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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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을 든 사람들 - 영원한 자유인 조영래 1

그립고 아쉬워도
더는 슬퍼하지 않으리다
단 한 가지
당신 마지막까지
괴로워했다는 저 이십년 세월의 저 편
불타 돌아간 전태일 씨에 대한 그 마음의 빚도
이제 숱한 노동자들 영롱한 눈빛 속에서
다 갚았으니
다 스러졌으니
오히려 고마운 새마음으로 돋아나고 있으니
안심 안심하소서
오고 감 없고
부서질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마음이시여
-1990년 12월 13일, 김지하 시인의 「조시(弔詩)」 중에서

누구일까.
죽는 날까지 전태일에 대한 마음의 빚을 떨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표표히 돌아간 그 사람은. 43년 생애보다 몇 곱절 긴 여운과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 그 사람은. ‘부서질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마음’을 가진 그 사람은.
한국 변혁운동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참사람’ 조영래.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산화한 이래, 이 나라 무수한 젊은이들을 지독한 긴장과 각성으로 몰아넣었던 『전태일 평전』의 작가이자,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까지 민주화운동 대열의 앞자리를 지켜온 걸출한 변혁운동가의 이름이다.
시인 김지하가 조영래와의 영별을 아쉬워하며 절절히 노래한 조시에서 보듯, 그는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전태일에 대한 마음의 빚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의 빚이라니! 전태일이 누군가. 그의 글을 통해 더욱 새롭고 환하고 빛나게 부활한 이름이 아닌가. 그러면 또 조영래는 누군가. 평생 자기 입으로 내가 그 유명한 평전의 저자요, 하는 소리 농으로라도 흘리는 법 없던 사람이 아닌가.

불같은 시대를 끌어안은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냉철한 직관과 판단력으로 저 얼음 같고 불같은 모순의 시대를 담대하게 끌어안은 사람,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뜨겁게 눈물 흘린 사람, 김지하의 이름을 빌려 ‘사랑의 폭력’을 당당하게 선언한 사람, 전쟁터의 야전사령관 같은 결기와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동시에 갖춘 사람.
조영래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많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고집 센 촌놈, 법을 아는 전태일, 타고난 전략가, 뛰어난 문필가, 인권 변호의 새 장을 연 법조인, 바보를 존경할 줄 아는 천재….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조영래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부족함이 있다. 어쩌면 조영래라는 인간과 그 삶의 핵심을 한 마디 말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턱없는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조영래가 그것들을 다 합치거나 곱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진실은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뺀 나머지에 있는지도 모르므로.

(그는) 굉장히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선입견과 편견,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볼 줄 아는 사람이죠. 문제를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그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사태의 핵심을 꿰뚫을 줄 아는. 사실 운동권 사람들도 자신이 미리 만들어놓은 관념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할 때가 많잖아요? 이 사람은 진실을 볼 줄 알아요.
-부인 이옥경 씨의 술회

조영래가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그 자유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서 얻어 낸 대가일 것이다. 그의 응전을 기다린 최초의 현실은 가난이었다.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7남매의 넷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비슷한 연배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종종 맞닥뜨리곤 했던 가난과 궁핍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경북 청송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결혼 후 독학으로 비누 만드는 법을 익혀, 대구에서 유지공장을 차렸다. 초기에는 군납을 하는 등 그런대로 현상 유지를 했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아버지의 사업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조영래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57년,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급기야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20년 뒤 화곡동에 정착할 때까지 조영래의 가족은 내수동, 안암동, 종암동, 갈현동 등의 빈민촌을 철새처럼 옮겨 살았다. 서울 생활의 팍팍함 속에서도 명예와 의를 중시하는 조씨 집안의 선비 기질은 그대로 간직되었다. 7남매 모두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이나 『명심보감』을 보고 자랐으며, 제삿날이면 으레 온 가족이 둘러앉아 ‘지방(紙榜)의 명칭 중에서는 벼슬하지 않은 학생이 가장 좋다.’는 얘기들을 나누곤 했다.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 법대로 이어지는 조영래의 이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제도권 교육에서 그는 늘 우등생이었지만 수석만을 독차지하는 공부벌레는 아니었다. 여가도 없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주인집 아이들을 가르쳐 용돈쯤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동생들의 공부도 보살펴야 했다. 또, 유난히 사람을 좋아해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모르는 게 있으면 서로 가르쳐주고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시험을 볼 때 다른 친구에게 답안지를 보여주다가 혼이 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가난에도 꺽이지 않은 학구열 
가난은 이 자존심 강한 제자에게 꺾이지 않는 법을 가르쳤다. 집에는 늘 형제들이 우글거렸고, 공부방은커녕 책을 펼칠 변변한 책상 하나 없었다. 조영래는 집안 환경을 불평하는 대신, 돗자리와 공부상을 들고 매일처럼 산에 올랐다. 그에게 산은 공부방이었고, 웅변으로 천하를 호령할 기개를 키울 수 있는 터전이었다. 산의 선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산은 불교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이 명민한 소년을 안내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그가 자주 놀러 가던 개운사의 어느 노스님이 그에게 『반야심경』 한 권을 건넸다. 한문이 낯설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온 그는 경전 공부를 통해 불교의 세계에 푹 빠져들어 갔다. 고승들의 법문을 듣기 위해 각종 법회도 찾아가고, 불교학생회 룸비니에도 가입하는 등 불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불교와의 인연은 그의 정신의 한 축을 형성하며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조영래가 가난을 결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유교적 가풍 속에서도 고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한 광범한 독서와 불교와의 만남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어, 일어 등 어학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인 그였지만, 한문에 관해서는 유독 많은 일화를 남겼다. 경전 공부를 통해 한문 실력이 부쩍 향상된 조영래는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의 명문장 「적벽부」와 제갈량의 「출사표」,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 같은 불교의 경전을 한문으로 줄줄 외고 쓰게 되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꾸준히 이어진 『삼국지』를 원전으로 읽는 버릇도 이미 이 시절에 체득한 것이었다.
다음은 고등학교 친구 유영구 씨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한문에 얽힌 일화 한 토막.

