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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을 빼닮은 큰 어른, 홍남순 변호사 2




변호사 홍남순은 『함성』지 사건을 각별하게 기억한다. 그것은 박석무와 김남주를 비롯한 전남대 학생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비난하며 유인물을 뿌린 사건이었다. 학생들을 변호한 홍남순은 무죄판결을 끌어낸다. 하지만 변호사인 그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홍남순은 그 뒤로 시국사건에서 단 한 건도 무죄판결을 받아내지 못한다.

“1970년대 공안부 검사들은 기소만 해놓으면 끝난다는 식이었다. 검사가 유죄를 입증하기보다는 변호인이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대로 유죄판결이 떨어지고 마는 엉터리 재판이 대부분이었다. 형량 역시 턱없이 인플레 현상을 보인, 양형 감각마저 희미해져버린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피고인의 양형에 매달리기보다 오히려 정부의 법률 운용에 대한 불법성을 지적하려고 애썼다.”

홍남순은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늙으나 젊으나 맞절을 한다. 그리고 집 밖에까지 배웅을 한다. 사무장하고도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 맞절을 하는 그답게 시국사건으로 만난 이들도 아꼈다. 단순한 민주화운동 동지로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기꺼이 찾아가 양심수들의 경조사를 챙겼다. 그랬으니 그가 법정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양심수들은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법조문이 아니라 몸으로 변론하다

법정에서의 변론 못지않게 감옥에서 신음하는 양심수를 찾아 위로하는 ‘법정 밖의 애정’이 더욱 절절했고, 구차한 법조문으로 따지기보다는 정의와 양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변론을 대신하였다. 말로 변론한 것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으로 변론하였으며, 피고인과 변호인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만났다. 정광진 사무장이 작성한 변론사건 목록은 곧 홍남순이 발로 달려가 만난 ‘동지적 사랑의 목록’이나 마찬가지다.(김정남의 회고)
이돈명 변호사는 말한다.


“그 분은 법조문으로 변론하기보다는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양심과 정의로, 말보다는 몸 전체로 자신을 드러내어 변론합니다.”

1970년대 홍남순은 ‘긴급조치 전문변호사’라는 별칭을 얻는다. 『함성』지 사건(1973년), 3·1민주구국선언(1976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된 고영근목사사건(1977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파면된 교사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필화사건(1977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된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의 우리의교육지표사건(1978년) 등 40여 건에 달한다. 그는 전국 곳곳에 발품을 팔았다.

“노인네가 다들 미쳤다고들 했다. 서울이건 부산이건 내 돈 들여가며 뛰어갔으니까. 그러나 한 번도 고달프거나 짜증나지 않았다. 시국의 물줄기는 바꿀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 힘으로 정의의 작은 불씨를 일으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5·18민중항쟁 이전에 광주의 민주화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우리의교육지표사건’으로 구속된 송기숙은 혼자 격리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정서불안 상태였던 그는 홍남순의 변론을 들으며 가슴에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그 재판풍경을 변호사 홍성우는 회고한다.

 

“하루는 부장판사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송기숙 교수를 고압적인 언동으로 깔아뭉갰다. 그걸 지켜보던 홍남순 변호사는 ‘판사가 피고인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판사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예끼’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판사는 홍 변호사님이 짧게 내뱉은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금세 얼굴색이 발그스름하게 변하면서 고개를 아래로 잠시 떨구었다. 나는 그때의 홍 변호사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그걸 보면서 ‘광주란 이런 동네구나. 광주사람들끼리의 인정, 교류 같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홍남순 영감이 아니면 저렇게 판사를 나무랄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판사를 그렇게 나무라는 사람은 처음 봤다.”

 5·18은 민중혁명이다!


