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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큰 스승, 이오덕 2


겨레의 큰 스승, 이오덕 2

 

미군기지 이전을 두고 우리는 지금 평택들에서 아픔을 겪고 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다른 나라의 군사기지로 내주어야 하는 농민들과 그들의 편에 서서 함께 지켜내려는 이들의 처절한 저항이 정부의 냉정한 공권력과 맞붙어 하늘이 온통 핏빛이다. 또 한쪽에서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문제로 여론이 갈려 소란하다. 그러나 대세는 개발과 경제논리를 앞세운 권력자들에게로 기울어가는 것이 분명하다.
저항은 저항으로 끝나는 것인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다니엘 벤사이드의 말처럼 저항은 본질적이며 급진적이고 때 맞지 않는다. 시대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평화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거꾸로 반시대적으로 나타난다. 때 맞지 않는다는 것, 그건 거스르는 방식으로 시대를 취하기이며, 결을 거슬러서 역사를 솔질하기이다.

겨레를 살리는 길

지난 8월 24일, 서울 정동에서 <제 1회 이오덕 공부마당>이 열렸다. 이오덕의 3주기와 때를 맞춰 열린 그 자리는 그와 함께 오랫동안 교육운동을 해온 여러 후배와 제자 그리고 뜻을 따르는 교사들이 마련한 학술발표회였다. 이오덕의 교육사상과 문학을 연구하고 새롭게 깨닫기 위한 마당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고 때로는 숙연했다.
요즘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가. 새로운 기술을 앞세워 세계시장을 휩쓸며 부를 창조해내는 기업이 있고 핵무기 철폐와 테러지원국을 처단한다는 거짓이름 아래 벌어진 침략전쟁(경제전쟁) 한복판에 군대를 보내는 나라, 그래서 자본 만세를 외치는 부자들이 넘치는 이 땅. 하지만 뒤로는 일터에서 쫓겨나는 노동자들과 한뎃잠을 자야하는 가난한 이들이 여전히 상존해 있는 나라.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전자문명은 이제 나라의 경계를 허물어 겨레의 정체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 므흣, OTL, 지름신, 된장녀 따위의 채팅어가 버젓이 살아 날뛰는 오늘.
공부마당에서 주중식(샛별초등 교장)은 이오덕을 오늘로 불러왔다.
우리 겨레가 아무리 가난하게 살고 흉악한 외국세력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깨끗한 우리말만 가지고 있다면 희망이 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배불리 먹고 사치하게 살더라도 우리말이 병들고 우리말을 잃을 땐 우리 역사가 끝장나는 것이다. 말을 잃으면 얼을 잃는 것이요,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니, 우리 앞에는 오직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글은 말에서 나왔고, 말은 생각에서 나왔다. 생각은 삶에서 나왔고, 삶은 바로 살아 있는 목숨이다. 우리가 읽고 쓰는 글은 어떤가. 거의 모두 중국글과 일본글과 서양글을 그대로 옮겨와서 그것들을 마구 뒤섞어서 써놓은 글이다. 중국글은 천년 전부터, 일본글은 80년 전부터 그리고 영어는 8·15 이후 아주 큰 줄기가 되어 우리글을 부려왔다. 참으로 불행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또 엄연한 사실이다. 그 결과 글이 말을 끌어가고, 그 글말이 사람의 생각을 끌어가고, 삶까지 끌어가는 거꾸로 된 역사를 살고 있다.(『우리 글 바로 쓰기3』, 1989)

공부마당이 고요한 가운데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중국 글자를 빌어다 쓰면서 우리말을 몰아냈고, 일본에게 억눌려 살던 때는 일본말이 퍼졌으며, 지금도 그때 배웠다는 사람들이 일본말을 우리말인 것처럼 퍼뜨리고 있다. 이제는 국제화 시대에 맞추어야 한다며 영어가 가까이에서 판을 친다.  

어디 그뿐인가. 어린 초등학생을 미국이다 캐나다다 호주다 돈을 퍼다 주며 유학을 보내지 않는가. 이 부끄러움에서 과연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주중식은 마치 이오덕의 혼을 몸에 담은 것처럼 우리말 살리기의 마음가짐을 잇는다.
우리말을 살리기 위해 마음을 써야하는 몇 가지를 들어본다.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모두 남에게 자기를 자랑해 보이려는 버릇이 굳어져 있다. 그래서 근사한 말, 멋있는 말, 남들이 잘 안 쓰는 어려운 말을 쓰려고 하는데, 그런 못된 버릇을 고쳐야 한다. 민주운동과 마찬가지로 말 살리는 일도 밑에서부터 시작하고 밑에서 퍼져나가야 한다. 사전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구수하고 아름다운 수없이 많은 우리말을 속어니 사투리니 해서 푸대접하거나 아예 올려 놓지도 않고 온갖 잡동사니 한자말을 일본사전에서 옮겨 놓은 사전은 믿지 말아야 한다. 자기 나라 말 공부부터 먼저 해야 하고 자기 나라 말을 사랑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제 나라 말은 잘 모르면서, 제 나라 글은 쓰지 못하면서, 남의 나라 말을 배우게 되면 외국을 숭배하게 되어 반민족의 길을 걸어가게 마련이다.(『우리 글 바로 쓰기3』, 1989) 

 

참으로 섬뜩한 말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겨레의 생각을 이끌어 가는 교사와 언론인 그리고 지식인을 비롯한 지도급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반성을 촉구하고 경종을 울린다. 틀림없이 이오덕이 다시 살아와 앞에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도종환(시인)과 이경수(문학평론가)가 이오덕의 문학세계를 연구하여 펼치고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이 이오덕 우리 말 사상을 다시 길어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오덕의 가르침을 받고 어린이집에서 15년째 마주이야기교육을 하고 있는 박문희의 생생한 증언이 뒤를 따랐다. 특히 요즘 어린이문학이 처한 실상을 아프게 찌른 서정오(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사)의 ‘삶에서 길어 올린 믿음과 양심’이라는 주제의 「이오덕의 문학 사상 연구」는 함께한 여럿의 마음을 움직였다. 어린이를 따돌리고 어른들의 ‘이름 내기 수단’으로 이용되는 어린이문학의 실상과 신자유주의, 또는 세계화의 물결에 그저 자본의 몸종 역할이나 하는 문학 모두를 꼬집었다.


