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민주주의

고대 로마 공화정의 역사

로마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글의 주제인 로마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사 전체에서 보면 왕정과 제정의 중간 단계에 속한다. 근대 역사철학의 완성자인 헤겔은 로마와 그리스는 세계사에서 소수이긴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 민족이라고 평가한다. 기독교와 더불어 로마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유럽 지역을 문명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그는 생각한다. 로마와 기독교를 통해 유럽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바탕으로 세계사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헤겔의 시각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로마의 역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법의 영역 등에서 보여준 탁월함에서 로마 역사의 의미를 찾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에서 바람직한 정치제도와 정치 행위의 영원한 모델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을 인간의 자유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정치제도의 본보기로 삼아, 자신이 살던 시기의 이탈리아의 정치적 부패를 극복하고자 했다.

고대 로마 공화정의 형성과 융성기
(BC 509 ~ 264)

로마는 왕정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를 건국한 사람은 로물루스이다. 군신(軍神) 마르스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그는 기원전 753년 로마를 건국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로마의 왕정은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들어서기까지 지속되었다.
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고, 전승되어 오는 자료들에 대한 신빙성을 둘러싸고도 학자들 사이에 이렇다 할 합의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대체로 수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인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쇠퇴가 왕정을 몰락시켰다고 많은 학자들은 판단한다.
공화정은 본래 리퍼블릭(republic)의 번역어로 그 어원은 라틴어 레스 푸불리카(res publica)이다. 이는 라틴어로 물건(thing)이나 일(affair)을 의미하는 레스(res)와 공공의 혹은 공적인(public)을 뜻하는 publicus의 조합어로 공공의 일이나 공공의 재산을 의미한다. 레스 푸블리카, 즉 공화국은 왕이나 소수의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 속하는 공유물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인 사안들에 대해 왕이 아니라 시민 일반이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 공동체가 공화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화주의는 본래 시민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안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닌다는 자치, 즉 자유의 원리를 내세운다. 그런 점에서 고대 아테네에서 발생한 민주주의와 시민 스스로의 통치라는 자치의 이념을 공유한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이 등장했다고는 하나 갓 태어난 로마의 공화정은 안과 밖의 도전을 극복해야만 했다. 외부로부터의 위협과 평민과 귀족 사이의 내부 투쟁을 극복하면서 로마 공화정은 성장했다. 귀족과 평민 사이의 투쟁은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한 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평민들은 귀족들과의 투쟁에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전쟁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귀족들 못지않은 용기와 지혜로 외적을 물리치고 공화국을 수호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귀족과의 내부 투쟁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정부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유에 해를 끼칠 세력이나 사람에 대한 강한 두려움과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귀족들도 매우 용기가 있었고,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원로원에서 로마의 운명과 관련된 정책들을 논의하고 결정했으며, 이 결정들은 대부분 현명했다. 로마 공화정 초기의 귀족들은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불리는 귀족적 책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사회에서 누리는 높은 지위와 신분에 어울리는 책임을 다하고자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들은 전쟁이 나면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했다.
전성기일 때 로마 공화정은 지중해의 제해권을 놓고 강대국인 카르타고와 자웅을 겨루는 전쟁을 수차례 벌였다. 17년 동안 지속된 제 2차 포에니전쟁에서 시민병사들은 물론이고 지배층 인사들 역시 조국을 위해 모든 힘을 다했다. 예를 들어 17년 동안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으로서 최전선에 나가 싸운 사람의 수는 25명에 달했고, 그 중 8명은 전사했다.
기원전 367년쯤 평민과 귀족 사이의 대립은 어느 정도 진정된다. 그 해에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 한다는 것이 법률로 확정됐다. 이즈음에 진행된 로마 공화정의 여러 개혁조치들은 후에 로마가 주변의 강대국들을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나아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로마는 피정복민들을 포용하는 관용정신을 보여주었다. 로마에 등을 돌리고 로마와 전쟁을 벌인 주변 국가들에게도 로마인들은 결코 분노와 적개심을 분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일부에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포함하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권이 없는 제한된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로마는 주변의 도시들을 정복한 다음에 이들을 자국민으로 만들거나 그에 상응하는 권한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이것이 다른 민족과의 혼합이 나라의 독립과 기강을 문란하게 하여 국가의 몰락을 초래한다고 믿었던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구별시켜주는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다른 민족과 나라들에게 전혀 야만성과 잔인성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대 적국이었던 카르타고뿐 아니라 순순하게 복종하지 않은 민족들에 대해서는 약탈과 대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여하튼 기원전 338년 이후에 선보인 포용정책을 통해 로마는 자신에게 패배한 라티움 지역의 모든 적국들을 충성과 희망의 끈으로 묶어둘 수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의 동맹국들은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로마의 편을 들게 되었다.