1980년 5월 26일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하는 계엄군에 맞서 홍남순은 16인의 수습위원들과 함께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나선다. 그날, 그의 뒤를 따른 어느 젊은이의 회고다.
“도청을 나와 한참을 말 없이 걷고 있는데, ‘어이 갑제, 나는 살 만큼 살았네만 자네는 참 안 됐네.’그래요. 그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네는 아직 젊으니 앞으로 할 일이 많네. 그러니 몸을 피신하게.’라고 말할 텐데, 홍 변호사는 그게 아니었다. 광주시민이 죽어 가는데 젊고 늙음이 무슨 필요 있겠냐는 거지요. 사실, 저도 그 자리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거든요.”
1980년 5월 21일, 죽어도 집에서 죽어야겠다고 서울에서 광주로 돌아온 홍남순은 시내병원을 둘러보았다. ‘병원 복도 여기저기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가마니를 덮어놓은 시신들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 눈과 머리가 짓이겨졌거나 총상을 입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1980년 12월 17일 홍남순의 항소심 재판이 열린 육군고등군법회의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살만치 살았고, 저기 있는 두 여자 분들(이애신, 조아라)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며 불의에 항의하고 올바르게 살았는데 무슨 죄가 있나.’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나, 다 석방해야 한다. 나이 먹어가면서 법조인으로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수습위원 활동을 부당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홍남순이 최후진술을 하는 동안 법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방청석에 앉은 가족들뿐만 아니라 구속자들도 흐느껴 울었다. 5·18민중항쟁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홍성우 변호사)라는 말대로, 각본에 따라 검사는 무기징역을 내렸다. 그러자 생사가 오락가락 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셋째 아들 기섭이 냅다 ‘이 개자식들아, 이게 재판이냐!’하고 재판장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졌다. 구속자 가족들은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 법정에서 나와 버렸다. 재판관들이 피신하는 바람에 재판은 중단되고 헌병대원들이 진압에 나섰다.


 

1981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홍남순은 5·18민중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고 시민들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이 워낙 심한 터라 사람을 모으고 민주화운동 단체를 만들기가 힘들었다. 1983년 복권이 된 그는 민주화운동의 물꼬를 트는 데 주인공으로 나섰다.


“젊은 동지들과 박석무, 송기숙 교수 등 몇 사람이 찾아와서 나의 고희를 기념하는 논총집도 하나 내고 조촐한 기념행사라도 한번 꾸려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모두 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동지들이며 이 나라의 양심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서로 자신들의 글을 쓰고, 거기에 덧붙여서 이 나라의 정치·경제·역사·인권 등을 폭넓게 논해보자는 의견들이었다.” 고희 논총집에 참여한 필자들(문익환, 백기완, 리영희, 이호철, 유인호, 송건호, 이효재, 김진균, 한승헌, 이우정, 안병무, 성래운, 백낙청)을 몽땅 밖으로 내보내면 대한민국이 조용할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발간위원회는 책을 만들었다. 논총집 증정식이 열린 곳은 광주 YMCA 무진관이었다. 재야인사와 야당 정치인 그리고 민주화운동가 수백 명이 모여 커다란 행사를 벌렸다. “그날 행사는 5공 군부세력에 의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던 민주진영이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기지개를 켜는 발대식이나 마찬가지였다.”(박석무의 회고) 비로소 5·18민중항쟁 이후 첫 공식 대중집회가 열린 셈이었다. 박석무는 민주화운동을 활성화하는데 홍남순이 기여한 점을 말한다. “조직을 만들기 위한 싹을 마련한 셈이다. 첫 결실로 구속자가족협의회가 만들어졌고, 5·18광주민중항쟁 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로 나아간다. 홍남순은 민주화운동 조직을 만드는 씨앗이 된 셈이다. 조직의 ‘장’을 맡음으로써 홍 변호사는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5·18 광주항쟁 희생자 위령탑에 민중혁명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압박하는 군사정권에 홍남순은 항의했다.