사생활이 없는 삶을 살다

이오덕은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다. 그 뒤의 가정도 보통의 잣대로 보면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정우(60, 청주시 신니면 무너미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다) 씨를 그는 홀로 22년을 키웠다

그 뒤로 재혼하여 1녀 1남을 더 두었으나, 평생을 혼자처럼 살았다. 산골의 이곳저곳 작은 초등학교만 다니며 힘든 교직생활을 끝내고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교육의 열정은 계속되었다.(시집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2005, 권정생 머리말)  

길고도 지루하게 이어지던 장마가 끝난 지난여름 어느 날, 권정생(69, 동화작가)은 이오덕을 떠올렸다. 그가 사는 작은 오두막의 한 뼘 마당에 잡초가 푸르게 무성한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생이 쓰신 책 속에 그분의 교육사상이나 우리말 사랑, 우리말 살리기 운동과 문학정신이 모두 담겨 있어요. 그 여러 책을 보면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찌른답니다. 1960~70년대 산간벽지에서 교사로 계실 땐 버스도 다니지 않아 그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교육운동을 실천하셨어요. 그 분은 우리나라 어떤 대학교수도 하지 못한 일을 하셨어요. 중국의 노신 같으셨지요. 아마 그런 분이 우리나라에 열 사람만 있었어도 오늘의 교육현장은 많이 달라져 있을 거예요. 문학도 마찬가지예요. 그러신 분이 많이 계셔야 하는데……. 지금은 아동문학뿐 아니라, 전체 문학판에 없어요.”

오두막의 방은 책들로 꽉 들어차 있는데, 문지방 너머로 보이는 방바닥이 좁아 보였다. 아마도 그곳에서 권정생은 글을 쓰고 잠을 잘 것이다. 봉당 아래 낡은 간이의자에 앉아서 그는 작은 손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켰다.

“선생의 교육사상, 철학은 당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어요. 기존의 교육자나 지성인들의 가슴이 뜨끔했을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너무 강직하셨어요. 교육과 글쓰기에 철두철미해서 본인의 생활이 없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가까이에 많은 후배와 제자들이 있지만, 선생을 따라가지 못했어요. 게으름과 느슨함에는 여지없이 꾸짖음이 뒤따랐어요. 그런 사람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셨지요. 미워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선생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까지 원고를 쓰셨어요.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겨우 네 시간 정도였답니다. 그렇게 스스로 철저한 삶을 사신 거예요.”
이오덕의 그런 엄격한 품성이 때로는 가까이 따르는 어떤 이들에겐 두려움이었고 불편이었다. 그건 이오덕이 이승을 떠난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아직도 그에게 서운해 하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권정생은 말한다.



“제가 한 번은 그랬어요. 그들을 감싸야 하지 않겠냐, 라고요. 허허, 그 자리에서 바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권 선생 그래선 안 됩니다, 라고요. 사실 선생이 매정한 데가 있었어요. 저도 가깝게 대하지 못했어요. 악수도 선생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제가 겨우 손을 잡아보았지요. 하하하.”
권정생은 끝으로 선생이 남기고 가신 뜻에 대하여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오덕과 함께 한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아 이 땅에 참교육을 끝없이 실천하는 일이었다.

 


 

 

 홍인기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현재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작가회의 회원

사진제공 이오덕학교


 이오덕


1925년 경북 청송군 현서면 구석들(상계리) 출생
1943년 경북 영덕군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 졸업
1944년 교원시험 합격. 부동공립초등학교 촉탁 교원으로 부임
1961년 상주군 청리초등학교로 복직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함
1964년 상주군 이안서부초등학교 교감으로 부임
1965년 글짓기 교육이론서 『글짓기 교육, 이론과 실제』 출판
1967년 교감직을 반납하고 경주초등학교 교사로 부임
1975년 염무웅에게 월북작가 오장환이 옮긴 예세닌 시집과 이용학 시집을 빌려준 것이 발각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름
1983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결성, 대표이사
1985년 안기부에서 작성한 ‘동화에도 민중교육 침투, 좌경의식화 교육’ 비난기사가 각 언론매체
에 일제히 보도. 교육민주화운동의 보복 조치로 교육청에서 학교 감사를 수시로 나옴
1986년 경북 성주군 대서초등학교 교장 퇴임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공동대표
1989년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결성. 『우리글 바로 쓰기』, 『이오덕 교육일기1·2』 출판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아동문학분과위원회 위원장
1993년 ‘우리말 살리는 모임’ (회장 이오덕) 결성
1996년 사단법인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자문위원
1999년 충북 청주시 신니면 무너미마을로 이사
참교육상(전국교직원노동조합) 수상
200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받음
2003년 8월 25일 78세의 일기로 충북 청주시 무너미마을 고든박골에서 돌아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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