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시

[시대와 시] 사라진 징소리, 사라짐의 비극 - 신경림 `농무`

신경림 시집, `농무`
 

 글/서효인 (시인, humanlov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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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흙으로부터 비롯되던 날이 있었다.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은 날이다. 그때 우리 대부분은 해보다 먼저 일어나 새벽이슬과 함께 논과 밭으로 나갔다. 그리고 땅을 일구며 땅에 기댄 채 땅에 의해서 살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했고,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부드러운 땅이 아닌, 단단한 아스팔트 위로 올라야 했다. 맨손과 맨몸뿐인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그들은 도시로, 서울로, 서울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으로 모이고 모였다. 불과 50년이 되지 않은 이야기다.

신경림의 농무는 농촌의 이야기다. 가난의 서사이고, 떠남의 서정이다. 농촌은 우리 대부분의 고향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제 농촌에 살지 않는다. 농촌을 떠난 사람들은 자본의 총아인 대도시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끊임없는 경쟁과 긴장을 의미한다. 하루하루 우리는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 같은 시간들은 우리가 떠나왔던 농촌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정권의 치적이라 평가받는 경제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금 하에서 가능했다. 노동자의 저임금은 비현실적인 곡물가격에 의해 가능했다. 우리 땅을 밟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민중이라 불리는 그들의 허리띠 졸라매는 근검과 절약은 결국 강제된 고역이었고, 그런 고역 하에서 대한민국의 압축된 성장은 이루어졌다. 고통을 기반으로 한 성장이 불법적인 정권의 수장이었던 특정한 인물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이 이 땅의 현실이기도 하다.

시집 `농무`의 표제작 농무는 징소리와 함께 첫 연을 시작된다.

 


   농무
(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도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쇠약해져가는 농촌의 모습을 그린 이 시의 풍경은 스산하다. 그마저 이제는 찾을 수 없다. 쓸쓸하고 가난한 이야기는 이제 예전의 정경이 되어 오히려 옛일의 정겨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어쨌거나 추억은 아름답고 지난날은 그리운 법. 그것의 비극성에 우리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고향과 논과 밭, 이른바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될 수 없는 소외된 공간으로서의 비극이다. 신경림 이후로도 우리의 농촌은 가난(부재)의 서사와 떠남(없음)의 서정이 뒤섞이는 공간이다. 이것은 끝나지 않는 비극이다.

2011년 농촌 산구석의 학교는 거의 분교이거나 폐교가 되었다. 학교 운동장은 싸늘한 공터가 되었고 당연하게도 그 앞에 소줏집은 없다. 없는 것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농촌에는 가설 무대, ‘킬킬대는’ ‘처녀애도 없다. 울부짖는 꺽정이와 해해대는 서림이는 어디에 갔는가. 지금 농촌은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의 미열만이 있다. 미열 속에는 농가부채가 있다. 부지런함과 반비례하는 가난이 있고, 국가 경쟁력을 위한 FTA가 있다. 새로 건설되는 골프장이 있고, 난자당하는 강이 있다. 그것은 농촌을 보고, 이제 그만하라고, 사라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녕 사라져 박제되어야 할 유물에 불과한가? 농촌이? 농촌에서의 삶이? 혹은 생산성이 결여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선대부터 이어진 땅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근대화 이후에 자본이라는 괴물과 결탁하였다. 땅을 일구는 대신 땅을 사고팔면서 이득을 남기는 투기가 땅에 대한 사랑으로 둔갑하였다.

 

전야(前夜)

 

그들의 함성을 듣는다

울부짖음을 듣는다

피맺힌 손톱으로

벽을 긁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가난하고

억울한 자의 편인가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려 가는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쓰러지고 엎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죽음을 덮는

무력한 사내들의 한숨

그 위에 쏟아지는 성난

채찍소리를 듣는다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별로 할 일이 없다. 농사는 현재 대한민국에 별다른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산업으로 분류된다. 고도로 산업화된 시대에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땅 넓은 나라의 생산품들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대형 마트에서 대형으로 쌓인 오렌지와 배추와 쌀을 대형 카트에 실어 계산을 끝마치고 집으로 가져와 대형 냉장고에 넣어두지 않는가.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른다. “FTA덕분에 싸고 좋은 먹을거리가 많아졌군.” 이것이 이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제 농촌에 관심이 없다. 비와 눈이 많이 와서 벼농사가 망치고 하우스가 주저앉아야 농촌의 비극성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그저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할 자연의 피해자로서의 농촌이다. 그리고 농촌은 무관심 속에서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신경림 시인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연민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농무`의 시편은 우리 것에 대한 자기애였고, 자부였으며, 그것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갈대에서 시인은 산다는 것은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 노래했다. 땅은 언젠가부터 속으로 울고 있고 이제는 소리 내어 울고 있다. 땅에 묻힌 가축들, 땅을 등지는 사람들, 파헤쳐지는 강과 산. 그것은 속에 있던 울음을 밖으로까지 쫓아내는, 자본이라는 강력한 손길이다. 그 손길은 다분히 폭력적이지만 유혹적이고, 중독성이 강하다.

TV에서 나오는 농촌 프로그램에서는 80~90대 어르신이 등장해 정정한 모습으로 정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마당에는 고추가 마르고 있고 하늘은 푸르다. 서울에 간 5남매는 장성하여 손자들을 두었고, 손자들도 이제 결혼할 나이가 넘었다(물론 그 손자들은 취직난과 전세난에 시달려 쉽사리 결혼에 골인하지는 못한다). 명절이면 자손들이 찾아오고, 서로 간에 정을 나눈다. 그리고 짧은 연휴의 끝을 두려워하며 서둘러 떠난다. 벼는 파도를 치며 흔들리고 하우스에서 토마토들은 빨갛게 익는다. 아름다운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세계 각국과 속속 체결하고 있는 FTA광풍과 4대강 사업 등의 막개발 속에서 농촌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렇게 좁아지다가 결국엔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서정은 아름다운 서정이 아니다. 신경림 시인의 농무는 아름다운 시집이 아니다. 아픈 시집이다. 비극의 서정이다. 없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 강제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극이다. 비극은 계속된다. 강정의 구렁비 바위가 지금 이 시간 사라지고 있고, 내성천의 모래밭도 보가 생기면서 사라질 판이다. 그것이 모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후에도, 우리는 갈대처럼 속으로 울 수 있을까.

    시인이 노래한 <농무>에는 이러한 질문에 알맞은 답변이 없다. 그러나 시집은 강력한 징조로, 근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지엄한 메시지를 보낸다. ‘함성’은 ‘채찍소리’이기도 하지만, 결국 ‘노랫소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 속에서 우는 소리가 서로의 ‘못난 얼굴’로 가 닿을 그런 노래가 필요하다. 어디선가, 징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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