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늘 푸른 청년, 박형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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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통일전쟁’이라는 사회학자의 기고문이 우리사회에 난데없는 체제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들이댄 공권력은 글을 쓴 교수를 구속 수사하느냐, 불구속 수사하느냐를 두고 검찰총장이 물러나는 일도 생겼다. 그러자 야당대표는 “우리의 체제를 정면으로 도전하고 부정하는 사람에 대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법무부장관이) 지휘권까지 발동해서 보호할 이유는 없다.”며 “한두 사람의 인권을 보호한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 체제가 무너지고 국민 전체의 인권에 위협이 온다.”고 현 정권을 비난했다. ‘국가체제를 지키기 위해 구국운동도 불사하겠다, 보수 세력이 총집결하자.’는 야당 대표의 호소에 보수 인사들인 ‘제2시국선언 애국시민모임’은 “대한민국은 좌경화가 나라의 안방과 심장을 위협하고 있는 위험한 나라”라고, “자유대한의 빨갱이 색출하여, 북한으로 몰아내자.”고 호응했다. 서울역 광장에서 집회를 가진 보수단체 회원들은 현 정권을 ‘반역정권 친북정권’으로 규정하고, 국민저항운동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노태우 정권 말기, 미국에서 ‘한반도 평화통일 심포지엄’에 참석하고 돌아온 박형규를 공항에서 맞이한 건, ‘마지막 빨갱이 이북으로 보내자’라는 플래카드였다. 교회를 탄압한 군사정권이 ‘용공목사’로 낙인찍은 것도 박형규였다.

“언론자유가 있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해석하는 데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요. 강 교수의 발언이 시의적절한가 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지난 역사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과거 민주화를 외치던 그 심정으로 말한다면, 냉전의 벽을 허물기 위해 여론을 일깨우고 토론하고 공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강 교수가 나섰다고 봅니다."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개종하다

“그날 나는 많이 울었어요. 이게 뭐냐, 순결한 젊은 학생들이 왜 저렇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하는가……. 비로소 교회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고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울었지요.”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근처 효자동에서 교인의 결혼식 주례를 마친 박형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총에 맞아 쓰러진 학생들이었다. 경무대 쪽으로 나아가던 학생들은 총을 쏘는 경찰에 밀려나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학생들을 본 박형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예수나 저 학생들이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날 박형규는 트럭을 잡아타고 거기를 질주하며 ‘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고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 속으로 들어갔다. 바야흐로 한국의 고난 받는 민중 속에서 진짜 목사로 거듭난 날이었다.
박형규는 다국적 기업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만난, 야윈 얼굴과 지친 몸을 한 여공들과 함께하면서 또 개종한다. 청계천 피복 공장의 십대 소녀들을 착취하는 불법 노동행위를 노동 당국에 항의하기 위해 자신을 불사른 노동자 전태일, 주검이 된 자식을 붙들고 흐느끼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는 다시 한번 개종한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우리의 무관심이 전태일을 죽였다! 우리는 간접 살인자다!’라는 고백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곧 빈민선교로 이어진다. 1972년 서울역 앞에 있는 시립 남대문 근로자 합숙소에서는 하루 10원이면 잠을 잤고, 아침과 저녁을 먹는데 30원, 커피 한 잔 값이면 하루를 살 수 있었다.

그 무렵, 박형규와 함께 한 후배 목사는 청계천 빈민가의 풍경을 이렇게 회상한다. “1970년 여름 장마철이었다. 선배들께서 뚝방에 가서 며칠을 지낼 텐데 함께 가자고 했다. 따라 나섰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장마에 불어난 물로 변소가 넘쳤다. 좁은 골목은 변소에서 흘러나온 오물과 빗물로 질퍽했다. 어느 판자촌에 들어갔는데, 밤에는 비가 오는 이유에서인지 파리가 득실거렸다. 윙윙대는 파리 떼와 오물 냄새가 너무 역겨웠다. 거기서 잘 자신이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물러나고 말았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박형규의 개종은 계속 되었다. 경찰과 보안사령부의 지하 취조실에서, 군사법정에서, 일반법정에서, 외로운 독방에서, 박형규는 고통 받는 민중과 함께 하는 예수를 보았고 그때마다 끊임없이 개종했다.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했어요. 학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통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 섭디다. 유신헌법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남산 부활절 예배시위가 실패했지만 재판 과정을 본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냈고, 결국 민청학련은 거대한 민주화운동의 불씨 노릇을 했어요.”

