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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민주주의

끝없는 군사독재, 갈 길 먼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끝없는 군사독재, 갈 길 먼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사진

끝없는 군사독재

파키스탄회교공화국(Islamic Republic of Pakistan)은 면적이 한반도의 3.5배나 되고 인구는 1억 5천 정도로 비교적 큰 국가이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반복되는 군사독재정권이 집권해 왔다. 파키스탄은 독립 후 58년 중 약 30년 동안을 군사정권이 통치해왔고 앞으로도 이 기간은 늘어날 가능성이 많다. 이렇다보니 파키스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될 기회는 자꾸 멀어져만 가고 있다. 1947년 8월 인도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은 1950년대 후반 첫 군사독재를 맞이하였다. 1958년 10월 아유브 칸(Ayub Khan) 장군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상·하 양원을 해산하고 1956년 헌법을 폐지한 이후 11년을 통치했다. 그러나 아유브 칸은 1965년 제 2차 인도와 파키스탄 전쟁의 패배와 친인척의 관직 등용, 부정부패, 경제개발의 실패 등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자 1969년 3월 육군참모총장인 야햐 칸(Yahya Khan) 장군에게 정권을 인계한다. 야햐 칸 군사정권은 1971년 12월 동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여 방글라데시를 건설하자 다수당 당수인 알리 부토(Ali Bhuto)에게 정권을 인계한다. 알리부토는 1973년 8월 신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내각책임제 하의 총리로 취임하여 1958년 이후 파괴되었던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회복한다.
그러나 알리 부토의 민주정권은 오래가지 못하고 파키스탄은 또다시 쿠데타에 이어 군사정권을 맞는다. 1977년 지아 울 하크(Zia-Ul-Haq) 장군은 무혈쿠데타로 부토 정권을 전복, 의회를 해산하고 1973년 모든 정당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한 헌법을 폐지한다.

끝없는 군사독재, 갈 길 먼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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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아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6년 1월 정당법이 부활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강압통치를 실시한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제한되고, 언론 검열을 강화시켜 군사통치에 위반된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잔혹할 만큼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지아는 정권의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 이슬람화(Islamization) 정책을 펼쳐 기존의 법제도를 이슬람 법전(Sharia)에 부합되도록 이슬람 국가건설을 추구하였다. 1988년 지아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파키스탄은 11년 만에 다시 민선 정부를 되찾는다.

 

이후 파키스탄은 계속해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한다.
특히 1997년 총선 후 탄생한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 정권은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정치체제 회복을 위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육군참모총장을 사퇴시키는 등 군부까지도 개혁해 나간다. 이런 일들은 파키스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파키스탄에 민주주의가 정착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대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샤리프 총리의 노력은 오랜 기간 동안 군사정권 아래서 많은 혜택을 누려왔던 군부는 물론 관료들과 지주들로 대변되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샤리프 총리는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육군참모총장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하고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정착은 요원해졌다. 무샤라프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군사령관직을 겸직하면서 파키스탄의 민주정치 체제를 회복을 저지하고 있다.

미국의 지원으로 성장한 군사독재

파키스탄이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군사독재를 유지해온 배경에는 미국의 지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세계일보에 기고한 내용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파키스탄 전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이끌던 파키스탄의 민주정부가 1970년대 말 지아 울-하크 당시 참모총장의 쿠데타로 무너지자 “국제사회는 처음(에)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실시할 것을 지아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옛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주하자 파키스탄의 민주화 요구는 수그러들었다. 미국이 옛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파키스탄을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미국은 파키스탄을 이용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독립 전사)을 지원하여 소련에 대항, 해방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이런 지원은 미국 정보부의 감독 아래 파키스탄 정보부가 도맡아 했다. 이 결과 파키스탄의 정보부는 아프칸 무자헤딘 단체들과 밀접하게 손을 잡고 일을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철저하게 지하의 군사정권을 지지하면서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정착을 지연시켰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파키스탄의 군사독재정권을 인정하고 지원한 실례는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이 9·11테러 발생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대 테러 전쟁을 수행하기로 결정하면서 파키스탄은 새롭게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마치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처럼 파키스탄은 미국 최대의 적인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조직을 붕괴시키는데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파키스탄 무샤라프 군사정권을 계속해서 인정하고 지원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미국의 대 파키스탄 지원은 단순히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한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경제와 군사 지원도 해주었다. 군사지원의 예를 들면 미국은 아프간 전쟁 이후 파키스탄에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의 지상병력의 움직임과 저공 비행체를 감시할 수 있는 6대의 경항공기  


끝없는 군사독재, 갈 길 먼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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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rostat) L-88 레이더 시스템과 1억 5천 5백만 달러 상당의 관련부품을 공급했으며 추가로 2천만 달러 상당의 F-16 전투기와 C-30 수송기 부품을 공급했다.
미국은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명목 아래 이란이나 북한의 정권은 타파하려 하면서 정작 파키스탄의 군사독재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는 미국의 이중잣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민주주의든 군사독재든 그 정권이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선이고 자국의 이익에 반하면 악이라는 미국의 논리로 오늘도 미국은 파키스탄의 군사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있다.

