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땅을 딛고선 흰 고무신 - 계훈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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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계훈제는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리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돌산의 암반에 구멍을 내고 다이너마이트를 넣어 폭파한 다음, 폭파된 석회석을 작은 트럭에 실어 분쇄공장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벌써 1년이나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동의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불성실하게 일을 해왔다. 허리를 구부리고서도 쉴새없이 감시자에게 눈을 힐끔거렸다. 노동의 희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된 노역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령을 피웠고, 남보다 보리밥 한 덩이라도 더 먹으려고 애썼다.

계훈제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조금씩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항을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법인데…. 독립운동은커녕 강제노역장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는 자신이 점점 싫어지고 있었다.

그 날은 아침부터 폭염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작업복이 땀으로 흠뻑 젖곤 했다. 삼복더위가 돌산을 태워버릴 듯한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수위가 와서 정오에 중대 뉴스가 있다고 전했다.

중대 뉴스라면 이미 수도 없이 들어온 계훈제였다. 고작해야 충성스러운 황군이 태평양의 어느 섬을 혹은 버마의 어느 도시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대본영은 중대 뉴스랍시고 수도 없이 발표했던 것이다. 그 따위 중대 뉴스를 듣느니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막사로 가고 있는데, 아침의 그 수위가 다가와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다고 조심스레 전했다. 이어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달려와 천황의 항복소식을 전했다. 계훈제는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싶어 무덤덤하게 그 소식을 듣기만 했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나자 서서히 실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계훈제를 비롯한 30여명의 학생출신 강제노역자들은 승호리로 뛰어나갔다.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러나 일제의 순사들에게 시달려온 마을 사람들은 천황의 항복을 좀체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행진을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계훈제에게 해방은 그렇게 엉뚱하게, 그러나 갑작스럽게 왔다.

평양에 도착하자 해방의 감격과 흥분이 뜨겁게 용솟음치고 있었다. 승호리에서 맞이했던 해방의 감격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8월 23일에 신의주로 돌아갔다. 거리에는 붉은 군대가 진주해 있었다. 팔뚝에 여러 개의 손목시계를 차고 만족스러워하는 이방인 병사, 부녀자를 골목으로 끌고 가는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저들은 인민의 해방을 위해 진주한 붉은 군대가 정녕 아니었다. 계훈제는 붉은 군대의 행각에 절망에 가까운 실망을 느꼈다.

시골집에서 짐을 꾸린 계훈제는 8월 27일,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평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평양의 거리는 열흘 전과는 달리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군대뿐이었다. 밤이 오면 사려 없는 해방군 병사들의 행패가 더욱 심해졌기에 어둠이 내리자마자 부녀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기에 바빴다. 계훈제는 답답한 마음으로 을밀대에 올랐다. 유경(柳京), 버드나무의 서울을 휘돌아 흐르는 대동강은 곧이어 다가올 비극도 모르는 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평양역에서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피난 행렬도 아니건만 남쪽으로 가는 사람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객차 지붕에 올라탄 사람까지 있었건만 새로운 희망에 부푼 사람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쉬며 달리고, 달리고 쉬며 남쪽으로 향하던 기차는 그러나 멸악산맥을 지나 금천역에 도착하자 더 이상 달리기를 포기해버렸다. 승객들은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하며 이제는 걷기 시작했다. 가냘픈 체구의 계훈제도 걸어야만 했다.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 불안한 남행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몇날 며칠을 걸어 마침내 38선을 넘자,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38선을 지나자 바로 개성이 나타났다. 계훈제는 고려의 수도 개성의 거리를 감격에 겨워 걸었다. 어서 빨리 경성으로 가자 경성으로, 오로지 그 생각만이 머리 속을 꽉 채웠다.
 

 `국대안` 반대

경성제국대학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적을 둔 계훈제는 1946년에 문리대 학생회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좌와 우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게훈제는 고뇌의 날들을 보내야만 했었다. 서울에 오기 전에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붉은 군대의 더러운 행패를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심지어는 김구 선생마저도 김구(金拘)라고 이름자에 ‘개새끼’라는 뜻을 붙이는 좌익의 논리에는 정말이지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1945년이 지나고 1946년이 되자, 강의도 수업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마침내 학교는 휴교상태로 들어갔다. 학교는 좌우익(左右翼)의 대결의 마당이었다. 그러던 1946년 8월 22일, 미군정청은 법령 제102호 국대안(國大案;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포하고, 서울대 성립을 선언하였다.