“세상과 역사는 유동적이고 또 그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거다. 지금의 정의가 나중에는 불의가 되기도 하고, 또 그것이 반대의 입장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동학이 무엇인가? 그들 역시 당시에는 만고의 역적으로 삼족이 결딴나는 무거운 형벌을 받았지만 시대가 바뀐 지금에 와서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민중은 곧 백성을 일컬음이다.

 

무등산의 혼이 숨쉬는 큰 어른

평생을 함께 한 사무장 정광진은 인간 홍남순을 보면서 악한 일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선한 인간이 많다고 생각한다. 홍남순을 감시하던 형사나 기관원들이 나중에는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보안사에서는 정보과 형사에게 홍남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 형사는 ‘옷 벗어도 좋다.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해서 홍남순 변호사를 사지로 몰 수 있나. 그것만은 못한다’고 거부했다. 홍남순은 ‘광주시민으로서 대책위원장을 하라기에 시민의 안전보장을 위해 나섰다.’고 주장했다. 증인으로 나온 형사는 홍 변호사님이 수습위원으로 청년들을 설득해서 총을 회수하지 않았으면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을 거라고, 홍남순의 도움이 컸노라고 증언하였다.

고려말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했듯, 세상을 시류에 맞춰 살면 되지 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던 형사는 고희 논총집 증정식을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홍 변호사님에게 두 번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는 1981년 12월 홍 변호사님이 석방되자 위로 차 집에 찾아오는 하루 수십 명의 인파를 보고서였다.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다. 정계·학계·재야·종교계 등에서 그야말로 쟁쟁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다. 오늘을 계기로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 ‘이런 삶이 존경받는 삶이고 성공한 삶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작은 일만 있어도 홍남순에게 역정보를 주었다. 돌아가는 정황을 얘기해주면서 이런 것은 조심하라거나 빨리 피신하라고 일러준 것이다. 그는 진심이 우러나 홍남순을 도와주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권력을 잡은 오늘의 세태를 홍남순은 어떻게 볼까. 그는 민주화운동을 한 경력을 이용해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광주문제가 해결되고 문민시대가 열리자 주위에서는 그에게 통일운동이나 환경운동에 나서기를 바랐다. 그러나 홍남순은 ‘나는 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광주시민으로서, 변호사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 도리를 다할 뿐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원래의 삶터로 돌아가라. 신부와 목사는 성직자로, 교사는 교단으로, 농민은 농사로, 사업가는 사업에 매진하라. 민주화운동이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화운동은 국민의 도리다. 인권을 탄압하고 유린하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은 국민의 도리다. 나는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싸웠을 따름이다.’.



홍남순은 2001년 11월 25일 궁동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모든 신체기능이 다한 홍남순은 이즈음 광주시립인동치매병원에 누워있다. 94세의 인간 홍남순. 군부독재와 불의에 맞서 자신의 살과 뼈를 다 내준 그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다.




 홍남순

1912년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출생
1930년 화순군 능주공립보통학교 졸업
1941년 1월 26일 윤이정과 결혼
1948년 조선변호사 시험 합격
1953년 광주시 궁동 15번지에 변호사 개업
1957년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
1958년 제 4, 5대 국회의원선거관리원회 광주을구 위원장
1964년 대일 굴욕외교반대 투쟁위원회 전남부위원장
1969년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전남위원장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남 대표
1973년 ‘지식인 15인 시국선언’ 참여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남대표 상임위원
1980년 민주헌정동지회 전남 조직 책임자
광주 5·18항쟁 수습대책위원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 선고
1981년 징역 7년으로 감형, 홍성교도소로 이감
형 집행정지로 석방
1983년 광주시 궁동에서 변호사 다시 개업
고희논총기념 출판기념회
1984년 광주5·18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
1985년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
1986년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의장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짐
현재 광주시립인동치매병원에 입원 중


* 글 윤동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벽길」 발표
2003년 평전 『윤상원』 발간
2005년 작품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강 출판사) 발간

* 사진 제공 홍남순 변호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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