 야근하고 새벽에 퇴근할 때, 그는 언제나 그날의 통신지를 한 아름 집에 가져갔다. 그것을 아내와 함께 동대문시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쌀을 샀다. 그때 사회부장으로 있던 친구한테서 ‘종이 장사’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송건호는 그 모욕적인 말을 잊지 않고 살았다.

 그는 원고료와 강연료만으로 여덟 식구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굶겨서 항복시키자는 것인가!

박정희 유신정권은 탄압만 일삼은 게 아니라 유혹의 손길도 뻗쳤다.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대학 강단에서도 쫓겨나기 일쑤인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다 썼다.

“친척의 친구, 친구의 형님……. 하여간 모든 연줄을 동원해서 빨리 청와대로 오라고 해요. 한번은 누군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그래요. ‘그만큼 쉬었으니까 세계 일주 2,3개월 하고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하니까, 우리 집 양반이 ‘지금 나는 기자로 만족한다, 내세에 태어나도 기자할 거다, 나는 그런데 욕심이 없다.’ 하고 내쳤지요.”
부인 이정순의 증언처럼 송건호는 단호하게 권력의 자리를 거부했다. 자리의 높고 낮음은 둘째 치고 그는 그 자리에 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근본에서 바꿔야함을 뜻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변절자로서 지탄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1978년 유신정권에 합류하라는 박정희의 요구는 끈질겼다. 24시간 감시하고 미행했다. 어떤 때는 아예 사령장까지 써가지고 와서 청와대 공보비서를 강요했다. 그 뒤로도 장관 자리, 유정회 의원 자리도 다 거절했다. 전두환 정권 때도 10여 차례 제의가 들어왔다. 기관원이 ‘선생님은 절대로 복직이 안된다.’고 하면 그는 “떡 해 놓고 빌어봐라, 나도 복직은 안 한다.”라고 대꾸했다.

5.16쿠데타 이후에 송건호는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는 지식인을 줄곧 좋지 않게 여겼다. 지식인이 자기의 신조를 지키고자 할 때에는 박해가 따르기 마련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도 권력층의 초청을 거부한 결과 올 데 갈 데가 없어지고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재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같이 몸도 약하고 용기도 없고 아무런 야심조차 없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이 재야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박 정권의 끝없는 박해가 빚은 결과였다.”
먹고사는 문제로 밤잠을 못 이룬 송건호를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기자는 절대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해서는 안된다.

진보적 민족주의자, 현대사를 다시 쓰다

“언론계를 떠난 뒤부터 현대사 연구를 시작했어요. 송 선생님부터 우리 현대사 연구가 시작된 셈입니다. 냉전이데올로기와 반공이데올로기로 왜곡된 사실을 하나하나 밝혀 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

사학자 서중석은 현대사 연구의 물꼬를 튼 이로 송건호를 꼽는다. 중학교 때부터 출입했던 고서점은 직장을 잃은 그에게 시름을 잊게 해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른 서점에서 모은 자료와 책을 바탕으로 송건호는 현대사 연구에 전념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국현대인물사론』……. 그는 한국 현대사 연구의 새 장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의 현대사 연구는 삶에서 비롯되었다. 실직한 자신의 고달픈 삶 때문이었을까. 송건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대를 알고 싶었다. 그것은 곧 1940년 전후의 일제말기 연구로 이어졌다. 절망적인 암흑기에 우리 선인들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누가 어떻게 항일했으며, 누가 어떻게 수절했으며, 누가 왜 어떻게 부역․협력했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하찮은 양심이나마 지키고 살아가기가 워낙 힘들었기에 그는 더욱 파고들었다. 도대체 우리의 선인들이 그 어려운 상활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왔는지 알고 싶었다.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된 그가 감옥살이를 한 곳은 서대문구치소 9사였다. 그곳은 1910년대에 일제가 항일투사들을 잡아가두기 위해 세운 감옥이었다. 일제 말기를 연구한 그가 그곳에 잡혀들어 가다니! 

그리고 또 하나. 정보부에서도 그는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수사관한테 몹쓸 짓을 겪었다. 일제 말기 연구에 집중한 그로서는 비극적인 우리 현대사를 직접 몸으로 겪은 셈이었다.

그때까지 현대사 연구는 금기영역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감싼 것과 관련이 있더군요. 그러니까 일제 때 잘살던 사람들이 전부 고관이 됐고 돈이 많았기 때문에 사학자들이 눈치만 보고 안 쓰더란 말이야. 내가 역사학을 특별히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안했기 때문에 한 겁니다.” 

일찍이 분단 조국에서는 관리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던 그는 우리 사회의 모든 불화의 원인을 분단에서 찾는다. 통일이 되는 날, 비로소 우리 민족의 민족성이 정말로 실현되는 참된 독립임을 그는 강조한다.

“우리나라를 망친 사람이 바로 이승만입니다. 그는 철저히 미국을 따랐고, 친일파들이 돈도 많고 하니까 그들에게 거두어서 정치자금으로 썼지요. 우리나라 반공은 가짭니다. 친일파들은 대세를 좇는 거예요. 원래 친일파와 반공은 다른 개념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친일파들이 반공을 한 겁니다. 대체로 일제시대 친일파는 친 미국, 친 이승만으로 반공투사가 되었죠.”

그의 현대사 연구는 밥상에서 이루어졌다. 부인 이정순은 지금도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한창 책을 쓸 땐데, 애들한테 방을 주다 보니까 서재가 없었어요. 안방에서 밥상을 놓고 글을 썼지요. 어느 날 리영희 선생이 이사한 집에 초대를 받아 갔어요. 좋은 서재에 책이 그득했지요. ‘선생님 서재가 참 좋네요.’ 하니까, 리 선생님이 자신의 서재를 꾸미고 송 선생님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고 그러더군요. 그 많은 글이 밥상 놓고 나온 거예요. 지금도 좋은 서재에서 글 쓰는 걸 한번이라도 봤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않을 거예요.” 

 송 건 호 


1926년 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서 출생

1940년 경성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입학

1948년 서울대 법대 진학 

1953년 서울대 복교, 대한통신사 외신부 기자

1953년 이정순 여사와 결혼

1961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5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취임

1972년 남북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 방문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취임

1975년 언론탄압에 항의, 편집국장 사임

1977년 『한국민족주의의 탐』 출간

1978년 『씨알의 소리’』편집위원

1979년 『한국현대사론』 『현실과 이성』 출간

1980년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 서대문구치소에 수감

1982년 ‘거시기산악회’에 참가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에 선임

1987년 새 신문 창간발기위원장에 취임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초대 사장 및 회장 역임

1990년 파킨슨증후군 나타나기 시작

1996년 소장 도서를 한겨레신문에 기증, ‘청암문고’ 개설

1999년 ‘20세기 최고언론인’으로 선정

1994-2001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증후군으로 8년 간 투병생활

2001년 12월 21일 영면. 5.18국립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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