군사독재와 이슬람 근본주의 확산

파키스탄 군사정권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슬람 근본주의를 옹호하며 이슬람이라는 이름 하에 국민통합과 국가건설을 추구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이슬람 근본주의 신학도 전국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강화되었다. 동시에 파키스탄 군사정권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인도와의 적대적 관계를 조장하면서 인도령 카슈미르 지역에 이슬람 무장 테러단체를 잠입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파키스탄의 지원 하에 인도의 펀잡과 잠무-카슈미르 지역에서 테러가 자행되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국무부의 ‘1993년 국제 테러리즘 페턴(Patterns of Global Terrorism; 1993)’ 보고서에도 ‘파키스탄 정부가 인도 카슈미르 지역에서 활동하는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고 있다.’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특히 지하 울-하크 정권 하에서 성장한 수많은 무자헤딘들은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자 인도를 제 2의 적으로 상정하고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은 아프간 무자헤딘 전사들이 소련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처럼 이들을 인도령 카슈미르로 보내 카슈미르를 자국의 영토로 병합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아프간 무자헤딘의 상당수가 미국제 최신무기로 무장하여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인도령 카슈미르 지역으로 잠입해 들어왔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대표적인 테러단체들인 라쉬카르 에 타이바(Lashkar-e-Taiba, LeT), 하르카트 울 안사르(Harkat-ul-Ansar, HuA), 하르카트 울 무자헤딘(Harkat-ul-Mujahideen, HUM), 하르카트 울 지하드 에 이슬람(Harkat-ul-Jehad-e-Islam, HUJI)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친 파키스탄 게릴라 단체들이 성장하면서 인도 내 카슈미르 지역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살인, 강도, 강간, 방화 등이 매일 끊이지 않았다. 게릴라들은 특히 인도의 정부 기관과 군인, 경찰들을 상대로 로켓 발사와 폭탄 테러 등을 일삼았다.
파키스탄의 군사정권 하에서 성장한 이슬람 테러단체들은 이제 인도뿐만 아니고 세계 전체의 평화까지 위협하고 있다. 빈 라덴은 현재 파키스탄에 은거하고 있다는 설이 분분하고 최근 런던 테러나 테러 배후 세력들이 대부분 파키스탄 출신이라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파키스탄은 국제 이슬람 테러단체들의 온상이 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베나지르 부토의 말처럼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민주화만이 파키스탄이 국제테러의 온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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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과 국가분리

파키스탄의 군사독재와 권위주의체제의 폐단은 국가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기이하게도 서파키스탄(지금의 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으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독립을 했다. 파키스탄의 영토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누어진 채 존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파키스탄에서 국가의 정치·군사·경제·사회분야 대부분의 권력을 서파키스탄, 특히 펀잡 지방 사람들이 장악하면서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사이의 경제발전 불균형이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파키스탄 국민들의 불만은 가중되어갔다. 더 큰 불만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아유브 칸(Ayub Khan)의 중앙 집권적 정치체제에서 동파키스탄 엘리트들이 대부분 소외되면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아유브 군사정권은 공개적으로 경제발전과 국가통합을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군사정권 하에서 서파키스탄 사람들이 정치와 군사 권력을 독점하면서 동·서 파키스탄 사이의 경제적 불균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군사독재체제 하에서 입법부는 거의 그 기능을 상실한 채 파키스탄의 민주주의체제는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아유브 칸 독재정권에 이어서 계속되는 1969년 3월 야햐 칸(Yahya Khan) 군사정권의 탄생은 동파키스탄 국민들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지역불균형 해소와 자치권 확보라는 일말의 희망마저 빼앗아갔다. 서파키스탄 출신이 장악한 군사정권은 동파키스탄 국민들에게 외국의 식민 지배나 다름없는 억압과 차별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동파키스탄 국민들은 군사정권 하에서의 차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새로운 독립국가인 방글라데시를 건설하였다. 이는 독재와 비(非)민주적인 권위주의 체제의 폐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글·김찬완
인도 델리대학교 정치경제학 박사. 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남아시아연구소 책임 연구원.
현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기업대학원 및 인도어과 강사
자료사진·『India Today』 1995년 6,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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