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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민주주의

버마, 그 가난과 억압의 역사


버마, 그 가난과 억압의 역사 사진

43년 동안 군사독재 치하에 있는 버마. 버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국내외에서 투쟁하고 있는 정치인, 운동가들은 미얀마라는 국명을 부정하고 버마라는 국명을 고수하고 있다.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한 버마 군부가 인권탄압국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국명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버마의 국토는 한반도의 3배 정도이다. 그리고 국경선은 인도, 중국, 방글라데시, 태국, 라오스 등 5개국과 접하고 있다. 버마는 다문화, 다종교, 다종족 사회이다. 버마족이 70% 가량이고 그 이외에 130여 개의 소수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식민지에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소수종족에 대한 버마족의 지배는 매우 느슨했다. 소수종족들은 그들의 고유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였으며 조공을 바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버마와의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 놓이게 되면서 이 ‘공존의 법칙’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우선 영국 식민당국은 다수 종족인 버마족을 견제하기 위해 카렌, 친, 카친족 등 일부 소수종족에게만 군 입대 기회를 주었다. 특히 카렌족은 기독교화 됨과 동시에 식민군대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분할지배정책이었다. 영국의 분할지배 정책은 종족 간 불신을 키우게 되면서 독립 이후 종족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 식민당국의 분할지배정책
영국 식민당국은 토착 엘리트들과 대중들 사이에 놓여 있던 관계도 파괴하였다. 그나마 승려집단이 대중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특히 ‘불교청년회’가 반식민지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부터 영국 식민지 당국이 농업 생산성을 끌어올리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농촌에 깊이 개입하면서 대중들의 승려집단에 대한 지원도 약화되었다. 자연히 운동의 중심이 학생과 법조인 집단으로 이동되었다.
특히 학생들은 시위를 통해 반식민지 감정을 보다 급진적으로 표출하고 ‘우리 버마연합’이라는 단체를 통해 정치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우리 버마연합’에는 독립투쟁의 영웅 아웅산장군과 독립 이후 정부 수반이 된 우누가 가담하고 있었다.
버마 민족주의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해서 보다 정치적, 조직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1939년에 들어와 마르크시즘이 민족주의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치게 되면서 마침내 버마 공산당이 만들어 졌다. 더불어 인도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이 반제국주의를 기치로 하는 공산주의 이념을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당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포진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트연합전선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마 공산당과 다른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잠재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는 보다 빠른 독립을 위해 중국 국민당이나 일본과 제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아웅산 등을 중심으로 한 청년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인 ‘30인 동지’가 랭군을 빠져나가 일본에서 특수 군사훈련을 받았다. 반영 투쟁을 위해서 일본의 도움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42년 1월 버마 침공을 개시한 일본은 5월에 버마 전 영토를 거의 점령하였다. 1941년 12월 방콕에 집결한 ‘30인 동지’는 약 2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버마와 태국의 국경지대를 넘었다. 이 병력이 수도 랭군을 점령한 시점에는 약 3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카렌족 등 일부 소수종족들은 영국군 편에 가담하고 있었다.
1943년 8월 일본은 버마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사실상 버마를 일본군 통제 아래 두었다. 자연히 실질적으로 독립을 지원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일

 