어느 겨울날 창밖에 눈이 오고 쉬는 시간인데 그가 백지에 한시를 줄줄이 쓰고 있더군요. 자작시라기에 우리는 믿지 않고 한문 선생에게 말했는데, 한문 선생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앞으로는 한문 시간에 안 들어와도 좋다고 그랬죠. 그때 벌써 붓글씨도 수준급이었어요.


고3때 한일회담 반대 시위 주도
1964년, 고3이 된 조영래는 두 번의 정학을 경험하게 되었다. 첫 번째 정학은 당시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인한 것이었다. 3월 26일, 조영래는 학생회 학예 부장으로서 교내 성토대회를 주도한 후 학우들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였다. 당시로서는 최초의 대규모 학생 시위였다.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시청 앞을 돌아 나오는 경기고등학교 학생들이 치켜든 플래카드에는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드냐.’라 씌어 있었다. 이 날 시위의 선언문을 쓴 것도 역시 조영래였다. 평생에 걸쳐 각종 집회나 시위의 성명서와 선언문 작성을 도맡다시피 했던 그의 빛나는 ‘처녀작’이었다.
두 번째의 정학은 학교 당국의 처사에 대한 개인적 항거의 결과였다. 당시 경기중․고등학교는 매 분기마다 교문 앞 게시판에 수업료 미납자 명단을 공개하는 제도가 있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미납자는 점점 줄어들어 막바지에는 대개 한 학년에 열 명 남짓한 수가 남게 마련이었다. 한번은 조영래와 동생 조성래(당시 경기중학교 3학년)의 이름이 동시에 최후까지 남게 되었다. 미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는 일에는 이골이 난 조영래였지만, 동생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피가 역류하는 듯한 울분이 솟구쳤다.
‘없는 것만 해도 억울한데 이름까지 광고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그래도 괜찮지만 동생 이름까지 나오는 건 참고 볼 수 없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명단을 북북 찢어버리고 이틀 정학을 받았다. 부당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조영래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침묵에 반대되는 것이며, 자유로운 말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감춰진 진실이 가차 없이 폭로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나는 진리가 그리고 오로지 진리만이 인간을 해방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조영래의 글로 밝혀진 이른바 ‘김지하의 양심선언’

