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이들의 작은 처소, 이우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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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이들의 작은 처소, 이우정 1


 

 


301호실의 기억

왜 자꾸만
기도가 하늘에서 쏟아질까
이 작은 방에
쓰리고 아픈 눈물에 젖은 기도들이
뼈 마디 마디 울리는 기도들이
하늘로 되돌려주는 기도들이


늦봄 문익환이 1975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전국연합회 회보에 기고한 이 시의 제목은 「삼백일 호실」.
긴급조치란 망령이 멀쩡한 이들의 손발을 묶던 시절, ‘눈물에 젖은 기도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301호 여신도회 사무실이 바로 그곳이다. 단 한 번도 역사의 조명을 받아본 적 없는 이 작은 방은 훗날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인권위원회 사무실을 개방하여 자신의 소임을 물려받기까지 쓰리고 아픈 기도들을 하늘에 되돌려주는 종전의 일과를 되풀이했다.

남산부활절연합예배사건, 민청학련사건, 3·1민주구국선언사건 등 1970년대의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속자 가족들은 죄다 이 작은 방으로 몰려와 호소하고, 울고, 기도하고 함께 대책을 마련하곤 했다. 특히 1,024명이 수사대상에 오르고 253명이 군법재판에 회부됐던 민청학련사건 때는 기자들까지 수시로 들락거려 안 그래도 좁은 방이 터질듯하였다. 한쪽에서는 이철, 김지하 어머니 등 구속자 가족들이 분기탱천해서 ‘박정희 나쁜 놈’을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긴급지원이나 취재를 요청하는 전화벨이 연신 울리고, 또 한쪽에서는 매주 열리는 재판과 목요기도회 참가 여부를 점검하는 소리가 요란하였으니, 301호실은 그 고난과 투쟁과 승리의 기억을 몸에 새긴 채 사람들과 함께 늙어 간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301호실 출입이 잦은 이들 가운데 이 방만큼이나 작고 온화한 기품을 지닌 중년 여성이 있었다. 반독재 투쟁전선보다는 상아탑이 어울릴 것만 같은 이 안존한 여성은 1970년대 초 어느 무렵부터 301호실의 한 귀퉁이를 슬그머니 차지하더니 1973년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되어 각종 회의를 주관하고, 기독 학생들과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재야의 반유신 성명서나 선언서에 이름을 내밀기 시작했다. 150센티미터의 작달막한 체구, 소녀처럼 수줍은 미소, 낭랑한 목소리가 트레이드마크인 이 여성의 이름은 이우정. 이효재·조화순과 함께 당대 ‘여걸 쓰리’로 기록될 만한 당찬 여성운동가다.

“이우정·이효재·조화순……. 연령이나 사회적 서열로 볼 때 순서가 그랬어. 그 중에 이우정 씨가 가장 어른 노릇을 했지. 셋의 역할은 같으면서도 또 조금씩 차이가 있었어. 조화순이 산업선교회 목사로 노동현장에서 직접 노동자들을 만났다면 이효재 씨는 제도권 내에 교수로 있으면서 지원을 했고, 해직 교수인 이우정 씨의 역할은 그 중간 지점이랄까. 하여간 사건만 터지면 이 교수에게 부탁을 했으니까. 누가 구속됐다 하면 교수님 한 번 찾아와 달라, 지원해 달라, 성명서 내달라, 오셔서 한 말씀 해 달라……. 지원할 사람이 너무 귀한 때였거든. 무서워서들 그거 절대로 아무나 못한다고.”(조화순, 산돌교회 원로 목사)

 



안방을 지키기에도 힘이 부칠 것 같은 몸으로 아무나 못하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이우정은 노동현장으로 재판정으로 교도소로 강연장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우정은 유난히 ‘장(長)’ 자 붙은 자리를 많이 차지했는데, 하고많은 ‘장(長)’ 자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이 대책위원장이다. 그의 별명은 재야운동의 ‘스페어 타이어’. 남성 지도자들이 붙들리거나 수배가 되어 잠적해야 할 상황이 오면 다들 이우정에게 대책위를 떠맡겼다. 그는 기꺼이 그 짐을 짊어졌다. “나는 미혼이잖아. 그리고 가족도 없으니까 집에서 혼자 밥해 먹으나 나라가 주는 밥 먹으나 별로 다를 게 없어.”(『이야기 여성사』)

301호실이 그랬듯이 그 시절 이우정도 운동의 궂은 일을 감내하며 뼈마디 마디 울리는 그 모든 기도들을 하늘로 되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말하곤 했다. “나는 있으나 마나예요. 나는 어디 있으나 잘 보이지 않아요.”(『신동아』, 2002년 7월) 그러나 그는 있어야 할 곳에 항상 있었으며, 어디에서나 잘 보였다.