버마, 그 가난과 억압의 역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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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군정 하에서 인민들의 생활이 더욱 피폐해지고 버마와 태국을 잇는 철도 건설공사에 수많은 버마인들이 강제동원 됨에 따라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었다. 이때 민족주의운동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일본과의 제휴가 독립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국내의 모든 반식민지운동세력을 포괄하는 항일 비밀조직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AFPFL)을 결성하였다.
AFPFL을 이끌던 아웅산은 은밀히 연합군과의 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하여 1945년 3월에는 휘하에 있던
1만여 명의 독립의용군을 연합군 측에 가담시켰다. 1945년 5월 랭군은 다시 연합군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독립, 경제파탄과 혼란에 따른 군부의 등장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AFPFL을 이끌던 정치 엘리트들이 급부상하였다. 이들은 ‘엘리트 간 합의’를 통한 주권 회복과 국민통합을 추구하였다. 우선 영국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주권을 돌려받았다. 소수종족 대표들과의 합의를 통해 버마연방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1947년 ‘핀롱 합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념적, 민족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당시의 버마사회의 통합을 이끌던 독립투쟁의 영웅 아웅산이 정적에 의해 피살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당시 AFPFL은 다음과 같은 약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로 독립 초기 AFPFL은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엘리트 중심의 정치조직이었다. 두 번째로 아웅산은 소수종족들과의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은 소수종족들을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이들에 우호적인 아웅산에 대한 거부감은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웅산이 피살됨과 동시에 다양한 정파, 종족세력으로 구성된 AFPFL의 분열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사회주의적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실행할 수도 없었지만 개혁에 따른 부작용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AFPFL 정부의 토지국유화 프로그램은 부재지주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무토지 농민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특히 이촌향도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도시에서는 불완전고용과 실업이 팽창하였다.
결국 버마는 점진적 방식의 사회주의 실현을 추구하는 우누 정부와 급진적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세력 그리고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소수종족 간의 내전 상태로 치달았다. 한때 버마는 국토의 3분의 2가 반란군의 세력으로 들어가 우누 정부가 ‘랭군 정부’로 불릴 정도까지 수세에 몰렸다. 

 

버마, 그 가난과 억압의 역사 사진 

이 위기를 극복하고 ‘군의 버마화’를 실현한 장본인이 바로 비옥한 땅 버마를 가난과 억압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네윈 장군이다. 독립 당시 버마군은 영국 식민군대 출신, 독립의용군, 소수민족 군대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질적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군 내부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기에다가 우누 정부는 소수종족과의 분쟁, 경제침체, 평화에 대한 요구 등과 같은 사안을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국정관리 능력이 한계에 봉착하였다. 따라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던 네윈은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다. 더군다나 네윈은 아웅산과 함께 ‘30인 동지’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권위가 있었다.
1950년대 내내 경제파탄과 내전이 거듭되자 마침내 우누 수상은 네윈에게 공정한 선거 실시를 위한 거국내각을 구성토록 요청하였다. 이를 네윈이 수락함에 따라 17개월 동안 네윈이 국정을 책임지는 보기 드문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1960년 선거에서 우누의 ‘청렴파’가 소수종족집단의 지지를 받아 군부가 지지하는 ‘안정파’를 누르고 승리를 거둠에 따라 우누 세력은 정치적 정당성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우누 정부에 대해 연방제를 요구하는 소수종족 대표자들의 압력이 거세지고 실제 일부 종족이 분리 독립 카드까지 꺼내자, 1962년 3월 네윈 군부는 분열 위기에 놓여 있는 조국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쿠데타를 단행하였다. 우누 수상과 각료들 그리고 의원들이 잇달아 체포되었다. 이로써 버마는 의회민주주의에 종지부를 찍고 끝을 알 수 없는 군사독재의 터널로 들어섰다.
네윈이 이끈 군사평의회는 불교와 민족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혼합으로서의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걸었다. 초기에 이들의 슬로건은 매력적으로 비추어졌다. 그래서 ‘버마식 사회주의’는 한때 일부 사회운동가들로부터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군사평의회는 그들이 만든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 이외의 정당 활동은 일체 금지시켰다. 모든 주요 국가기관이 군부에 의해 장악되었다.
반체제활동의 공간을 제거하기 위해 주민상호 감시제도가 도입하였다. 심지어 축구경기조차 금지되었다. 공산당과 소수민족 역시 탄압 대상이 되었다.
또한 ‘버마식 사회주의’는 자급자족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민간기업이 국유화되었고 외국인의 직접투자도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나 버마를 찾아온 것은 복지체제가 아니라 암시장이었다. 소수민족, 공산반군과의 내전까지 겹치면서 경제는 곤두박질 쳤다.
1974년 신헌법 제정으로 군사정부는 일단 문민화의 외양을 갖추었다. 이른바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BSPP 단일 정당국가로 출범하였다. 인민위원회와 단원제 인민의회가 선거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BSPP가 공식 후보자를 지명하였기 때문에 선거는 지극히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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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식 사회주의의 파탄
한편 네윈 군사정부는 심각한 물자 부족과 암시장 확산을 막기 위해 1987년 9월 농산물의 거래를 일부 자유화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부유층과 투기꾼의 이익만 보장하였다. 1987년 버마는 외환보유고가 2,3천만 달러밖에 안되는데 외채는 35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군사정부는 유통되고 있던 일부 지폐를 무리하게 폐지하기까지 하였다.
이미 같은 해 초 버마 군사정부는 UN에 버마를 외채 조정을 포함하여 최우선 원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최빈국(LLDC)으로 분류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해 12월 UN은 이 요청을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의 분노가 끓기 시작했다. 1988년 7월 네윈은 모든 문제를 책임지고 퇴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다당제 민주주의의 도입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분노는 진정되기는 커녕 계속 확산되어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민중항쟁’으로 폭발하기에 이른다.
1988년 9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하고 ‘위기 관리’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또 다른 군사평의회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가 등장하였다. 신군부는 과거의 사회주의 성향으로부터 탈피하여 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하고 외부 지향적 경제와 대외개방을 선언하였다. 1988년 11월 외국인투자법이 제정되었다. 1989년 국명도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서 미얀마연방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버마군사정부는 국가-토착민간자본-외국인자본 3각 동맹을 기축으로 하는 동남아시아 개발독재 모방에 나섰다.
1990년 5월 다당제가 허용된 가운데 총선이 치러졌다. 당시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 되어 있었고 계엄령으로 인해 4인 이상의 옥외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거의 공정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전국민주동맹(NLD)이 전체 485개 의석 가운데 392석을 획득했다. 반면 군부의 국가통일당은 10석 밖에 얻지 못했다. 이는 군부, NLD 양쪽 모두에게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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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승을 거둔 NLD는 군부에 대해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해 조속히 권력을 이양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NLD 지도자 아웅산 수지를 그대로 가택연금 상태에 두고 나아가 NLD 지도부 체포에 나섰다. 국가폭력을 수단으로 총선 결과 수용을 전면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를 계기로 적지 않은 학생, 정치인들이 버마를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평온한 그러나 악화 일로에 있는 인권
‘버마식 사회주의’의 종결과 함께 버마는 한때 약한 수준에서 호황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버마 군사정부 안에 팽배해 있는 관료주의, 비밀주의와 조령모개식 정책으로 인해 투자 환경은 제대로 개선되지 못했다. 특히 버마군사정부의 경제관리능력 취약성은 공식환율이 시장환율에 비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 있는 현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버마에서는 이미 1960년대 초부터 순수종교조직과 연고 집단을 제외한 노동조합과 학생조직 등 대부분의 시민사회조직들이 제거되었다. 1988년부터 다시 등장한 군사평의회는 시장 도입을 선언했지만 언론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통제를 가하였다. TV, 비디오, 팩스, 모뎀, 인터넷 등 모든 정보매체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식인들과 일반 대중들도 자기검열에 익숙해져 있다. 개발을 위한 강제노역도 빈발하다.