1965년, 조영래는 5백 점 만점에 4백21 점을 얻어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다. 서울대 대학신문에 ‘그저 붙었으면 되었지 톱은 무슨 톱입니까?’라고 일갈한 새내기 대학생 조영래의 모습은 한 마디로 ‘촌놈’이었다. 그 해에 새로 바뀐 서울대 교복은 신사복 스타일에 유치원생 명찰처럼 커다란 마크를 왼쪽 가슴에 붙인 ‘촌스런’ 옷이었는데, 이 교복을 걸친 조영래의 모습은 유독이 촌스러웠다. 그러나 이 ‘촌놈’은 어물어물하지 않고 당시 대학가를 강타하고 있던 태풍의 중심으로 곧장 쳐들어갔다.
그 해 봄, 대학가에는 연일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서울대 법대에서는 4월 10일에 매국 외교 반대 시위가 열렸는데, 이것이 조영래가 대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참가한 시위였다. 그 날 이후, 조영래는 1학년으로서는 유일하게 명민한 두뇌와 판단력, 분명한 사회의식을 인정받아, 시위를 모의하는 선배들의 모임에 끼게 됐다. 특히 2학기 개학과 더불어 폭발한 회담 비준 반대 투쟁에서 맹휴를 주도한 선배들이 줄줄이 제적당하자, 이미 ‘출중한 지도력’을 검증받은 바 있는 조영래는 자연스럽게 법대를 이끌 새로운 리더로 부상했다.
이 무렵부터 조영래는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소위 금서로 분류된 사상서들을 폭넓게 읽었다. 주로 일본에서 나온 유물론이나 정치경제학 이론서, 마르크스의 원전들, 소련아카데미의 경제학 교정, 일본 이와나미판 사회주의 강좌, 폴 스위치의 경제학 서적 등을 구해 읽고, 필사를 해서 돌려 봤다. 조영래의 자유로움은 선천적 바탕에 독학으로 아로새긴 무늬였다. 그는 어떤 도그마적인 입장이 전제된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탄탄하게 닦아놓은 인문학적 교양의 토대 위에서 진행된 사회과학 공부는 조영래의 이념과 현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무한히 확장시켰다. 그의 투쟁과 자유를 향한 희구는 더욱 열렬해졌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아 
1966년, 2학년이 된 조영래는 믿음직한 동지들을 맞아들였다. 66학번 중에는 장기표, 양건, 박세일 등 ‘의식 있는’ 후배들이 많았고, 이들은 이후 조영래가 학생운동을 풀어나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삼성재벌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힌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졌다. 국내 굴지의 기업 삼성이 사카린을 밀반입해서 벌어들인 돈을 사업자금으로 쓰다가 들통이 나, 엄청난 사회적 충격을 안겨 준 사건이었다. 서울 법대 학생들은 즉각 이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성토대회를 가졌는데, 이 집회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만나 조영래의 평생 동지가 된 사람이 바로 장기표다.

"당시 학생운동은 조영래 씨가 주도하다시피 했습니다. 교련 반대 운동, 언론 개혁 운동 등 학생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 여러 가지 중요 선언문의 거의 대부분을 조영래가 썼다고 보면 됩니다. 전태일 사건 같은 경우도 조영래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요. 전태일 평전도 그렇지만. 조영래가 등장하면서 학생운동의 중심이 서울 문리대에서 서울 법대로 옮겨졌습니다. 사실이 그래요. (71년의)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들어간 사람이 법대생 세 명에 상대생 한 명이라는 것은 당시 학생운동 진영의 역관계를 상징하는 겁니다. 수사관들도 바보가 아니거든요. 그때 우리가 학교 안에서만 한 게 아니라, 전국 대학이 다 네트워킹이 되가지고 운동을 할 때였으니까."

삼성 재벌 밀수 규탄대회를 주도한 조영래는 법대 부학생회장과 더불어 1개월간의 유기정학 처분을 받게 되지만, 한번 지펴 올린 법대의 투쟁 열기는 꺾일 줄을 몰랐다. 1967년 6․8선거 규탄 시위가 서울 법대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전개되자, 정부 당국에서는 법대를 폐쇄해 버리겠다고 협박해 왔다. 바싹 긴장한 학장과 교수들은 다급히 법대의 문제 학생 10여 명을 불렀다. 학생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던 차에, 한 교수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나라와 학교 둘 중에서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저마다 ‘나라요.’, ‘학교요.’ 하는 대답이 나오는 가운데 조영래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대뜸 말했다.
“그것은 질문 자체가 틀렸습니다.”
교수와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조영래의 입만 바라보았다.
“나라가 없으면 법대도 없고, 법대가 없는 나라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양단간에 택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좌중의 시선은 애초에 질문을 던졌던 교수에게로 쏠렸다. 그 교수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게 정답이야.‘
착 가라앉아 있던 방 안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계속)


조영래(趙英來)

1947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1965년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 부정선거 규탄, 삼성 개헌 반대, 교련 반대, 공명선거 쟁취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196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이 발생하여 전태일 정신 계승사업에 진력하였다.
1971년 2월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그 해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월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어 6년 가까이 피신 생활을 하였다. 피신 생활 중에도 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고, 특히 3년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였다.
1980년 수배 해제 및 복권되어 1982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다. 1983년 변호사로 개업하여 시민 공익 법률상담소를 개설한 이래, 1984년 망원동 수재사건 변론, 1985년 대우어패럴 사건 등 각종 노동사건 변론,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체 철폐 문제) 등 변론, 대한변협 인권보고서 집필, 1987년 보도지침 사건과 박길래 사건(상봉동 진폐증 보상 문제) 변론을 담당하는 등 노동․빈민․공해․학생 사건 등과 관련된 인권 변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밖에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 문화방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역임하는 등 언론 매체 쪽에서도 활발한 문필 활동을 벌였다. 1990년 9월 초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였으나, 그 해 12월 12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하였다.



글_김기선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뒤 평전 작가로 일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전집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을 썼으며,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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