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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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1

 
1960년대 초,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 앞들에 한 떼의 청년들이 모를 심으며 뭔가를 신명나게 읊조리고 있다. 들에서 흔히 불리는 노동요나 잡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4·19 혁명의 열기를 무력으로 잠재운 박정희 정권이 대대적으로 재건국민운동 바람을 일으키던 때였으니, 글 모르는 농촌 청년들이 ‘가 자에 기역 하면 각’하고 한글 깨치는 소린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사상계 선언 외우며 모를 심고

자유와 평등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근대적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봉건사회에서 직접 제국주의 식민지사회로 이행한 우리 역사는 세계사의 조류와 격리된 채 36년간 암흑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말살의 역사요, 자기모독의 역사요, 노예적 굴종의 역사였다….’로 시작되는 그것은 한국전쟁 이후 황폐한 우리 사회에 사상적 자양을 공급했던 『사상계』의 발간사. 장준하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이 명문은 창간호가 나간 후에도 줄곧 『사상계』 목차 뒷자리를 지켜, 당시 민주주의적 열망을 가진 청년들에게 일종의 헌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얼른 들어서는 그 뜻을 새기기도 어려운 이 길고 난해한 문장을 이 마을 청년들은 시도 때도 없이 줄줄이 외우고 다녔다. 산에 사방사업 나가서도 외우고, 들일 할 때도 외우고, 울력이 끝나면 또 우르르 몰려가 호롱불 아래 한 자 한 자 그 뜻을 밝히며 외웠다. 이 글만 외웠던 게 아니었다. 이들은 저녁마다 『사상계』에 실린 글이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같은 책들을 읽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는 했다. 관어대 야학 청년들이었다.
1977년, 당시 가톨릭농민회에 몸담고 있던 정재돈은 경북 북부지역 부락실태조사를 나선 길에 영해에 들렀다가 이 특이한 마을 분위기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다 할 운동조직도, 단체도 없는 농촌 마을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차가 많이 안 다녔어요. 그래 어디서 온 누구라고 통성명하고 밥 얻어먹고 술 얻어먹고 자는데, 그때 그 동네 얘기를 들은 거예요. 예를 들면 공동 모심기를 하는데, 딴 데는 민요 같은 거를 하면서 모를 심는데, 여기는 사상계 헌장을 쫙 같이 읊으면서 한대는 거예요. 그리고 야학도 하고 말이죠. 장준하 선생, 사상계를 다 알고. 그 사상계 헌장을 다 외우더라니까요. 그래서 야, 이 마을 분위기가 참 특이하다 말이지. 그 중심에서 활동하던 양반이 바로 권종대 씨예요.”

권종대. 우리 농민운동의 역사와 더불어 외롭고 힘겹게 성장해 온 이름, 39세의 나이에 늦깎이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으나 특유의 지도력을 발휘하여 빠른 시간에 전국적인 지도자로 발돋움한 사람, 한국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을 거쳐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초대·2대 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의 초대·2대 상임의장을 지내면서 90년대 초 재야운동의 ‘떠오르는 별’(윤철호,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1992. 1)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그 사람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재야운동권의 각종 집회에서 한창 빛을 발하던 그 무렵, 그는 돌연 간암이라는 병을 얻어 고향집이 있는 경북 영해로 낙향하고 만다. 술 담배도 즐기지 않고 일밖에 몰랐던 그에게, 불안정한 수배 생활과 격무, 복잡하게 얼크러진 조직 활동의 스트레스가 선사한 잔인한 선물이었다.