포로로마노 포룸로마눔이라고 불린 고대 공공광장. 주위에 공공건축물이 있고 열주가 둘러쌓인 공간을 집회 장소나 시장으로 이용하였다.

 

공화정의 전성기 그리고 위기와 몰락
(BC 264 ~ 131)

카르타고와의 첫 전쟁이 시작된 기원전 264년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이 시작되는 기원전 133년까지가 로마 공화정의 전성기에 해당된다.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한 로마는 지중해 세계로 확장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지중해의 제해권과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라는 강대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전쟁은 흔히 포에니전쟁이라고 불린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도시국가로 출발하여 그 당시에는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64 ~ 241년까지 지속된 제 1차 포에니전쟁보다 제 2차 포에니전쟁이 로마의 역사에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원전 218년에 시작되어 기원전 201년에 끝난 제 2차 포에니전쟁은 ‘한니발전쟁’으로 유명하다.
제 2차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전쟁의 주 무대는 제 1차 포에니전쟁 때와는 달리 이탈리아 전역이었다. 한니발은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커다란 위기에 처한 로마는 파비우스(Fabius)와 스키피오(Scipio)의 탁월한 지도력과 로마인들의 단결로 위대한 명장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다. 제 2차 포에니전쟁을 계기로 로마는 그리스 세계와 전면적인 접촉을 갖게 된다.
그 후 로마는 독립을 찾으려는 그리스인들의 희망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아카이아 동맹과 대다수 그리스 동맹을 강제 해산시켜 동방지역을 로마의 지배권 하에 두고, 북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영토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다시 급속하게 성장하는 카르타고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된 로마는 기원전 149년에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기원전 146년에 마침내 카르타고를 멸망시켰다.
이 때 드러난 로마의 야만성은 피정복인에게 보기 드물게 포용력과 관용을 보여주었다는 로마의 명성에 지울 수 없는 치부로 남게 된다.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제국으로 성장했다.
이제 로마에 대항하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에게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바로 희망은 환상임이 드러났다. 로마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 즉 공화국을 몰락시킬 내부 분열이라는 적을 상대해야만 했다. 로마 공화국을 파멸로 몰고 간 것은 평민과 귀족의 분열이었다.
해결 방안을 둘러싸고 후기 로마 공화정은 평민파와 귀족파로 불리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평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치 세력인 평민파의 지도자들 역시 로마의 유수한 가문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그 비극적 실패

그라쿠스 형제가 평민의 보호자인 호민관으로서 개혁 정책을 펼치게 될 시기(기원전 133년 이후)의 로마 공화정은 심각한 사회적·경제적·군사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중소 자영농이 빈민층으로 몰락해 가고 있었으며,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많은 시민들이 전사했기 때문에 병력도 급감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곡물 가격의 급등으로 커다란 혼란에 직면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원전 139년부터 가장 많은 곡물을 공급해주던 속주인 시칠리아에서 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나 곡물 가격은 더욱더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빈곤으로 굶어 죽거나, 강에 빠져 자살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는 당시 로마의 최고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형제의 증조부와 조부는 집정관을 지냈으며, 아버지 역시 집정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으며 개선식을 두 차례나 치를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형제의 어머니는 한니발전쟁에서 위기에 처한 로마를 구원한 위대한 스키피오 장군의 딸이었고, 스키피오 가문과 그라쿠스 가문은 지속적인 제휴를 맺고 있었다. 로마를 대표하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라쿠스 형제는 위기에 처한 로마 공화정을 구하기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귀족세력과 평민들의 투쟁은 유혈참극으로 종결된다.