밟힌 자는 아프다고 소리쳐라

이우정의 할아버지는 신소설 『자유종』으로 유명한 이해조. 그러나 아버지는 개화파인 할아버지와는 달리 주자학을 신봉하는 분이었다. 조선 왕가의 후예인 이우정은 경기도 포천의 아흔 아홉 칸짜리 집에서 엄격한 유교적 훈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유년 시절엔 ‘아가씨’로 불리며 귀하게 자랐지만,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그의 가족은 비운을 맞았다. 특히 전쟁은 그의 가족에게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판사였던 작은 오빠는 북으로 납치된 후 광산에서 중노동을 하던 끝에 세상을 떴으며, 페인트 공장을 하던 큰 오빠 역시 빈털터리가 됐다.
해방 후 이우정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일제의 정신대 강제 동원을 피하기 위해 숨어 있는 동안 소일삼아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교회는 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었어.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숨겨주는 유일한 곳이 교회였어. 그때 목회를 하시던 변형규 목사님의 설교와 기독교적인 실천력은 정말 감동적이기까지 했지.”(『이야기 여성사』)
1951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한 이우정은 학장이었던 김재준의 권유로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엠마뉴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고생하는 식구들을 두고 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하나님이 나중에 널 크게 쓰시려고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김재준의 설득에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오기와 신앙의 힘으로 유학생활을 버텼던 그의 마음은, 물자가 풍부한 그 곳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먹다 남은 계란 프라이며 고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볼 때마다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번은 양계장에 견학을 간 적이 있었는데 함께 간 김영정이 ‘언니, 여기 닭은 한국 사람보다 더 편하게 산다.’고 그래. 양계장에는 스팀 장치도 되어 있고 풍족하게 모이 주고 그러니 한국에서 사람이 사는 것보다 더 편한 셈이었지. 우리는 기숙사 화장실을 보면서도 저런 방만 있으면 한국서 편하게 살 텐데 싶었어. 화장실 보고 부러워하고 양계장 보고 부러워하고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어.”(『이야기 여성사』)

1953년 한신대학교에 부임한 이우정은 17년 동안 헬라어와 신학을 가르쳤으며, 기숙사 사감으로서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그러나 1970년 4월 한신대 교내 분쟁으로 교수직에서 물러나기까지 그는 학생들을 끔찍이 아끼는 ‘한신의 어머니’였을 뿐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신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신학대학에 있던 17년은 제가 산 게 아니었어요. 노동자들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는 마당에, 저는 그런 일이 있는 줄조차 모르고 제 강의에만 충실해서, 단계를 밟아 교수로 올라가면 그만이며 그게 제 보람이었죠. 종교적 입장에서 말은 할지언정 실상은 몰랐습니다.”(『신동아』)

이우정은 그때껏 이론으로 공부해 온 신학을 현실 사회에서 구현하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된다. 48세의 나이에 해방신학을 받아들인 이우정의 인생 제 2막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는 주류 신학의 남성 중심주의와 강자 지배논리, 서구 중심주의, 추상적 사변주의를 거부하고 눌린 자, 밟힌 자의 시각으로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상적인 ‘민중’이라는 말 대신 체험적인 ‘밟힌 자’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 최대의 밟힌 자는 가난한 여성, 곧 여성 노동자였다.
그는 말했다.

“밟는 자는 밟힌 자의 아픔을 모른다. 그러므로 밟힌 자는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야 한다.”

 

 

나를 당신들의 운동에 이용하라

그러나 이우정이 처음부터 밟힌 자들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그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노동자들에게 거부당했다. 노동자들은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의욕적으로 뛰어들었다가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아주 쉽게 돌아서는 지식인의 행태에 환멸을 느낀 탓이었다. 더욱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이 중년 여성의 높낮이 없는 어조와 귀티 나는 분위기는 노동자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우정은 자신이 ‘노동자의 벗’임을 가장하는 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가치에 대해서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노동자는 아니다. 내가 아무리 노동자를 이해한다고 해도 내가 노동자가 될 수 없고 당신들도 나를 노동자로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노동운동을 하는 데 필요한 것, 예를 들면 우리의 노동법이 ILO(국제노동기구) 규정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의 인권상황을 국제사회에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등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통로로 나를 이용해라. 대신 나는 내가 못 가진 당신들의 투지, 끈질긴 신념 등을 배우겠다. 그렇게 말했어. 그랬더니 나를 받아들여주더군.”(『이야기 여성사』)

동일방직·원풍모방·남영나일론·성도섬유·YH 등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과 이우정의 만남은 거의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우정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생존권과 인권 회복을 위한 싸움 길에 동참했다. 밟힌 자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은 수출역군이라는 미명 하에 혹사당하는 어린 노동자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었다. 이우정은 외화 획득의 명분 아래 관광기생으로 전락해 가던 가난한 여성들, 청계천·중랑천변의 철거민들, 유신 철폐를 부르짖다 구속·수배·투옥·살해당한 모든 이들에게 두루 애정을 쏟았다.
특히 ‘기생관광’이 절정을 이룬 1974~76년, 그는 당시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던 기생관광 근절을 위한 여성계 투쟁의 최선두에서 맹활약했다. 중앙정보부는 당장 그와 동료들을 잡아들여 반대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윽박질렀다. 이우정이 끝까지 버티자, 이번에는 문교부의 한 과장이 그를 불렀다.

“과도기니까 참아달라며 설득을 하더군요. 필리핀서는 화대가 60달러지만 우리는 1백 달러를 받는다면서요. 그러기에 선생님,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라면 당신 딸부터 내놓으세요, 했더니 아무 말도 못하대요.”(『신동아』, 1986년 6월)
1974년 그는 서울여대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민청학련사건과 3·1명동구국선언으로 이어지는 종횡무진한 그의 활동은 당국을 몹시 긴장시켰다. 결국 그는 교수재임용제의 칼날 위에서 ‘운동을 할 것인가, 강단에 설 것인가.’ 양단간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는 주저 없이 학교를 떠났다. 복직의 기회는 1980년에 또 한 번 찾아왔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단호했다. 서울여대에서 이우정과 사제의 연을 맺은 김숙임(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저는 서울여대 개혁을 위해서는 이우정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어요. 서울여대는 굉장히 특수한 학교로, 전교생이 생활관 생활을 의무적으로 하고 있었거든요. 틀에 박힌 수칙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학생들의 사회의식도 별로 강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명동사건으로 들어가시면서 그 파급 효과가 굉장히 컸어요. 그때 학생들이 단식을 통해 뜻을 모으고 함께 저항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나 선생님은 결국 운동을 선택하셨어요. ‘교수 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고난의 현장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죠.”

 

 


* 글 /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 사진제공 / 경향신문, 박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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