 독재정권, 교회를 탄압하다

1984년 9월 9일, 추석 전날이었다. 폭력배들은 예배를 마치고 당회장실에 있던 목사 박형규를 감금했다. ‘때려잡자 해방신학’, ‘용공목사 물러가라’, ‘물러가라 민중신학’ 따위의 플래카드를 내건 그들은, ‘열을 세는 동안 사표를 안 쓰면 죽여 버리겠다’고 박형규를 협박했다. 그리고 열을 다 센 다음, 안경을 벗기고 얼굴을 가격했다. 폭력배들은 다시 폭행하려 들었고, 사퇴를 반대했던 전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덮쳐 막았다. 그 틈을 타, 청년 교인들이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폭력배들을 몰아내고 책상, 걸상, 소파를 끌어다가 부리나케 문과 창문에 방어벽을 쌓았다. 쫓겨난 폭력배들은 분말 소화액을 방어벽 사이로 퍼부었고, 질식할 듯한 공포가 박형규와 교인들을 엄습했다.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은 박형규를 제거하기 위해 이른바 ‘서울제일교회 탄압사건’을 저질렀다. 부당한 권력은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폭력배를 동원했고, 국군 보안사령부가 그 작전을 지휘했다. 정보기관원들은 교인들을 협박했고, 공무원과 개인 사업자들은 교회를 옮겨야했다.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은 예배 방해자들은 ‘박 목사는 용공분자’라며 박형규와 교인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발버둥쳤다.

‘박형규는 내 손에 죽는다……. 오늘 이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중얼거린 폭력배는 쇠망치와 못을 종이 봉투에 싸서 당회장실 앞을 서성거렸다. ‘내일부터 교회에 나오면 죽이겠다.’고 교인들을 위협한 폭력배 우두머리는 국군 보안사령부 요원임을 자처하였다. 그들은 소화기를 쏘고, 전원을 끊고, 전화선을 잘랐다. 그리고 쇠파이프, 쇠망치 따위로 당회장실 출입문과 철창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날뛰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폭력배들은 밖에 있는 교인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교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교인들은 교회 밖으로 쫓겨났다. 그때부터 박형규는 청년들과 당회장실에서 60여 시간 감금당했다. 폭력배들은 당회장실의 문과 창문을 쇠망치로 두들기며 “용공목사와 빨갱이 새끼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일삼았다. “나는 목사니까 핍박을 받는다고 하지만 함께 있는 이들을 생각하니까 차라리 항복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쪽과 타협해서 모든 걸 풀겠다고 했더니 거기 함께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반대를 했어요. 여기에서 항복하면 우리에게 했던 대로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교회를 짓밟을 거라는 거지요. 우리가 희생되더라도 물러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점거한 폭력배들은 음식을 전하려는 교인들에게 돌멩이를 던졌다. 감금당한 박형규와 청년교인들은 추석날 음식을 먹지 못했다. 교회 벽에는 ‘해방신학은 공산주의다’, ‘박형규는 항복하라’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있었다. 세월이 흘렀음일까, 박형규는 전두환 정권이 제일교회를 부수려고 한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청와대 민정수석이라는 자가 전두환을 만나보라는 거예요. 회유하겠다는 거지. 안 만나겠다고 하면서 내가 말했지요. 전두환이를 비롯해서 당신들 모두 사형감이다. 민주화가 되면 다 사형 집행할 거다. 목사인 내가 그거는 막을 테니까, 돈 모은 거 가지고 떠나라. 망명해라. 내 충고를 전두환이한테 직접 전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거는 안 된다고 펄쩍 뛰더군요. 그러니 전두환이가 우리 교회를 가만 내버려둘 리가 없지요.”


세상에서 가장 큰 예배당

“치안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깡패들 때문에 교회 안에서 예배를 볼 수 없으니까 경찰서 앞에서 노상 예배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날부터 만 6년 동안 노상 예배가 시작되었지요. 주일 아침에 교회 앞에서 모인 교인들은 행진을 해서 중부 경찰서까지 갔어요. 예배를 보는 동안 예배 방해자들과 깡패들이 우리를 빙 둘러싸고 서 있었지요. 성찬을 볼 때는 깡패들도 지켜보기만 했어요. 처음에는 아무 장비도 없이 예배를 보았고, 차츰 핸드 마이크를 사용하고 전자 오르간을 옮겨 놓았어요. 예배 때마다 각계에서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기독교회관으로 옮길 때까지 박형규는 하늘을 지붕 삼은 노상 예배를 ‘세상에서 가장 큰 예배당’이라고 자랑했다. 사회자와 회중이 번갈아 읽는 노상 예배의 공동기도는 그대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회자 : 경찰에 의해 고문살인을 당한 고 박종철 군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폭력·평화적으로 엄숙하고 경건한 가운데 치루기 위해 준비해왔던 범국민추도회가 3만 여 전투 경찰들에 의해 또다시 저지되고 말았습니다.