기원전 133년에 극단적인 귀족파 세력은 뜻을 같이하는 원로원 의원들과 노예들로 구성된 추종자들을 몽둥이와 지팡이로 무장시킨 채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로마 시민 300여명을 죽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당시 30세였다. 그 후 기원전 123년에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선출된다. 가이우스는 기원전 123년과 122년에 연달아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그의 형보다 광범위한 개혁들을 단행했다. 그가 추구한 개혁 역시 보수적인 귀족파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귀족세력들은 지속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가이우스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가이우스 또한 지지들과 함께 형 티베리우스처럼 살해되어 티베리스 강가에 버렸다. 그 수가 무려 3천에 달했다고 한다. 보수 세력의 집요한 공격으로 가이우스 역시 형 티베리우스가 처했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세계 제국으로 성장한 후에 귀족들은 로마를 강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평민과 귀족들의 화해 정신이나 위기에 처한 조국의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헌신할 줄 알았던 고귀한 귀족적 정신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 후 1인 지배체제로 로마를 이끌며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하여 전성기를 맞이 하였으나 부루투스에게 암살 당했다.

카이사르의 등장과 로마 공화정의 몰락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유혈 참극으로 끝난 뒤 로마는 여러 차례 평민과 귀족을 대표하는 세력들 사이의 내전 상황에 빠져들곤 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의 시기에 귀족과 평민의 투쟁은 극에 달했다. 그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오랜 전통을 지닌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58년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뒤, 그곳에서 9년을 지내며 오늘날의 중앙 프랑스 및 북 프랑스, 벨기에와 독일의 일부 지역을 로마에 귀속시키는 업적을 쌓는다. 이 결과 서유럽이 로마 문화권으로 편입되었다.
카이사르와 반카이사르 사이의 본격적인 대결은 시간 문제였다.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는 귀족파의 협력을 얻어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49년 드디어 원로원은 칼을 빼들었다. 원로원은 갈리아에 있는 카이사르에게서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로마로 되돌아 올 것을 결의함과 동시에 폼페이우스에게 무제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이미 반역자가 되었다. 원로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탈리아 영토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내전은 시작되었다. 내전의 최종 승자는 카이사르였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로마 공화국을 재건하는 사업을 했다. 기원전 45년에 카이사르는 여러 개혁들을 단행했다. 예를 들어 원로원의 수를 6백 명에서 9백 명으로 늘린 뒤 새로 로마에 편입된 이탈리아 지역 출신이나 심지어 갈리아 출신들에게도 원로원직을 개방했다. 로마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점점 자신에게 로마의 모든 권력을 집중시킨다. 이제 그의 존재는 로마 공화정과는 양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공화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원로원들의 분노를 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의 폼페이우스 동상 아래에서 정적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콜로세움


로마의 귀족세력과 카이사르를 암살한 사람들은 카이사르만 제거되면 로마의 공화정은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믿음이 공허한 환상에 불과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로마 공화정의 위기의 근원을 단순히 왕이 되고자 하는 한 개인의 정치적 야심으로 착각했다. 왜 로마 공화정이 지속적인 위기와 내전으로 점철되었는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이래로 근 백 년 동안 반복되었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종식시킬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로마는 다시 내전에 휩싸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무찌름으로써 내전은 종식되었다.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이후 1세기 동안 반복된 로마 내전의 완전한 종식이었다. 최종 승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자신에게 ‘존엄자’(Augustus)와 ‘제 1시민’(Princeps)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장악한 로마 제국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와 함께 로마 공화정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글 나종석 연세대 철학연구소 전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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