8월 23일에 학생들은 각 학교별로 국대안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국대안 반대운동은 1947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계훈제도 국대안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서울대학교는 국립종합대학으로 1924년 일제에 의하여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이 모체였다. 발족 당시 대학원 외에 9개 단과대학으로 편성되어었는데, 그 편성내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리과대학(경성제대 법문학부 문과계통과 이공학부 이과계통을 통합), 법과대학(경성제대 법문학부 법과계통과 경성법학전문학교를 통합 개편), 공과대학(경성제대 이공학부 공과계통과 경성공업전문학교 및 경성광산전문학교를 통합), 의과대학(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통합), 농과대학(수원농림전문학교를 흡수 개편), 상과대학(경성경제전문학교를 흡수 개편), 치과대학(사립 경성치과의전을 흡수 개편), 사범대학(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통합 개편), 예술대학(미술·음악부 신설) 등으로 개편하였다. 이어 1950년에 사립 서울대학(옛 경성약전京城藥專)을 흡수하여 약학대학으로 독립시켰다

학교는 사실 목숨을 건 살벌한 전쟁터였다.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좌익학생과 교수들은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단체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이데올로기 투쟁의 전장으로 만들었다. 계훈제는 국대안 반대운동에는 앞장섰지만, 좌익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계훈제는 우익 학생운동의 기수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장준하, 선우휘도 만났고, 김구 선생, 함석헌 선생도 먼 발치에서 만났다. 하지만 몸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한 번 기침이 나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던 중에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계훈제의 몸은 점점 야위어만 갔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자, 이승만은 일사천리로 단독정부를 구성했다.


전쟁과 투병 

전쟁이 터졌다. 계훈제의 몸속에서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38선을 넘어 인민군이 밀려 내려왔다. 병약한 계훈제는 군인이 될 수도 없어서, 그저 피난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서울로 다시 돌아온 계훈제는 병마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기침은 잘 멈추질 않았고, 늑골도 심하게 아파왔다. 압록강까지 올라간 국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후퇴하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 무렵 계훈제도 급성 맹장을 앓았고, 군의관 입대 영장을 받은 김웅규 의사를 찾아가 수술을 받았다.

1950년 12월 25일, 부산으로 가는 방위군 특별열차는 밀양역에서 하염없이 정차해 있었다. 며칠 전에 계훈제는 우익학생운동의 기수였던 인연으로 특별 배려를 받아 방위군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방위군 열차였기에 민간인이라고는 계훈제와 계훈제의 애인인 이여인(李女人), 그리고 희라는 이름의 여자뿐이었다.

방위군 틈에서 간신히 부산에 도착한 계훈제는 자갈치에 있는 부둣가 골목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좋아졌던 늑막염이 다시 악화되어 견딜 수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여인이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정일형 박사와 문창모 원장이 골목방을 찾아왔다. 그들의 도움으로 계훈제는 거제도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다.

세브란스 병원의 결핵병동에 입원했지만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각혈이 터지는 등 병세가 나빠지고 있었지만, 전황은 호전되어 다시 서울이 수복되었다. 서울 환도의 꿈이 현실로 드러났다. 병원도 서울로 돌아간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요양이 필요했던 계훈제에게는 절망이었다. 계훈제의 곁을 지킨 이여인은 다음 요양소를 찾아 뛰어다녀야 했다.

