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멀리멀리

촛불시위, 반전평화운동 그리고 반전반핵가

촛불시위, 반전평화운동 그리고 반전반핵가

이영미

지난 겨울 촛불시위부터 시작하여 이라크전쟁 반대의 반전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반미 열기는 놀라울 정도이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반미’란 매우 낯설고 섬뜩한 구호로 여겨졌다. 공산군을 막아준 미국을 반대하는 것은 곧 용공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반미적 색채의 단편 <분지>를 쓴 작가 남정현이 반공법으로 처벌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반미란 단어 자체는 우리에게 그다지 좋은 어감을 주지는 못한다. 촛불시위의 수많은 대중들은 실제로 반미를 외치고 있으면서도(그 반미의 수준이 ‘미국은 사고에 대해 공정하게 처리하라’ 정도에서부터 ‘미군 철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할지라도 어쨌든 반미는 반미였다), 언론 인터뷰에서 상당수의 대중들이 “우리는 반미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우리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 마지막 금기가 사라질 날이 언제일까?)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민주화운동 내에서도 1970년대까지는 반미가 적극적인 이슈로 제기되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미국을 민주주의 수호자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 주장은 대중적인 설득력을 갖기 힘들었다.

미국에 대한 인식 변화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는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이었다. 자국 군대에 의해 국민 수백 명이 학살당한 기막힌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는 한국군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이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1980년대 초반의 그 엄혹한 상황에서 일어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운동권 내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서울대 학생이었던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사건에 이르면서, 반미는 민주화운동 내에서 대중화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1980년대 말에 학생운동 내에서 반외세 주장은 어느 때보다도 드높았고, 당연히 민중가요에서도 반미와 반외세의 주장을 다루는 노래들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항상 수용자의 요구가 창작자의 머리와 가슴을 움직여 노래로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본격적인 반미․반외세 주제의 노래인 <반미출정가> 같은 노래가 나오기 이전인 1986년과 87년에 많이 불려져, 수용자의 요구와 노래 생산의 시간적 격차를 메워준 노래가 바로 <반전반핵가>이다.

 

비장하면서 힘찬 가사
‘제국의 발톱이 이 강토 이 산하를 할퀴고 간 상처에 성조기만 나부껴’로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이 노래는 매우 강렬하다. 미국을 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발톱’, ‘할퀴고’ 등 강렬한 단어로 표현한 노래는 처음이었다. 거기에 선명한 ‘성조기’란 단어는 이 노래를 확연한 반미의 노래로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이 노래는 반미를 제목으로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제목에서 확인되는 이 노래의 핵심은 ‘반전’과 ‘반핵’이다. 제목을 다시 보면서 노래를 살펴보면 4, 5소절에서 이러한 주제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노래는 왜 하필 반핵과 반전을 내세웠을까? 당시에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특별히 높아졌던 것도 아닌데, 반미 주제의 노래를 지으려면 반전보다도 훨씬 설득력 있고 대중적인 주제가 많을 텐데, 하필이면 반전과 반핵이라니.

이런 궁금증은 이 노래의 창작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해결된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사람은 박치음이다. 본명이 박용범인 그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77학번으로 지금은 순천대 교수로 있다. 1970년대 말에 <악어사냥>이란 노래로 음반 취입을 하기도 했던 그는, 1980년 광주항쟁 직후에 전국을 휩쓴 노래인 <전진가>를 짓기도 했다.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로 시작해 ‘가자 가자 이 어둠을 뚫고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로 끝나는 이 단순한 노래는 비장하면서도 힘차서 광주항쟁의 죽음의 충격과 패배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투쟁의 용기로 바꾸어 놓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간간이 노래를 짓던 그는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초창기 환경운동단체의 대표격인 공해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환경운동연합을 오랫동안 이끈 최열을 비롯한 초창기 환경운동의 활동가들이 다 이곳 출신으로, 그때까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던 환경과 공해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인식과 자연과학적 인식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한 단체이다. 공학도로 석‧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그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전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감한 구호로 산뜻하게 마무리
이런 활동을 하던 그가 핵 문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 대한민국 땅에 핵무기가 없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 핵무기가 얼마나 어디에 있는지도 완전히 극비에 부쳐져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의 핵무기가 대한민국 땅에 있는 한 우리는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반전반핵가>는 바로 이러한 맥락의 소산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 노래는 반전과 반핵 주제보다는, 이러한 위험을 야기한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기 시작한 당시 대학생들에게 불려지는 대표적인 반미 노래가 되었다. 음악의 흐름으로 보자면 노래의 후반부가 좀더 발전해 있어야만 균형이 생길 듯한데, 뒤를 급히 잘라버린 듯한 말미를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이라는 대중적이면서도 당시로서는 과감한 구호로 산뜻하게 마무리함으로써, 이 노래는 더더욱 반미 주제의 노래로서의 대표성을 띠고 오랫동안 애창되었다.


글_이영미
1961년 서울 출생
한국종합예술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서 『민족예술운동의 역사와 이론』, 『노래이야기 주머니』, 『재미있는 연극 길라잡이』 등

<2003년 05월호 희망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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