회중 : 비인도적인 고문과 살인을 자행해왔던 경찰 과 집권여당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공권력을 남용하여 작년 10월 서울대회처럼 지방에서조차 전투경찰을 대거 동원하여 범국민추도회가 열릴 예정이던 명동성당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일대를 봉쇄하고, 실무진들을 불법 연금하고, 이에 참여하려는 시민들을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이 땅에서 또다시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암울한 시대의 해방구요 오아시스였던 제일교회는 어떤 이들이 모였던가. ‘청년학생, 민중운동가 그리고 교파와 종교를 불문하고 여러 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직 인간 해방을 위한 도덕적 열의, 진리를 탐구하고 편견과 불의에 대항하는 의지만이 있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대한 불타는 의지가 숨쉬는 곳이었음은 제일교회 교우들의 활약상이 말해준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들이 받은 구형량은 조금 과장하면 300년에 이르고, 실형을 산 햇수는 약 40~50년은 될 터였다. 그 무렵 제일교회에서 활동했던 이는 말한다. “제일교회에서 활동하다 공권력에 쫓겨 자살한 사람, 맞아죽은 사람, 분신자살한 사람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유와 인권,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1984년 9월 23일 생일날, 박형규는 폭력배들에게 복부를 두들겨 맞고 짓밟혔다.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입원한 성모병원에서 외국 통신사와 기자회견을 갖고 국군 보안사령부가 배후 조종했다는 증거를 공개하였다. 박형규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죽음을 무릅쓸 각오를 밝혔다. “용공목사라는 누명을 쓰고 비난을 받고 있지만……. 내가 비록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인줄 알고 달게 받을 용의가 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완전한 자유를 맛보다

“여섯차례 감옥을 갔는데, 빈민운동을 하다가 잡혀가 반공법으로 빨갱이로 몰렸을 때 가장 힘들었어요. 물고문, 전기고문, 고춧가루 고문실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일제시대부터 고문을 한 전문가다. 우리는 1년만 살 수 있게, 아니면 2년 살 수 있게 맞춰서 고문을 한다. 여기서 안 죽어도 나가서 다 죽는다.’하면서 협박을 하더군요.”

박형규는 여태껏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을 반대하지 않고 적극 밀어준 가족들이 늘 고맙다. 처음 감옥에 갔을 때 눈물을 보였던 아내도 학생들 어머니들과 경찰서로 정보부로 항의농성을 다니면서 사람이 달라졌다.
그는 시간이 오래 걸려도 좋으니 전쟁 없는 통일을 바란다.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임을 명심하고, 통일의 과정이 세계인들에게 창조적인 역사를 만드는 본보기가 되었으면 한다. 세계사에 빛나는 민족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박형규는 젊은 세대가 정보기술 문화에 깊이 빠졌음을 걱정한다. 기계의 노예가 아니라 끊임없이 창조하는 인간이기를 바란다. 욕망을 억제할 줄 아는 인간성이 넘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젊은이들이 근현대사를 공부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에 긍지를 가졌으면 한다. 자신의 역사에 자부심이 강한 베트남 사람처럼 말이다. 일제
강점기, 전쟁, 군사정권을 헤쳐 온 박형규는 살아온 인생이 고맙다.

“고맙지요. 내가 그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은 안 해요. 함석헌 선생 표현을 빌면 ‘하느님 발길에 채인 채 살아왔다.’ 즉 무대에 나갈 생각도 안 했는데, 발길에 채여서 민주화운동, 빈민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지요. 고마운 건 내가 움직이니까, 젊은 사람들이 내가 간 길을 따라오고, 나도 학생들이 간 길을 따라가고…….
나는 즐기면서 민주화운동을 했다고나 할까, 서대문교도소에서 만난 리영희 교수가 나무에 올라가서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날 보고, 저 사람은 감옥살이를 즐긴다고 했으니까요.”

 

<박형규>
 

1923년 경남 창원군 진북면 영학리에서 출생
1930년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학교 다님
1944년 조정하 여사와 결혼, 슬하에 2남 2녀
1944년 민족사상을 고취한다고 김해경찰서에 연행
1950년 미 극동군 일본사령부 심리작전국 방송 군속
1960년 서울교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1962년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신학 석사 받음
1966년 한국기독학생회(KSCM-KSCF의전신) 총무
1970년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
1972년 서울 제일교회 담임목사 취임, 20년 동안 시무
1973년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1975년 선교자금 횡령과 배임 사건으로 구속
1978년 기장 청년회 전주교육대회 시위 사건으로 구속,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
1983년 국군보안사령부 공작으로 폭력배가 서울 제일교회
예배를 방해하기 시작
1984년 교인들과 함께 폭력을 피해 중부경찰서 앞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
1987년 ‘박종철 고문살인 및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를 주관하고 구속
1992년 서울 제일교회에서 은퇴
1998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고문
2001~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글 / 윤동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벽길」 발표
2003년 평전 『윤상원』 발간
2004년 단편 「바람 속의 거미집」을 『문학과 경계』 여름호에 발표

 

 

- 춤추는 늘 푸른 청년, 박형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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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추는 늘 푸른 청년, 박형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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