 

 


줄탁의 깨달음으로

서울에서 자동차로 7시간 거리, 산 하나만 넘어서면 바다가 보이는 시골집에 병든 몸을 부리고서도 그는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쉴 새 없이 자료를 뒤적이며 실천 없이 흐르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었다. 그는 주로 책과 자료들이 빼곡히 들어찬 작은 방에 기거했는데, 분야별로 잘 정리된 스크랩북들이 꼼꼼하고 빈틈없는 주인의 성격을 말해 주는 듯했다. 정재돈은 권종대를 만나기 위해 두 번째로 영해를 찾았을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은 농업 문제, 농촌 문제에 대한 이런저런 잡지에 실린 논문들을 전부 묶어 갖고 있는 거예요. 이만큼을. 밑줄 다 그어가면서. 이 양반은 충분히 소화를 할 때까지 아주 정독을 하는 사람이에요. 아, 정말! 그런 걸 보고 아주 놀랬어요. 그래서 이제 ‘똥창’이 맞았지.” 불의에 짊어진 무거운 병 때문일까. 발작적으로 터지는 기침 때문일까. 그는 바빴고, 조금은 초조해 보였다. 미리 준비한 질문 순서에 따라 안이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려던 나의 게으른 의도를 그는 단숨에 무찔렀다. 4·19 이후 야학을 하게 된 계기를 묻는 나의 질문을 자르고, 그는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우선 내 몇 가지 이야기를 할게요. 나는 농사를 지었으면서 아버지의 일을 거드는 농사꾼에 불과했고, 교편생활을 조금 했다지만 교사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에요. 또 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참 중책을 맡았는데, 그것은 그때 우리 운동 조직의 상황과 시대 조건이 내게 부여한 짐을 진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지, 그걸 통해 대단한 영향력이나 지도력을 발휘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어요. 그럴 능력도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인터뷰의 주도권은 초장부터 그에게 넘어갔다. 내용도 형식도 그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때로 나는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쩔쩔매야 했다. 그는 아프다기보다는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럼으로써 나에게 그의 병이 어디서 왔는가라는 깊은 의문에 빠져들게 했다. 그러나 수굿이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노라니, 그가 자신의 삶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그는 자기 삶의 핵심을 농사와 교육, 운동 이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일에 뛰어들게 된 계기를 ‘어릴 적 꿈’이나 ‘개인의 의지’와 같은 주관적인 측면으로 설명하지 않고, 자신과 세계의 상호작용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슬그머니 자기 이력의 한 귀퉁이를 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뭔 계기가 와 가지고 자기 인생이 확 돌아서고, 어떤 책 한 권 보고 사람이 확 바뀌었다 그러는데, 솔직히 그건 좀 우습게 생각돼요. 나도 책이라면 많이 읽어 봤지만 말 한마디에 사람이 휘딱 바까지고 그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삶의 변화란) 그 사람한테 내재된 자기 창발성이 있기 때문이지 말 한마디로 되는 게 아니거든. 경로를 이야기하면, 줄탁이라 그럴까. 병아리가 알을 쪼읏고, 암탉이 알을 쪼아 주고 이래서 병아리가 까나오는 거라.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줄탁(啄)’. 나는 곧 김지하가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라고 읊은 같은 제목의 시를 떠올렸다. 부화될 때가 되면 병아리는 알 속에서 입질(줄)을 시작한다. 그때 어미닭은 그 기미를 알아채고 바로 그 자리에 ‘톡’ 부리질(탁)을 하는 것이다. 줄과 탁은 동시에 진행돼야만 병아리가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병아리가 힘이 부족하면 밖에 있는 어미닭이 아무리 있는 힘을 다해 쪼아도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 반대로 어미닭이 쪼지 않으면 역시 병아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차차 그의 어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가 자신의 삶과 운동을 일관되게 이 ‘줄탁’이란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줄탁만큼 지극히 변증법적인 표현도 없을 것이니, 세상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 그 올바른 변화를 위해 치열하게 운동해 온 그에게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몰랐다.