그렇게 계훈제는 마산 공군 요양소로 갈 수 있었다. 기침이 아주 심했다. 늑막염의 물에 가려 엑스레이도 나오질 않았다. 고열도 심해졌다. 고열이 가라앉지 않으니까 요양소에서 육군병원에다 진단을 의뢰했다. 이찬범 선생이 진찰을 했는데 농흉(膿胸)이라는 것이었다. 늑막의 물이 오래되어 고름이 됐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고름을 긁어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열이 내렸다. 실로 3년만의 호전이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요양소에서 지냈고, 육군병원에서 2차 수술을 받았다. 늑골 여섯 대를 잘라내는 대수술이었다. 다시 공군요양소로 돌아와 민가로 옮겨 치료를 계속했다. 다시 1년 후, 계훈제는 서울로 돌아갔다. 1959년 가을이었고, 장준하와 선우휘가 계훈제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이 땅의 민주주의는 계훈제가 병원과 요양소를 전전하는 동안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도 대수술이 필요했다. 이미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이승만 정부를 준엄하게 꾸짖었고, 그 때문에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었다.

마침내 생각하는 백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19혁명이었다. 계훈제는 성북구 정릉에 있던 사립 단과대학인 국학대에 강사로 나가기 시작했다. 국학대 강사로 나가면서 계훈제는 교원노조 설립에 깊이 관여했다. 4․19 혁명과 함께 장준하는 장면 정부에 참여했지만, 계훈제는 교원노조 활동에 성의를 보였다.

4․19혁명은 “역사의지가 지배하는 정의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양심의 권위는 솟아오르고 도리는 땅에 넘쳐흐르고 인간이 대접받아 민주주의는 꽃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5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과시했다. 그러나 4․19 혁명은 그것을 수용할 기반을 발견하지 못하고 요절했다.” 계훈제가 결성에 참여했던 교원노조도 5․16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거꾸로 흐르는 역사 

약간의 혼란이 없지 않았지만, 군인들이 더구나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군대를 이끌고 나와 쿠데타를 일으킨 것에 대해 계훈제는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과 함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투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계훈제는 직감했다. 기나긴 겨울 공화국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일본육사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수료했었다.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이 증거하듯이 박정희는 천황폐하의 충실한 장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육군대신상을 수상했고 항일 독립군의 토벌에 헌신적으로 참가한 결과, 임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했었다. 일제가 패전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박정희는 대략 110회에 걸쳐 항일 독립군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인물이었다.

징용에 반대해 승호리 시멘트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당하고 있을 때,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독립군을 사살하고 있지 않았던가? 박정희의 등장은 역사의 비극이었다. 계훈제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신성학교의 선배인 장준하, 함석헌 선생과 함께 울분을 서로 나누며 박정희와의 투쟁을 준비했다.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가 올 때까지 흰 바지만을 입고 오직 흰 고무신만을 신겠다고 맹세했다.

5․16 쿠데타 당시 장준하는 민주당 정권의 국토건설본부장직을 맡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에 의해 장면 정권의 요인들 대부분 체포당했고, 국토건설본부도 해체되었다. 다행히 장준하는 무사하였다. 이제 장준하와 박정희는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하게 되었다. 계훈제도 그 대결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바로 다음 달 6월호 <사상계> 권두언은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고 박정희한테 도전장을 보내면서 군은 최단시일 이내에 그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어서 재차 도전장을 낸 것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5․16 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논설이었다. 군사정부는 즉시 함석헌 선생을 구속하였고, 장준하를 입건하였다.

1962년에 계훈제는 장준하, 함석헌 선생과 함께 <자유언론수호협의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저항에 참여하게 되었다. 4․19 혁명 때부터 입기 시작한 흰 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고 거리에 나선 계훈제는 1964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참여하여 박정희 정권의 매국(賣國)외교를 규탄하는데 앞장섰다.

쿠데타 이후 증권파동, 새나라 택시 파동 등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켜 자금조달에 혈안이 되었던 군사 독재자들은 정치자금 조달원을 일본과의 매국외교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3억불이라는 돈에 눈이 먼 박정희는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가열찬 저항에도 불구하고 굴욕외교를 강행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신을사조약이었다. 바야흐로 민주주의는 압살당하고 있었고, 역사는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글_정도상

1960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전북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창작집 <친구는 멀리 갔어도>, <아메리카 드림>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는 <그대여 다시 만날 때까지>, <푸른 방>, <누망> 등이 있다. 현재 사단법인 통일맞이 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라디오21(www.radio21.co.kr)의 <정도상의 문학 속으로>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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