이를테면 1993년부터 몬주에서 있었던 철도 건설 사업에 12만 내지 15만의 주민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주민들은 임금 없이 일했고 심지어 식량까지 자기가 준비해야 했다. 폭염, 말라리아 풍토병, 오염된 식수, 영양실조 등으로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질병에 걸렸고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이외에도 살해, 고문, 재판 없는 구금, 강제이주 등이 빈번하게 행해지고 있다. 20003년 5월에는 디페인 지역에서 잠시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아웅산 수지와 그녀를 따르고 있던 군중들을 향해 정체모를 폭도들이 기습을 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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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최악의 인권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군사정부에 대해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정치세력은 NLD이다. NLD는 군사정부의 일방적인 정국 주도를 견제하기 위해 비합법 정통의회를 상징하는 인민의회대표자회의(CRPP)를 결성하고 아웅산 수지를 비롯한 모든 민주인사들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해줄 것과 군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제헌의회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함께 소수종족들도 NLD와 함께 군사정부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다. 외부에서는 미국, 유럽연합(EU) 등이 경제제재, 외교제재를 가하고 있고 UN, 국제노동기구(ILO)와 많은 국제사회 인권단체들이 버마 군사정부의 인권유린을 규탄하고 있다.
현재 버마는 평온해 보이지만 최소한의 인권마저 짓밟으며 ‘개발독재’의 길을 가고 있는 군사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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