나는 누구냐

4·19가 일어나던 해 권종대는 서울에 있었다. 건강 문제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서울에 올라와 친구 소개로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때였다.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였으나, 그는 아직 대학 진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졸업식을 석 달 남긴 시점에서 고등학교를 그만둬야 했으니, 그 아쉬움이 오죽이나 컸을까. 고향집은 열한 마지기 농사로 그럭저럭 밥은 먹고살았으나, 서울 간 아들 대학 진학을 밀어 줄 형편은 못 되었다. 당시로서는 그리 쳐지는 학력도 아니건만 딱 부러진 졸업장이 없는데다 건강 때문에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탓인지, 취직도 쉽지 않았다. 진로 문제를 고민하며 어정쩡하게 가정교사 일을 지속하던 그 무렵, 4·19가 터졌다.
유난히 지적 욕구가 왕성하여 고등학교 때 이미 『사상계』를 접했던 권종대는 기다렸다는 듯 시위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그는 정말 ‘신나게 뛰어다녔다.’ 당시 민주화의 새 기운을 타고 창간된 민족일보도 구독하고, 여러 단체와 정당이 개최하는 강연회나 민중대회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4·19의 경험은 그의 젊은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것 같은 상처를 안겨 주기도 했다.

“4·19 혁명 광장을 뛰어다니면서 데모도 하고 만세도 부르고 그랬는데, 모두 다 깃발이 있었어요. 대학생들은 저마다 소속 대학교 깃발을 내걸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단체 깃발을 들고 뭉쳐 다니는데, 내같은 경우에는 소속이 없단 말이에요. 시위 대열을 따라다니면서도 나는 누구냐, 소속이 어디냐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4·19를 겪는 과정에서 사람이 자기 힘을 다할 일을 할라 그러면 조직이 있고 소속이 있어야 자기 능력도 발휘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시위의 열기 속에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던 그의 서울 생활은 5·16을 계기로 막을 내렸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던 함석헌은 61년 7월 『사상계』에 기고한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에서, 박정희를 직접 겨냥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내 이상이 아무리 좋아도 억지로 집어 싸우면 정치가 아니다. 선의(善意)의 독재(獨裁)란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내용 없는 빈 말이다. 선의(善意)인데 독재(獨裁)가 어떻게 있으며, 독재(獨裁)거든 어떻게 선(善)일 수 있을까? 강간이 사랑일까?’
누구도 함부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던 시절, 그 글은 실권자인 박정희를 자극하는 대담하고 속 시원한 충고였다.

“아주 감명 깊게 읽었던 글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실 5·16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밝혀낸 글은 아니었어요. 그땐 5·16을 쿠데타라 그러는 사람도 없었고 그걸 사회적으로 밝혀 주는 사람도 없었지요. 결국 고민 끝에 고향에 내려가게 됐죠. 내심 고향에 내려갈 때는 공부를 좀더 해 가지고 다시 서울에 오려는 생각이었지만,

야학이다 농촌개량사업이다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가정도 있고 해서 쉽게 떠나기 어려웠죠.”

그의 삶이 전체를 위해 완성돼야 하는 것이라면, ‘그건 시골마을에서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게 아니냐.’(윤철호,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1992. 1)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 것이다. 당시 마을과 사회 분위기도 그런 그의 결정에 한몫을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그의 마을은 속칭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이 많은 곳이었다. 남편이나 아들이 빨치산으로 산에 들어갔다가 죽거나 월북하여, 한 날 저녁에 제사가 있는 집들도 많았고, 과부들만 사는 집도 여럿이었다. 그들은 권종대와 같은 젊은 농촌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권종대가 어떤 운동 조직의 도움도 없이 사상계 선언을 외우고 함석헌의 글을 강독하는 야학을 시작한 것은 그가 성장한 마을이 한국 역사의 비극적인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곳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을 청년들에게 야학은 낯선 것이 아니었고, 중심 리더인 권종대는 공부도 많이 하고 서울에서 보고들은 것도 많은 믿음직한 교사였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재건국민운동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는 길의 하나로서 자발적으로 택했다. 그 운동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그는 마을길을 넓히고 단위협동조합 만드는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글_김 기 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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